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년 목사의 '질문하는 시리즈' 3권 <질문하는 행복>이 출간되었다. 아직 인터넷에 올라오지 않았지만 조만간 올라 올 것이다. 김석년 목사의 글은 쉬우면서도 진지하다. 스스로 진리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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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6권을 구입했다. 이렇게하면 내가 소장한 민음사 세계 문학전집은 약 25권 정도 될성 싶다. 두어달 전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2.3>을 샀으니 말이다. 나는 개인적을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단지 흥미 위주로 몇 권 읽었을 뿐이다. 소설을 싫어하는 이유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을 배우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굳이 꾸며진 거짓?를 읽어야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최근들어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소설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소설은 내가 아닌 작가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것을. 작가, 그러니까 번역되어 나올 정도의 작가는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안목은 내가 평생 살아도 얻지 못한 많은 통찰을 자신 이들이다. 잘못 안 것이다. 진짜 독서는 팩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소설이었다. 


어제부터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를 읽고 있다. 몽환적 느낌의 기이한 이 소설은 라틴문학의 거장으로 불릴 만큼 달콤하고 환상적 이야기다. 저자인 후안 룰포는 이 책을 쓴 푸 거의 절필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도 이 책을 능가할 소설을 쓰지 못한 때문으로 평론가들은 이야기 한다. 정말 신비롭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검색해 보니 제인 오스틴의 <설득>이 올 4월에 출간되어 합 348번까지 나왔다. 어마어마한 시리즈다. 언제 시간내어 몽땅 읽고 싶다. 


소설 읽기의 힘이 뭘까? 팩트가 아닌 거짓?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 그동안 내가 생각한 소설의 그릇된 생각들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논리적 구성과 사실성이다. 소설 용어를 잘 몰라 나의 글로 표현하면 그렇다. 전에 소설을 쓰고 싶어 몇 권의 소설 작법을 읽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강조한 것이 상상력인데 실현 가능한 상상력이다. 즉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상을 하라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소설은 쓸 수는 읽지만 공감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기 때문에 책으로 출판되기도 어렵거니와 거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훌륭한 소설, 위대한 소설은 공감력이다. 시대를 아우르는 인간 본연에 천착한 소설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소설인 셈이다. 그것을 에둘러 말하면 '실현 가능한 상상력'과 '공감'이다. 


소설은 내가 아닌 타자의 삶이다. 한 사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의 삶과 인격, 선택과 종말도 그려진다. 소설은 사람 공부이고 삶 공부인 셈이다. 그러니 소설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책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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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28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갖고 있는 책인데, 저는 모두 다 재미가 도통 없더라구요~ 왬테 지루한지...‘질투‘에서 완전 치를 떨었다죠..^^;;

그래도 소설을 읽어 가는 힘은 분명히 있나 봅니다. 소설읽기가 싫어졌을 때 <파리대왕>이나 <소립자> 또는 <은밀한 생>같은 작품을 읽으면 다시 소설을 찾게되더라구요~ㅎ

낭만인생 2017-06-29 12:23   좋아요 0 | URL
ㅎㅎ 소설 읽기가 보통 어려운게 아니죠. 저도 버벅 대며 읽고 있습니다.
 

책이란 개념이 생긴 것은 불과 천년이 넘지 않는다. 물론 그전에도 책은 있었고, 지금과 별단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때의 책은 지금의 개념과 사뭇 달랐다. 책 한 권이 집 한 채인 경우도 허다했다. 우리가 손에 넣고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은 종이의 발견, 즉 중국의 한지의 발견과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중국의 종이가 유럽으로 넘어가 인쇄의 발달과 더불어 지금의 책이란 개념이 만들어진다. 종교개혁은 책 때문에 일어난 운동이다. 아니 가능했다. 그러니 종교를 역사에서 배제할 수 없고, 문명을 종교에서 불리할 수 없다.  




읽기의 확장은 지식의 확장과 밀접하나 사생활과 쾌락에 더 친밀하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와 피셔의 <읽기의 역사> 중에서 독서, 즉 읽기에 집중한 것은 알베르토 망구엘이고 '역사'에 가까운 것은 피셔이다. 여행은 일종의 탐닉이고, 여행이다. 18세기 유난히 여행 소설이 많이 출간된 이유를 여행하지 못한 이들의 대리만족 때문이었다고 한다. 읽기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여행 자체다.  


















2015년 카트린 지타의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에서 혼자 여행하는 즐거움, 아니 이유를 밝히니다. 많은 공감을 일으키지만 실제로 편한대신 위험이다. 요즘처럼 혼자 여행 부추기는 시대도 없지만 낯선 해외여행의 경우는 위험천만하다. 필자는 혼자 여행을 권하지 않는다. 차라리 혼자 가까운 곳을 여행하는 것을 권한다.  


난 여행하면 항상 책을 챙긴다. 독서는 여행을 방해한다.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한다. 책에 몰입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리 유명한 곳에 가도 볼 것이 없다. 차라리 책이 좋다. 그래서 책은 여행을 위해서, 여행 때문에 읽는다. 그리고 여행 후에도 읽는다. 독서보다 좋은 여행을 보지 못했다.  



