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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 / 이루 / 2009년 4월
평점 :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로렌 와이스버거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의 도입부처럼 말하자면 적어도 대한민국 여성 10만 명 정도는(어쩌면 1만명 밖에 안 될 수도...) 누구나 되고 싶어하는 직업을 그만두고 나왔다. 다시 태어나도 20대에는 또 한번 선택하고 싶을만큼 멋진 일이었지만 10년 가까이 되니까 나는 너무 지쳐 버렸다. 한 순간이라도 다른 데 눈을 돌리면 의심부터 하고보는 질투심 많은 남편처럼 직업은 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 말고는 제대로 사생활을 누릴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동료들도 술에 취해 불평은 늘어놓았지만 다들 워낙 일을 즐기는 워커홀릭이었다. 한때는 새벽 두시에도 빈 사무실에 남아 취재 전화를 걸만큼 열정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일은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피 냄새를 쫒는 하이에나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어른이 되었나.
어떤 사람은 그동안 틈틈히 공부를 해서 다른 직업으로 바로 디졸브를 하거나 동화 속 공주님 침실같은 카페를 차리거나 퇴직금을 모아서 세계 여행에 도전하기도 한다. 나보다 더 형편없이 술에 취해 있었던 캐나다의 사회부 기자 제레미 머서 역시 적어도 프랑스 파리의 서점 '세익스피어 & 컴퍼니' 로 도망가는 액션이라도 취했다. 하지만 게으른 나는 아무것도 전혀 계획하지 않은 무방비 상태로 내 일이 나를 떠나게 그냥 내버려 두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동생 말따나 낙오자의 변명이지만 약육강식 사회에서 도태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솔직히 말해 가난하니까 좀 재미없어지긴 했다.
그 어느 누구도 가난한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부자 아빠가 부자가 된 키라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패리스 힐튼처럼 힐튼 호텔에서 상속녀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우리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은 '공부의 신' 처럼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해야 하고 젊은 남녀는 '부자의 탄생'을 보면서 부자 애인을 만나는 꿈과 기술을 익혀야 한다. 내 세대에는 불가능하면 우리 아이라도 국제중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주부는 '내조의 여왕' 과 '강남엄마 따라잡기' 가 필수다.
그러나 노력은 했지만 내가 머리가 나빠서 전문대학에 진학하고 겨우 들어간 직장도 비정규직인데다 얼굴이 못 생겨서 데이트 신청을 못 받아 노처녀로 늙고 있다면. 어쩌다 다행히 결혼은 했다고 치더라도 아파트 대출금 이자를 값느라 미용실에는 발길 끊은 지 오래고 아이 키우고 직장생활하느라 집에 돌아오면 자기계발은 커녕 자기 바쁜 불량주부라면. 이상한 일은 더 많은 시간을 더 열심히 더 노력해서 일하는데도 점점 더 우리는 더 차상위 계층의 가난뱅이로 올라가게 될 것이고 자기계발서에 따르면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가난해졌다는 비난에 시달리게 될 거라는 점이다.
이 책 첫머리에 나온 저자의 말을 옮기자면 그렇게 되면 좀 더 노력해보라는 둥, 세상을 위해서 일하라는 둥 설교하려는 놈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회를 위해 고생이 되더라도 노력한다 → 세상이 나아진다 → 떡고물을 얻어먹는다' 는 건 부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내뱉는 말이지. 이렇게 하면 우수한 노예가 될 뿐이야... 거짓부렁! 뻥이야! 그만두는 게 좋다구.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고 나중에는 새 발의 피 같은 돈 부스러기나 얻어 쓸 수 있을 뿐이니까.
그에 비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 좀 곤란한 일에 부딪힌다 → 몸부림친다 → 어떻게든 된다(무슨 수든 쓴다)' 는 생각을 해봐. 이게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방식 아냐? 이거야말로 얼마나 인간답고 즐거우냔 말이야. 조오타. 이렇게 된 바에야 멋대로 살아볼까! 야호! 시시한 놈들이 지껄이는 말은 듣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보자. 우리 가난뱅이가 이 세상을 한바탕 걸지게 뒤집어보자! 좋아 좋아! 정했어! 축제란 말이다! 시끌벅적 한판이닷!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이다. 근데 잠깐만 기다려! 당신들, 덤비지 말구 내 말 좀 들어봐!! 세상은 의외로 빡빡하다구. 기죽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근처 공원에서 매일 낮잠이나 자보라지! 그런 과격한 행동을 개시하면 어떻게 될까? 그 대답을 알기 위해서는 마쓰모토 하지메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일본 도쿄에 사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마쓰모토 하지메. 1974년생이니 한국 나이로 올해 37세다. 어린시절 초등학교 비상연락망이 공란인 친구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뛰어가야 했던 가난한 슬럼가인 가메이도에서 자라났고 어느날 갑자기 작가가 되려고 회사를 그만둔 아버지는 '우리 집은 가난하니까 오늘은 먹을 것이 없다' 는 선언을 했다. 어머니는 한술 더 떠 고등학교 때 이혼을 한 후 자급자족 생활을 하겠다며 아나키스트가 되어 일본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정말 그랬어요? 놀랍게도 너무나 쿨한 그의 대답이 돌아온다. 콩가루집안이죠. (ㅋㅋ)
본격적으로 그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호세대학에 다니던 1990년대 후반쯤부터다. 등록금이 저렴한 자유로운 분위기의 야간대학에서 노숙 동호회 활동을 하던 그는 대학 경영진이 기업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돈벌기 노선으로 갈아타며 학교 규칙을 산더미같이 정하기 시작하자(요즘 한국의 대학을 보는 거 같다) 울화통이 치밀어서 '호세대학의 궁상스러움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다.
