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꿈과 저녁의 꿈, 빛과 밤. 달, 태양 그리고 낮의 장밋비치 광선과 밤의 희미한 빛, 시와 분. 한 주와 한 해 전체. 얼마나 자주 나는 내 영혼의 은밀한 벗인 달을 올려다 보았던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첫 문장이다. 에세이 아니면 수필. 붓이 가는 대로 쓴다는 바로 그 글이다. 그런데 붓이 가는 대로 적으면 안 된다. 붓은 곧 마음인데, 마음은 경계도 없고, 규묘도 없다. 그저 구름처럼 떠돌아 다닌다. 텍스토와 생각은 엄연히 다른 세계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 다시 생각이 작동한다. 우린 그것을 사유라고 한다. 때론 상상하기도 한다. 사유와 상상은 논리적인가 비 논리적인가를 묻지만 실은 동일하다.


툭툭 던지는 글이 읽는 이들에게 묘한 울렁거림을 준다. 


"나는 사랑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을 느낀다."(42쪽)


"왜냐하면 천재란 그 어떤 방식으로도 도울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66쪽)


제프 다이어의 <지속의 순간들>도 선물해 주었다. 독특하다. 사실적이고 현장감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어릴 적, 동네에 살던 한 집이 여수로 이사를 갔다. 당시만 해도 여수는 머나먼 곳이다. 다시 여수로 어떤 동네 아짐을 만난 건 그로부터 약 8년 정도가 흐른 뒤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분은 나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은 내가 아직 어려 큰 마음이 없었던 같다. 그렇게 난 처음 여수란 단어를 알게 되었고, 처음 여수란 곳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20년이 흐른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여수의 쓰리고 아픈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여수의 아픔은 '여수 밤바다'로 묻히기엔 너무나 아프고 슬픈 역사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이 특별판으로 제작되어 출간 되고 있다고 한다. 사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다. 아파서 읽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여수는 두 얼굴이다. 하나는 아픈 얼굴. 다른 얼굴은 낭만의 공간. 나에게 여수는 낭만이 아닌 아픈 얼굴로 다가온다. 여수에 아는 지인에 있어 옛 여수 이야기를 꺼내 말문을 닫는다. 그들에게 여수는 현재로만 기억되고 싶은 것 같다. 과거의 아픈 얼굴을 꺼내는 것은 싫은 가보다. 하지만, 아픔이 사라진 여수, 낭만이 전부인 여수는 과연 여수일까? 그냥 관광지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평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놀라움


기실, 서평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평 외 다른 단어는 사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냥 서평이라고 쓴다. 서평이란 단어는 비평이란 의미가 강한 탓에 감상문이나 독후감은 왠지 남루한 느낌으로 만들어 버린다. 비평적 서평은 좋은 글쓰기는 아니다. 다만 책 자체를 다루기 때문에 그런 글도 필요할 뿐이다. 좀 더 좋은 글쓰기는 독후'감'이다. 아니면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시 풀어낸 새로운 서'평'이든지. 


다락방님의 책 두 권이 도착해 열심히 읽고 있다. 첫 책의 제목은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고, 이번 책은 <잘 지내나요>인데 표지에 '나, 너, 우리를 향한 이해와 공감의 책읽기'라고 소개한다. 두 권 모무 '공감'을 키워드 잡은 듯 하다. 읽어가는 동안 내내 드는 생각이 '이 글이 알라딘 서재'에서 읽었던그글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화면으로 보는 글과 종이의 글을 읽는 것은 다른 글이다. 그러니까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결국 책은 종이로  읽어야 함이 마땅하다. 


2011년에 김무곤이란 분이 <종이책 읽기를 권함>이란 책을 썼다. 당시 이 책을 읽을 땐 고리타분함과 시대를 분별못한 노인의 아집쯤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6년이 흘러 2017년이 되었다. 난 이 책을 보며, 그분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된듯하여 약간 서글픈 느낌도 있지만, 종이 책이 좋은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오늘 종이책과 디지털 화면의 이질성을 체득한다. 이제 그 가치가 뭔지를 조금 알 것 같다.







그러니까... 이유경(다락방)의 서평은 서평이 아닌 것이다. 한 참을 영화 이야기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책 이야기를 간략하게 꺼내고 다시 닫아 버린다. 이 분의 강점은 책과 전혀 상관 없는 영화 이야기 속에서 책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글에서는 남자로서는 이해할 수 여성의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난 여자의 마음에 둔하다. 그래서 잔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다. 변명처럼 들리지만 과학적으로 남성의 뇌는 공감능력이 여성에 비해 떨어진다고 한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무엇이 있는데(기억이 안남) 그것이 여자는 굵고 튼튼한데 남자는 작고 약하다. 그러다보니 남자는 좌뇌 우뇌가 따로 놀고, 여자의 뇌는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남자의 용기와 독립성은 공감 능력의 결여 때문이라는 연구 논문도 있다. 여자가 걱정이 많고 생각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고. 결국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여성의 눈으로 책을 읽어가는 다락방님의 글은 전혀 다른 세상을 접하는 느낌이다. 전에 읽었던 남미경의 <사랑의 역사>와 조금 닮은 듯 안 닮은 듯하다. 

















