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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래빗 저격사건 ㅣ 랜덤 시선 5
유형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생달 언니, 며칠 전 언니의 처녀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잉크냄새도 마르지 않은 ‘피터래빗 저격사건’을 사서 우리가 사랑하는 ‘건전한 부르주아의 도시’로 데려 왔어요. 요즘 들어 하늘은 상한 우유처럼 흐리고 마음은 온통 소금밭을 헤매고 다니느라 몹쓸 열병에라도 걸린 아이처럼 들떠있어요. 시원한 소나기라도 내린다면 언니의 싯구처럼 이 편지를 ‘흘러가는 빗물 편에’ 띄우고 싶지만 날씨는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구요. 안타깝지만 우리네 생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예요.
저 높은 하늘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안테나를 세우고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추며 가슴에 시 한 웅큼이라도 더 품으려고 노력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세상의 모든 시인들을 질투하던 어리석은 날들이었죠. 그러나 나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쓴다는 게 어떤 건지 끝끝내 알지 못한 채 서투른 문학소녀시절을 졸업했어요. 그리고 시집하고도 오랫동안 안녕.. 안녕..
그러다 이제는 되려 시인들을 불쌍하게(?) 여길 때 쯤 생달언니를 만났어요. 많이도 보고 싶었지만 몇 번 안 되는 우리의 만남은 늘 어색했죠. 아마도 나는 마음 한켠에서 아직도(!) 열심히 시를 쓰는 언니를 질투했는지도 몰라요. 그래요. 얼마나 질투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시집을 펼치자마자 내가 모르는 낯선 얼굴의 시인이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캔디바를 물고 있는 폭풍 속의 하록선장’과 ‘고전적인 펑키 스타일의 겨울’을 부르는 어여쁜 여인이 내가 아는 생달언니가 맞나요? 그동안 언니의 시들을 블로그를 통해 종종 훔쳐봐 왔지만 이렇게 예쁜 모습을 하고 있을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다알리아 꽃을 머리에 인 소녀들과 살구나무 아래 시들어가는 얼굴들, 17세기 스페인 항구를 지나 눈부신 범선의 돛대에 펄럭이는 바람, 오래전 헤어진 애인의 푸른 안구와 감나무 잎으로 손몫을 긋고 싶은 가을 햇살..
생달언니, 예전의 나라면 죽음과 섹스와 길을 잃은 방황에 매혹되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언니의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더 마음에 들어요. 촌스럽지만 ‘분홍 과꽃의 씨방’에 사람의 거처를 마련해 놓을 줄 아는 당신처럼 착한 사람이 말예요. 그래서 지금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난 아픈 게 아니고 생이 조금 모자랄 뿐’이라는 말을 절대로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 우연히 유통기한이 지난 파일을 지우다 지난 달 쓰다 만 이 러브레터를 발견하고 부끄럽지만 더 늦기 전에 띄웁니다. 지금은 언니 말처럼 ‘감각으로 사유하는 종(種)들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예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이 글은 리뷰가 아닌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