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예찬 -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다시 보기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이은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안마당에서 담배피우는 남자와 술 마시는 여자
피데르 드 호흐, 1960

구조주의 철학자 츠베탕 토도로프가 쓴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에 관한 책으로, 가로세로 210 판형이 마치 액자처럼 수록된 그림들을 빛내준다.

17세기 어느 한순간 네델란드에서 갑자기 놀랄만한 그림들이 나타난다. 그 전까지의 종교화나 역사화와 달리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과 인생의 교훈을 담은 그림들이 갑자기 그려지기 시작한 것. 훗날 사람들은 16세기 르네상스 미술, 19세기 프랑스 미술과 더불어 17세기 네델란드 미술을 미술사에서 세계 3대 사건으로 꼽게 된다.

유럽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역을 장려한 네델란드. 전세계를 돌아다니다보니 똘레랑스(관용)정신이 널리 퍼져 공식적으로 청교도 국가(칼뱅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유태교, 카톨릭 등 다양한 종교가 인정되었다.

무역으로 재화가 널리 퍼져 시민들은 부유해지고 수준이 높아졌다.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도 어느 나라보다 당당했다. 그리고 화가들은 시민들의 삶과 거리와 집과 술집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딸인 여성의 미덕을 화폭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상적인 모습들 속에 도덕과 교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의 시작으로 정확히는 프란스 할스와 오르테르벨트 사이에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1582년 프란스 할스가 네델란드에서 본격적으로 장르화를 열었고 유디트 레이스테르와 몰레나르 등의 제자를 두었다. 유디트 레이스테르는 동료 화가 할스가 결혼하기 전까지 여성의 시선으로 생기 넘치는 아이들과 여성들을 그렸다.

그리고 장르화의 최고대가로 얀 스텐과 가브리엘 메추가 있고, 술집과 매춘부, 부덕한 남성 등을 즐겨 그렸다.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지만 가브리엘 메추에게는 얀 스텐이 갖춘 우스꽝스러움과 코믹한 특성, 즉 천재성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피데르 드 호흐와 헤라르트 테르보르흐라는 두 거장이 있다.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와 어머니와 딸과 미덕을 즐겨 그렸다. 피데르 드 호흐의 그림 속 인물들은 그 특유의 표정으로 장르화에 놀랄만한 엄숙함과 종교적인 신비함까지 부여한다. 헤라르트 테르보르흐는 비단옷을 입은 부유한 여성을 즐겨 그렸다.

그런데, 왜 네델란드의 두 거장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는 나오지 않는걸까. 두 사람은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에 속한 그림들을 그렸지만 그 천재성으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통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얀 베르메르는 그림 속에 이야기를 담지 않고 단지 그림을 위한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200년 후 19세기 화가들과 닮아있다.

17세기 네델란드 그림들 속에 개, 고양이, 새, 빈 새장, 굴, 술, 첼로 등이 나오면 99% 성적인 메시지를 담고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도덕적인 설교를 하면서도 일상적인 부도덕함을 감싸않는다고 할까. 대부분 남성은 부덕한 존재로 여성은 미덕의 존재로 그려져있다. 여성은 여전히 집안에 속해있지만 그 어디에서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집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온몸에 받고 환하게 빛나는 존재다. 더 특별한 건 아이들이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눈빛을 하고 엄마 옆에 얌전하게 서 있는 여자아이들.

17세기 네델란드 화가들은 단순히 직업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어느 한순간 축복받은 시대가 그러하듯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빛나는 그림을 쏟아내다 후대로 이어지지 않은 채 쥬라기시대 공룡처럼 '일상예찬'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림에 관해서는 리뷰를 할만한 수준이 안 되므로 츠베탕 토도로프의 '일상예찬'을 요약정리해봤다. 어젯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열었는데,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명화들 때문에 마지막까지 다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앞 표지 그림 피데르 드 호흐의 '어머니와 아이들'이 너무 아름답게 다가왔다.

정말이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나의 고민들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명작들 앞에선 한낱 부질없는 일로 여겨졌다. 우주의 신비나 진리, 인생의 비의(秘意)를 깨닫는 축복받은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건 시시한 연애나 부질없는 야망에 비할 바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

 

☞ 이 리뷰 역시 작년에 써둔 것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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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07-03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즐겁게 읽은 책이에요. ^^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어룸 2005-07-0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두 추천~!!

플레져 2005-07-04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7세기에 여성으로 태어났었더라면 괜찮았겠다...싶은 생각이 드네요 ^^;;;
오래전부터 보관함에 담아있는 책인데... 더 간절해지는군요. 추천해요!

히나 2005-07-04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저도 아주 좋아하는 책이랍니다. 이 책을 읽고 네델란드 회화전을 갔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투풀님, 추천 고맙습니다 ^^
플레저님, 17세기에 여성으로 태어났었더라면.. (화가의 모델이 되지 않는 이상) 집안에 쳐박혀 일생을 보냈을 거예요

로드무비 2005-07-04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오래도록 처박혀 있는 책인데 당장 사보고 싶네요.
추천하고 가요.^^

marine 2005-07-0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죠? 그림이 아주 시원시원 하게 실려서 참 마음에 들었어요 전 도서관에서 빌려 봤는데 소장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에단 호크 사진, 넘 멋진 거 아니예요??^^ 비포선라이즈의 치기어린 젊은 에단 호크도 멋지지만, 비포선셋의 30대의 지적인 에단 호크도 넘넘 멋진 것 같아요 !!

히나 2005-07-05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며칠 안 보이더니 다시 돌아오셨네요 반가워요~

나나님, 에단 호크는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이자 배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