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놀라움


기실, 서평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평 외 다른 단어는 사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냥 서평이라고 쓴다. 서평이란 단어는 비평이란 의미가 강한 탓에 감상문이나 독후감은 왠지 남루한 느낌으로 만들어 버린다. 비평적 서평은 좋은 글쓰기는 아니다. 다만 책 자체를 다루기 때문에 그런 글도 필요할 뿐이다. 좀 더 좋은 글쓰기는 독후'감'이다. 아니면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시 풀어낸 새로운 서'평'이든지. 


다락방님의 책 두 권이 도착해 열심히 읽고 있다. 첫 책의 제목은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고, 이번 책은 <잘 지내나요>인데 표지에 '나, 너, 우리를 향한 이해와 공감의 책읽기'라고 소개한다. 두 권 모무 '공감'을 키워드 잡은 듯 하다. 읽어가는 동안 내내 드는 생각이 '이 글이 알라딘 서재'에서 읽었던그글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화면으로 보는 글과 종이의 글을 읽는 것은 다른 글이다. 그러니까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결국 책은 종이로  읽어야 함이 마땅하다. 


2011년에 김무곤이란 분이 <종이책 읽기를 권함>이란 책을 썼다. 당시 이 책을 읽을 땐 고리타분함과 시대를 분별못한 노인의 아집쯤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6년이 흘러 2017년이 되었다. 난 이 책을 보며, 그분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된듯하여 약간 서글픈 느낌도 있지만, 종이 책이 좋은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오늘 종이책과 디지털 화면의 이질성을 체득한다. 이제 그 가치가 뭔지를 조금 알 것 같다.







그러니까... 이유경(다락방)의 서평은 서평이 아닌 것이다. 한 참을 영화 이야기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책 이야기를 간략하게 꺼내고 다시 닫아 버린다. 이 분의 강점은 책과 전혀 상관 없는 영화 이야기 속에서 책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글에서는 남자로서는 이해할 수 여성의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난 여자의 마음에 둔하다. 그래서 잔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다. 변명처럼 들리지만 과학적으로 남성의 뇌는 공감능력이 여성에 비해 떨어진다고 한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무엇이 있는데(기억이 안남) 그것이 여자는 굵고 튼튼한데 남자는 작고 약하다. 그러다보니 남자는 좌뇌 우뇌가 따로 놀고, 여자의 뇌는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남자의 용기와 독립성은 공감 능력의 결여 때문이라는 연구 논문도 있다. 여자가 걱정이 많고 생각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고. 결국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여성의 눈으로 책을 읽어가는 다락방님의 글은 전혀 다른 세상을 접하는 느낌이다. 전에 읽었던 남미경의 <사랑의 역사>와 조금 닮은 듯 안 닮은 듯하다. 

















어제 장흥 문화당에 가서 이색적인 서평 모음집을 샀다. 고민적 외 다수가 적은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이다. 이 책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비평적 서평이 아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를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일종의 회상적 감상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굳이 서평의 범주에 넣으려는 이유는 '다시 읽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기존의 서평보다 한 수 위가 분명하다. 이전의 동화 책과 어른이 된 후의 축소가 왜곡되지 않은 원본의 동화를 비교하게 '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는 독자들은 읽는 내내 긴장이 아닌 추억 속에 빠져들어간다. 어릴 적 추억과 현재의 삶이 버무려져 맛깔스럽기 때문이다. 핵심은 비평인데, 포장은 추억이다. <플란더스의 개>를 소개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인 이정모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를 제외한 온 식구가 서울에 올라와서 잠실의 아파트에서 '문화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엄마가 생막하기에 '신문 구독'과 '우유 배달'은 문화 생활의 정수였다."(41쪽)


문득, 우유하면 플란더스의 개도 생각 나겠지만 나에게도 우유에 대한 추억이 있다. 초딩, 그리니까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갑자기 우유 배급이 되면서 한 달에 얼마를 내면 우유를 매일 준다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2000원 정도 였던 것 같다. 일년 용돈이 200원이었던 우리 집에 한달 2000원은 거금이었다. 결국 62명의 학생 중 4명 정도의 아이들은 먹지 못했는데 나도 네 명 중의 한 명이었다. 어쨌든 우유와 함께 '플란더스의 개'가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전의 해태우유와 성인이 되어 읽은 동화 책은 다른 책이었다. 비루남고 남루한 네루-넬루는 결국 굶어 죽는다. <플란더스의 개>는 사회 구조에 대한 독설이 가득한 책이다. 다만 슬픈 소년의 죽음이란 테마로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다. 


"그런데 소년의 가난이 장난이 아니다. 만화에서 보던 네로 가족은 아침마다 우유만 배달하면 포근한 집에서 살 수 있었지만, 동화책에 나오는 넬로 가족은 하름하기 그지없는 손바닥만 한 흙집에 살았으며, 끼닛거리가 없는 날이 허다했다. 양배추 몇 잎에도 기뻐할 정도였다."(47쪽)


프란츠 카프카의 말처럼, 진정한 읽기는 '도끼'다. 몽상과 환각 상태의 정신을 가차 없이 깨 버린다. 또한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책읽기는 독서의 풍성함을 제공한다. 더워지고 있다. 여름이 오기 전에 더 많이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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