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조병준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내게는 금서가 있다. 말하자면 헤르만 헤세나 산도르 마라이 같은. 별 다른 이유는 없다. 심장이 약한 나머지 마음을 어지럽히는 책은 펼치는 게 무섭다고 할까. 얼마전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고 난 뒤 서른 다섯이 넘기 전까지는 산도르 마라이는 손도 대지 말아야겠구나 다시 한번 결심했다. 바로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의 말이다. "서른 다섯, 막막했어. 호주의 사막에서 산도르 마라이의 '유언'을 읽다 펑펑 울었지. '인정이 없는 여자도 아닌데 나는 왜 죽도록 사랑하지 못 했을까' 란 구절 때문에. 내가 무섭게 일만 했구나. 사랑을 해야겠구나" 아, 나로서는 감당하지 못 할 그런 깨달음을 얻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병준의 책도 한동안 내게는 금서였다.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를 읽고서 이 땅에 발 붙이고 살아가려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 대한 환상이나 불러일으키는 혹세무민한 이 작가하고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겠구나 혼자 중얼거린 적이 있다. 세상에 널린 게 책이었으므로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며칠전 그만 마음이 약해진 나는 이 여행서(?)를 충동구매하고 말았으니 무더워서 잠이 오지 않는 오늘 같은 일요일 밤의 일이었다. 이게 다 열대야 때문이라고!!!

 

서른의 나이에 어느날 조병준은 잘 나가는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의료보험료와 주택부금을 불입하는 것도 때려치운 다음 어머니와 약혼녀를 두고서 처음으로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알다시피 인도에 갔다. 오쇼 라즈니쉬나 유명한 명상 공동체를 찾아간 게 아니라 캘커타에 갔다. 그 후로도 비행기표만 생기면 또 달아났다. "그럼 죽는 사람도 봤어요?" "그럼요" "그런 사람한테는 무슨 말을 해요?" "아무 말도 안 해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손만 꼭 잡고 있어요..."

 

그러나 불행 앞에서도 손만 꼭 잡을 수 밖에 없는 그 곳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그는 풍경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길을 나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삼개월의 여행이 끝나고 다음 날이면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하는데, 그 날 아침에 만난 여자와 저녁이 되기도 전에 사랑에 빠지는 로맨티스트인 자신도 발견하게 되었다. '서른이 되도록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고 그는 말한다. 깨달음은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기차를 놓친 다음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다.

 

사실 집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한번도 여행이 체질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주말이라고 산으로 들로 김밥 싸들고 놀러가는 집안도 아니었고, 친척들마저 씨족 공동체처럼 한 지방에 모여 살아 수학여행 말고는 외지를 방문할 일도 없는데다, 어렸을 적부터 고속버스만 타면 촌스럽게 멀미를 해댔던 것이다. 남학생도 없는데 여학생들끼리 계란을 던지며 고속버스 춤을 추는 수학여행도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그 대신 어렸을 때부터 아파트 단지에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고 낮의 하늘이 밤의 하늘로 그라데이션되는, 프랑스인들이 '개와 늑대의 시간' 이라고 부르는 저녁 시간만 되면 때때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때는 겁도 없이 이웃 동네에 걸어가서 혼자 떡볶기를 사 먹고 돌아왔으며, 중학생이 되어서는 낯선 번호판의 버스를 타고 아무데나 내린 다음 눈에 띄는 만화방이나 오락실로 들어가서 수중에 가진 돈을 남김없이 쓰고 돌아오곤 했다. 그 증세가 심해져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독서실에 간다고 하고서, 경찰의 단속을 피해 심야시간에는 밖으로 못 나가게 문을 잠그는, 24시간 만화방에서 컵라면을 끓여 먹으며 밤새 순정만화를 읽다 넉다운된 몸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사방팔방 산 밖에 보이지 않는 이 고담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그 곳을 떠나 온 다음 돌아보니 낯선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린 시절의 나쁜 병력도 내 곁을 떠나고 없었다. 나는 구도에의 욕망도 없고 깍지 못한 내 머리 속의 이 한 마리키운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조병준처럼 집을 떠나고 나서야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게 되었다고 할까... (그러나 차마 어떤 인간인지는 밝힐 수 없다...) 

 

낯선 여행지에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영국인 탐험가처럼 에스키모인에게 평화를 상징하는 월계수 이파리를 흔들지 않아도, 기차가 떠나고 내 옆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천막도 없이 주차장 한 켠을 빌려서 서커스를 펼치는 가난한 집시들이 그에게 들려준 것처럼. "준, 언젠가 또 한 번 기차를 놓치렴. 그러면 우리가 또 만나잖아..." "나는 또 한번 마음에 빈 틈이 생겨서 충동구매를 하고 싶다. 이제부터는 기차를 놓치며 살 거라고. 기차를 놓쳐야 사람을, 운명을, 인생을 만날 수 있다고. 기차를 놓치면 나도 며칠은 서커스의 소년이 될 수 있다고..."