우선 바가지를 씌우는 학생식당 앞에서 투쟁을 한 것을 시작으로 난로투쟁, 찌개투쟁, 술투쟁 같은 재미있는 투쟁을 몇 년 동안 이어갔다. 결국 대학에서 지나치게 소동을 피운 탓인지 출석을 안 했는데도 학점을 주어서 강제적으로 졸업했다.
거리로 나오니 이 역시 따분하기 짝이 없어서 또 '가난뱅이 대반란 집단'을 결성했다. 역 앞에서 게릴라 음주회를 열고 악의 우두머리 롯폰기 힐스 오픈을 기념하여 크리스마스 찌개 집회를 열었으며 수백명 규모의 데모신청을 하고도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찰 바람맞히는 집회를 여는가 하면 밥상을 들고 월세 공짜를 위한 데모도 대대적으로 펼쳤다. 나는 지금까지 화염병 데모만이 데모인 줄 알았는데 본인의 말처럼 읽는 사람도 감탄하게 만드는 '아하, 정말 웅대하고 통쾌한 데모였다' 내친 김에 그는 선거에도 나갔다.
그렇다면 그도 인간인 이상 먹고 입고 잠은 자야할텐데 물가 비싼 일본에서 어떻게 돈을 벌고 있을까. 마쓰모토 하지메는 재활용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5년 고엔지 기타나카 거리에서 재활용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 을 하기 시작한다. 이를 시작으로 아는 사람, 지나가다 동료가 된 사람 등이 차례로 점포를 개업하여 어느덧 12호점(실제로는 7호점)에 이르렀다. 바가지 씌우는 경제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신품이 아닌 중고품을 돌려쓰는 가난뱅이 계급의 물자공급 센터가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재활용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을 중심으로 그 동안의 데모와 선거 활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마추어의 반란(나카무라 유키 감독)" 이 만들어졌고 "가난뱅이의 역습" 이 책으로 나왔으며 작년 9월 한국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건만 그는 자비를 들여 3박 4일 동안 한국에 다녀갔다.
여기까지가 '애고 어른이고 까부는 사람은 질색'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평범한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까뿐 마쓰모토 하지메의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성격이 재미가 없어 이 책에서 생활의 기술만 훔쳐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을 배려해 저자도 '여차할 때 써봄직한 가난뱅이 생활 기술' 을 책 처음에 넣었다. 집을 싸게 얻는 법. 밥값 절약 기술. 저렴한 이동 수단. 입을 옷 구하기. 미디어 만들기 등등.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터넷 '짠돌이' 라고 검색만 해도 나오는 이 같은 기술이 아니다. 옮긴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자.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까부는 것도 하나의 절실한 표현이며 전략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현재 일본사회의 90퍼센트 이상이 가난뱅이 계급이라고 말하는 마쓰모토 하지메가 자발적 가난뱅이가 되었든 타발적 가난뱅이가 되었든 가난뱅이로 살기 위해서 누누이 강조하는 게 있다. 바로 지역에서 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솔직히 가난뱅이라도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그의 말을 믿어보려고 해도 부자보다는 가난한 삶이 재미없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은가. 그러나 일단 가난뱅이가 되어버렸다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자신도 없다면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다음 백수회관에 가입하고 친구를 찾아보자. 그리고 연대하자. 혹시 아는가 재미있는 일이 막 벌어질지?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면, 진짜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생활보호나 복지제도 같은 행정에 기대는 방법도 있지만 나라 사정이 안 좋아지는 순간 굶어죽을 수도 있는 방법인 만큼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다. 어느 날 수상이 책상다리를 하고 "돈 못 주겠어! 아무리 야단을 떨어도 못 준단 말이야!!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맘대로 해!!" 하고 손바닷 뒤집듯 딴소리라도 하는 날에는 어쩌겠는가. (한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책은 가능한 한 제멋대로 살아가기를 주제로 삼고 있으므로, 남의 힘을 빌리기 보다는 '가난뱅이가 뭉치면 어떻게든 살아갈 방도가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작전을 챙기고자 한다. 그럴 때 상점가를 비롯한 지역이 무지 중요해지는 거다. 거리에서 살아가는 작전을 궁리해보자!
그 작전이 어떤 건지 궁금하다고? 그럼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아주 재미있는 책이고 저자도 한번쯤 사겨봐도 나쁘지 않을 만큼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