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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의 거장 에스코피에
미셸 갈 지음, 김도연 옮김 / 다우출판사 / 2005년 7월
평점 :
미셸 갈의 ‘요리의 거장, 에스코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국 요리사의 전기이고 나오는 음식마다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호텔요리라는 점에서, 역시 듣도 보도 못한 소박한 아저씨 식당이 나오는 김형민의 ‘마음이 따뜻한 식당’하고는 정 반대편에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공정한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도 좋지만 먹는 행위의 진정한 즐거움은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예찬’에 더 가까이 있는 게 아닐까.
요리는 축복이고 주방은 성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조식을 제외하고) 호텔 레스토랑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지만 ‘모든 일류 요리사들의 아버지’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지금이라도 리츠칼튼 호텔에서 스테이크라도 썰어야 하지 않나 하는 조바심이 든다. 물론 그러기에는 지갑아 날 뜯어먹어라 하는 개털신세이니 책으로라도 그 화려한 만찬을 실컷 맛보도록 하자
주인공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평범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열 세 살 어린 나이에 호텔 레스토랑 견습생 시절을 거쳐 그랜드, 사보이, 리츠 칼튼 호텔 주방장을 역임하며 전 세계 셀레브들의 입맛을 손끝 하나로 좌지우지한 현대 호텔 요리의 거장이다. 이 책에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영국, 프랑스, 모나코, 이탈리아 등지를 무대로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화려한 만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펼쳐진다.
그런 면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사회상을 비춰주는 사진기 역할도 해준다. 우리는 화려한 정치와 예술의 세계에서 프랑스 요리가 때로는 외교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음을 볼 수 있다’는 사뵈르의 추천사의 말을 옮기고 싶다.
이 책에는 하루 10번씩 풀코스의 만찬을 즐기느라 허리둘레가 48인치나 되는 영국의 배불뚝이왕 에드워드 프린스 7세를 비롯하여 앵그르의 ‘샘’에 나오는 무희처럼 아름다운 프랑스의 외제니 황후 같은 로열 패밀리들의 삶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 유명한 릴리 랭트리, 레이디 워릭, 카밀라 파커볼스의 증조모 엘리스 케필 등 한 세기 전의 유물같은 이름의 정부들이 줄줄이 불려 나와 왕실 스캔들을 좋아라하는 나로서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어떤 이름들이 나올까 궁금할 따름이다. (다른 사람들은 별 관심 없을 수 있다)
그 뿐이랴. 예술과 음식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자신이 미식가였던 에밀 졸라와 스탕달을 비롯, 말년의 모네와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 사라 베르나르같은 세기의 이름들이 만찬을 함께 하고 풍성한 식탁을 빛내준다. 그리고 에스코피에가 만드는 창작요리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림으로서 후대에 영원히 남게 된다.
그러나 이 책에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나 오를만한 그런 즐거움 말고도 여러 가지 감동적인 일화가 가득하다. 어떻게 해서 에스코피에는 후대에 ‘모든 일류 요리사들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게 되었을까.
그는 피라미드처럼 쓸데없이 높이 올리기만 하는 거추장스럽고 화려한 요리보다는 단순하지만 새롭고 현대적인 요리를 만드는데 일평생 노력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여행 중일 때 말고는 호텔 레스토랑을 이용하지 못하던 불평등한 시대에 남들보다 앞서 여성의 시대를 예감하고 그녀들을 위한 요리를 만들었던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주방설비를 현대화하고 쓸데없는 동선을 줄임으로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요리사들이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은 물론, 요리하고 남은 음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은퇴한 요리사들을 위한 양로원을 짓고 평생 후대 요리사들을 위해 요리 매뉴얼과 레시피를 정리하는데 힘썼다.
이런 이유로 그는 시민 자격으로는 최초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요리사가 되었는데 한마디로 그는 요리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군요! 그동안 당신이 깨달은 바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항상 똑같았다. "깨달은 바라.. 그건 단순할 것, 옳지 못한 생각들과 옳지 못한 요리법들을 피할 것이지요."
다시 말해 진정한 요리는 어려운 데 있지 않다. 옳지 못한 생각들과 옳지 못한 요리법들을 피한 에스코피에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예전처럼 요리하지 않을 수 있었고, 여기에는 지나가버린 미식가의 시대가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아,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