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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로망 백서
박사.이명석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자로 여행에 관한 작은 로망이 있다. 평소 시간은 남아돌지만 돈이 없는 관계로 낯선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을 때 종종 가짜 여행을 떠나곤 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베텔스만 북클럽에서 받은 빨간색 여행용 가방에 옷과 책과 엠피삼 등을 챙기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다음 인터넷으로 기차 시간표를 알아본 후 신촌역을 출발해 백마역까지 가는 기차를 타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남으면 임진각역까지 가거나 아니면 대부분 백마역에 내려 커피숍에서 뭐 좀 마셔준 다음 마을버스를 타고 언니네 아파트로 간다. 별 거 없다고? 그럼 이건 어떤가?
알라딘 사람들이 질색하는 배수아 소설 ‘동물원 킨트’를 보면 외국에 굳이 나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이방인 놀이’란 게 있다. 작가의 말을 옮겨보자. 이것은 반드시 혼자서 해야 하며 놀이가 끝날 때까지는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 자신의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 놀이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말해두는 것이 아주 좋은 방법이다. 일단 이방인이 되면, 자신에게 피부처럼 익숙했던 사물이나 현상들이 좀 다른 각도로 보이기 시작한다.
지리멸렬한 삶에서 비행기를 타고 활주로를 떠나 구름 너머 낯선 세계로 공간이동하는 것, 그것이 붙박이 생활인이 꿈꾸는 여행에 대한 로망이다. 사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장소나 계절, 음식, 테마에 따라 객관적인 정보와 여행자의 감상을 종합해서 한데 묶는데 이 책은 여행을 꿈꾸는 사람의 로망에만 집중 올인한다. 그래서 (외국여행을 몇 번 못 떠난 나와 달리) 이 이야기들에 코웃음을 치는 경험 많은 독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양이라서 다행이야’로 유명한 이명석과 박사 두 사람이 말하는 ‘여행자의 로망백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여기서는 취향별로 여섯 가지 코스로 갈아탈 수 있는데, 엔터테인 라인, 서바이벌 라인, 센티멘털 라인, 배가본드 라인, 메모리얼 라인, 판타지아 라인이 있다.
예를 들어 폭풍의 로망이 있다. 산토리니 섬에서 폭풍으로 꼼짝달싹을 못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폭풍으로 섬에 갇히다니 로맨틱하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것. 그리고 직항의 로망 대신 환승 비행장의 로망이 있다. 탑승 안내 모니터에 점멸하는 수많은 도시와 나라의 이름을 맞추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사연으로 소설을 쓰는 것.
위와 같이 1부터 100까지의 로망 중에 내 마음에 쏙 들었던 로망 Best 10을 꼽으라면 렌탈 바이크의 로망, 프티 부티크 호텔의 로망, 나침반 혹은 GPS의 로망, 도시락의 로망, 폭풍의 로망, 시간보존 상자의 로망, 귀국보고회의 로망, 변장여행객의 로망, 사설 숙소 스와핑의 로망, 미스터리 호텔의 로망이 있다. 책을 덮고 난 지금 당장이라도 여권에 이국의 스템프를 찍고 그 로망을 손에 넣고 싶어 근질근질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던져보자. 당신이 이 여행에 대해 진짜로 원하는 게 뭔가. 만일 그 어떤 골치 아픈 사유도 섞이지 않고 순도 100%의 안전한 환상만 즐기고 싶다면 이 책을 고르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다. 그러나 사람이 꿈만 가지고 살 수 없듯이 로망만 가지고도 살 수 없는 법. 당신이 환상이 아닌 현실을 마주하고 싶다면 이 여행 가이드는 피하는 게 좋다. 그건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체험으로 바뀌기 전까지 ‘여행자의 로망백서’는 단지 낭만적인 여행의 기술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