어제 장흥 문화당에 가서 이색적인 서평 모음집을 샀다. 고민적 외 다수가 적은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이다. 이 책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비평적 서평이 아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를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일종의 회상적 감상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굳이 서평의 범주에 넣으려는 이유는 '다시 읽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기존의 서평보다 한 수 위가 분명하다. 이전의 동화 책과 어른이 된 후의 축소가 왜곡되지 않은 원본의 동화를 비교하게 '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는 독자들은 읽는 내내 긴장이 아닌 추억 속에 빠져들어간다. 어릴 적 추억과 현재의 삶이 버무려져 맛깔스럽기 때문이다. 핵심은 비평인데, 포장은 추억이다. <플란더스의 개>를 소개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인 이정모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를 제외한 온 식구가 서울에 올라와서 잠실의 아파트에서 '문화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엄마가 생막하기에 '신문 구독'과 '우유 배달'은 문화 생활의 정수였다."(41쪽)


문득, 우유하면 플란더스의 개도 생각 나겠지만 나에게도 우유에 대한 추억이 있다. 초딩, 그리니까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갑자기 우유 배급이 되면서 한 달에 얼마를 내면 우유를 매일 준다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2000원 정도 였던 것 같다. 일년 용돈이 200원이었던 우리 집에 한달 2000원은 거금이었다. 결국 62명의 학생 중 4명 정도의 아이들은 먹지 못했는데 나도 네 명 중의 한 명이었다. 어쨌든 우유와 함께 '플란더스의 개'가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전의 해태우유와 성인이 되어 읽은 동화 책은 다른 책이었다. 비루남고 남루한 네루-넬루는 결국 굶어 죽는다. <플란더스의 개>는 사회 구조에 대한 독설이 가득한 책이다. 다만 슬픈 소년의 죽음이란 테마로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다. 


"그런데 소년의 가난이 장난이 아니다. 만화에서 보던 네로 가족은 아침마다 우유만 배달하면 포근한 집에서 살 수 있었지만, 동화책에 나오는 넬로 가족은 하름하기 그지없는 손바닥만 한 흙집에 살았으며, 끼닛거리가 없는 날이 허다했다. 양배추 몇 잎에도 기뻐할 정도였다."(47쪽)


프란츠 카프카의 말처럼, 진정한 읽기는 '도끼'다. 몽상과 환각 상태의 정신을 가차 없이 깨 버린다. 또한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책읽기는 독서의 풍성함을 제공한다. 더워지고 있다. 여름이 오기 전에 더 많이 읽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흰나비를 보았다. 급하게 카메라를 그쪽으로 향했지만 조리개를 과하게 좁힌 상태라 원하는 사진은 얻지 못했다. 한 장의 사진은 시간을 멈추게 한다. 영원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사진은 충분히 변하지 않는 풍경을 통해 위로를 준다. 며칠만에 나비들이 많이 보인다. 봄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비가 보이려면 번데기가 변태하여 나비가 되는 시간이 필요한데, 따뜻한 날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비를 봄으로 여름이 멀지 않았음을 눈치챈다. 나는 봄을 읽고 있다.



다락방님이 과한 서문을 끝내고 본론 같은 결론을 언급한다. 그것은 자신의 새 책이 나왔다는 것. 글로만 읽다 책을 쓴 저자인줄 몰랐다. 글이 하도 간질거려 종종 읽고 댓글을 단다. 책으로 나았다니 당장 주문했다. 그것도 첫번 책까지 두 권 셋트로 말이다. 이제 낱권 말고 셋트로 파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난 또 누군가를 읽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그러니 책이 사람이고, 사람이 책인 것이다. 사뭇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표지의 저 여성분은 대체 누굴까? 저자 자신이 아니라고 우기는데... 거 참! 난 엉뚱한 곳에 관심이 가는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7-04-14 0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다락방님의 두번째 책이 나왔다니 보러 가야겠네요.
빛고을에도 나비가 부쩍 눈에 띄어요~^^

낭만인생 2017-04-20 10: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봄이 좋긴 좋네요.
 

봄이 왔다. '왔다'는 '가고 있다'로 읽을 수 있다. 봄이 왔다고 읽는 사람은 겨울을 염두에 둔 읽기고, 봄이 가고 있다고 읽는 사람은 봄을 간직하고 싶은 사람이다. 언어는 진실하고 정직하다. 언어를 읽는다는 것은 언어 너머에 생각과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 


아직 겨울을 머금은 동백이 조금 남아있고, 봄을 알리는 벚꽃도 만개한 상태다. 여기 저기 여름이 가까워 왔음을 알리는 싹들이 모습을 보인다. 곧 더워 지리라. 




오언 존스의 신간 소식이다. <차브>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선하다. 내용은 망각되고 없는데 약간의 분노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 차브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깊게 배여있다. 


이번 신간 <기득권층>은 말 그대로 기득권자들의 세계를 파헤친다. 신간 표지를 함께 고르며 신간 소식을 알려준 사장의 셈세함이 책에 그대로 배여있다. 기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분노하게 만든다. 철옹성처럼 쌓여진 기득권자들의 '층'은 무너뜨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을 일으킨다. 


그래, 곧 봄이 간다. 겨울이 갔듯이. 이젠 기득권층도 무너져야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오언 존스는 대단한 사람이다. 두 책을 계약해 펴내는 북인더갭도 멋지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7-04-11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봄을 읽다! 예쁘네요.

낭만인생 2017-04-11 15:0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곧 여름이 시작되는 듯 해 아쉽게 봄을 만지고 있습니다.

붕붕툐툐 2017-04-11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참 예뻐요~^^

낭만인생 2017-04-12 09:5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집 근처에서 찍어 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