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고 알게 되고 함께 활동했던 시간은 만 2년 2개월 정도였다.
전포동 초라한 건물, 4층 화장실 옆 자투리 공간에 작은 책상 2개를 놓고 활동을 시작했던, 부팅하는데만 몇 분이 걸리던 낡은 컴퓨터가 사무실의 전재산인, 그러나 뚱뚱한 꿈을 품고 있었던 작은 NGO. 그 곳을 찾아온 거의 첫번째 손님이 김형률씨였다.
따스한 봄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목에는 손수건을 두르고 점퍼를 입고 무거운 가방을 매고 나타났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NGO에 그는 요구했었다. 한국원폭2세 환우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도와달라고. 그를 만나고 나는 히로시마를, 나가사키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피해자들 내부의 복잡다단한 사정과 내부의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 분노하게 되었다.
그의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쉽게 그의 일을 나와 나누려 들지 않았다. 수고스럽고 힘들어도 그는 늘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사물을 챙겼고, 반복됐던 입원으로 늘 병원비가 부담이었지만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돈은 받지 않았다.
그는 정말 그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
단 2명의 회원뿐인 조직인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인정할 수 없다던, 당시 보건복지부 담당과장의 비아냥에 그 자신이 환자이면서 직접 다른 환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가 급작스럽게 서거했을 무렵, 한국원폭2세환우회에는 60명이 넘는 환우들이 가입한 상태였다.
그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고, 자신의 목숨과 바꿔 한국사회가 잊고 살았던 한국원폭피해자들, 그 2세, 3세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무참히 그를 보내고 남은 이들은 그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이런저런 활동들을 해오고 있다.
다시 5월, 그를 보내고 10년이 흘렀다.
그가 목숨을 걸고 만들고자 했던 특별법은 아직도 제정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말을, 뜻을 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과 나누고자 조촐한 추모 문화제와 10주기 추모제(추모 식수)를 준비하였다.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자리로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10주기를 맞아 초창기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고 활동해왔던 아오야기 준이치 코리아문고 대표가 집필한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가 출판되었다. 그가 기억하는 김형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