 

그러나 서울은 남들 다 타는 기차를 놓친 다음 아무렇지 않게 친구를 만들어서 떠날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인간에도, 공간에도 '사이 간間' 자가 들어간다고 알고 있어. 사람이 사람이려면 그 사이에 빈 자리가 있어야 된다고 알고 있어.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선 모든 방향으로 빈 자리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어..." 라고 말은 하지만 그 빈자리를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다시는 서울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서울은 누구도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는 도시라고 아이리스가 말하지 않아도 서울에 사는 우리가 이 곳에서 살기 힘들다는 걸 더 잘 안다. 뭐 장국영 같은 대스타도 홍콩에서도 살기 힘들다고 뛰어내리는 마당이니 세상 어디나 먹고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이 곳에는 비집고 들어갈 빈틈이 더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도 빈틈이 없어서 된장녀 같은 건 그냥 두지 않고 씹어댄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는 된장녀도 살기 힘들고 조병준도 살기 힘들고 나도 살기 힘들고,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살기 힘들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떠나고 싶다. 

 

"어떤 여행이 좋은 여행인가요?"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여행이죠" "왜 그렇게 갔던 곳을 자꾸 또 가세요?" "그 곳에서 자꾸 보고 싶은 사람,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로맹 가리가 그러지 않았나, 마흔일곱이라는 나이가 되면 사람이 아니라 풍경이 그리워진다고. 그러나 아직 사람을 더 그리워하는 걸 보니 조병준은 영낙없는 서른살 청춘이다. 부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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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8-2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전에 저쪽에서 읽고서 이쪽엔 안 올리시나 했네요. ^^
여행은, 쫌 귀찮아요. -_-

야클 2006-08-2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 urblue님, 저쪽이 어딘가요?

snowdrop님 잊을만 하면 한번씩 글 올리시네요. ^^


Koni 2006-08-3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병준님의 책은 마음을 조여들게 합니다. 담담한 데도, 삶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나를 몰아부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너, 이렇게 살아도 되겠니? 하면서요.

히나 2006-08-31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 저도 휴가 때 여행 가고 그런 거 딱 귀찮아요- 잘 지내고 계시죠?

야클님. 비밀이예욤!!! ㅋㅋ

냐오님. 질문을 던지는 책은 참 가슴이 아파죠.. 그래도 그냥, 이렇게 살아요 ㅎㅎ

비연 2006-09-0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하이드 2006-09-05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스.가 아닐까? 어이어이 살아있었군.

하이드 2006-09-0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단 한번도. 사람.을 보러 여행을 간 적 없는데, 여행지.에서의 사람은 내게 그저 풍경의 하나.일 뿐인데. 나는 아주 어릴적부터 팍삭 늙었던거구나.

히나 2006-09-0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고맙습니다 잊지 않고 후후후후.. 슬쩍 올리고 있었는데 민망스러워요..

하이드 방가방가 잘 살고있지? 경쟁 인터넷 서점으로 옮기는 일은 하지 않는다구
원래부터 활동하던 다른 포털사이트를 말하는 게지..

비로그인 2006-09-06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축드리옵니다..;;

책속에 책 2006-09-06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축하드리고, 님덕분에 님의 리뷰 때문에 이 사람 책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프레이야 2006-09-07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반갑습니다. 이 책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갑니다... 그리고 산도르 마라이의 책에 대한 언급, 공감됩니다. 유언이나 열정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했었죠..

히나 2006-09-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군님 고맙습니다 제가 아는 분 맞죠? 안 온 사이 닉넴이 좀 바뀐 거 같아요... ^^

Daydreamer님 다른 책들도 장정을 새롭게 해서 나왔더라고요 함 읽어보셔요

배혜경님 제 친한 친구와 이름이 같네요...(퓹) 산도르 마라이 언젠가 읽고 싶어요

별빛속에 2006-09-24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맛나게 쓰신 리뷰네요. 냠냠~ 잘 먹고 갑니다. ^ ^
잘 먹은 기념으로 추천 한 방도 같이 날려드리고 가요~@ ^ -^

히나 2006-09-28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귀여운 앤 셜리 양이네요.. ^^

가시장미 2006-11-02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봐도 언니의 리뷰는 매혹적이야. 으흣
자꾸 귀잖게해서 미안한데요. 컴텨를 바꿔서 그 주소 또 잃어버렸어요. _-_)~
언제 오시면 귓말좀 해주세요. 으흐

히나 2006-11-1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케이 지금 봤음 ^^

천평 2008-09-13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기억해주세요. 님의 글에 몬가 모를 묘하게 끄는 정취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