독서는 읽기, 앎, 호기심, 성찰, 반성, 상상, 수많은 수식어를 갖는다. 책 속에 길도 있다고 말한다 꿈도 책 속에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책은 나를 읽는 것이고, 나를 보는 것이다. 그것에 실패하면 독서도 의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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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카메라가 좋아지면서 DSLR은 잘 들지 않는다. 꼭 찍어야할 때나 할 곳이 아니면 들고 나가지 않는다. 대신 수시로 꺼내 찍을 수 있는 폰 카메라를 사용한다. 최근들어 폰 카메라의 사양이 놓아지고 색감도 좋아지면서 기술적인 처리를 해야하는 경우가 아니면 DSLR은 더 안들고 다닌다. 


그냥 찍는다. 한 달만 지나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을 담는다. 희소성이 사라진 이 때 셧터 누르는 것을 자제할 이유가 없다. 그날도 고속도도를 주행하다 셧터를 눌렀다. 여기가 어딜까? 가뭄이 이어지는 시기에 빗방울이 보이는 이곳은 어딜까? 한참을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또 한 장의 장소확인불가의 사진이 추가된다. 











일주일을 비운 집을 다시 찾았다. 이래저리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책은 언제나 좋다. 부산에서 구입한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와 <빈방>, 그리고 김석년 목사의 <질문하는 믿음>과 <질문하는 교회>가 도착해 했다. 김석년 목사는 글이 바르다. 단순한 옳음과 바름이 아닌 삶이 정직한 목사다. 목사가 무작위로 욕을 먹는 시대에 그는 곳고 바르게 살아간다. 글에 그의 삶이 읽힌다. 고 박완서 선생님의 <빈방>은 말씀 묵상글이다. 


박완서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울었다. 아니 물었다. 평범한 삶은 정답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대한 고난과 불가항력적 상실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바람은 왜 불까? 태양은 왜 떠오르는 것일까? 밥은 왜 먹어야할까? 모든 것이 의아하고 의심스럽다. 


"저 바다는 정말 저기 있는 것일까. 내 아들은 이 세상에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41쪽)


질문하는 것. 그것은 살고 싶다는 말이다. 무의미하게 방치된 것들에 대해 의미를 찾아 주려는 몸짓이다. 질문은 누군가 또는 어떤 것에 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은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김석년 목사의 질문하는 책들은 진리라는 명분하에 도무지 변강부회같은 설교와 신앙을 되돌아 보라고 충고한다. 질문한다고 변하지 않는다. 질문은 질문자의 삶을 변화 시킨다. <질문하는 믿음>이 믿음의 대상에 예수에 대한 성찰이라면, <질문하는 교회>는 이 시대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오늘이 간다. 또 오늘이 온다. 삶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가 묻는다. 왜 사냐고? 네가 믿는 진리가 참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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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6-2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은 상실의 고통에 괴로워 할때 박완서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었어요..

낭만인생 2017-06-27 19:58   좋아요 0 | URL
공감이 되는 내용이 많네요...
 

한경오. 그러니까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가 수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단순한 기사 하나에도 소위 문빠 알려진 이들의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그런데 오늘 전 .. 편집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어이 없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의 주장은 문빠들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고, 그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분히 사변적인 이야기로 끌고 간다. 그런데 한경오여 생각해 보자. 왜 문빠들이 화를 내는가? 한경오가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기사를 잘못 써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문통이 잘하고 있는데 왜 욕하냐는 것이다. 문통을 공격하려면 그 이유부터 정확하게 밝히고 옳고 그름을 따지라는 것이 소위 문빠들의 포화 이유다. 가당치도 않는 이유로 공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문빠들...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그들이 한경오를 공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노통이 서거할 때 그들이 보인 배신과 조롱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중동과 한패인 것처럼 거침 없이 노통의 죽음을 조롱했지 않는가? 그럼 묻는데? 왜 그렇게 했는가? 물론 노통의 정책은 어떤 면에서 실패한 것이다. 진보 보다는 보수에 더 가까웠으니까? 그런데 왜 그런 정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바로 그 지점에서 한경오는 조금도 노통을 배려하지 않고 공격투로 일관했다. 노사모는 분노했다. 노사의 전통을 이은 문빠들도 그 당시를 기억한다. 그러니 한경오는 문빠들의 공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 그대들을 더 이해할 수 없다. 


노무현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옳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고,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아야 문통의 정책을 이해할 수 있다. 노통은 바보였지만 문통은 바보가 아니다. 문통은 야누스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라. 난 문통을 믿는다. 그리고 노통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그 '이상'을 사랑한다. 


최근에 노통의 책들을 읽으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새록새록 깨닫는다. 그리고 왜 대통령의 자리에서 깊은 한계를 느꼈는지 읽었다. 마음 저리게 공감한다.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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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5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6 0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7-06-04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오마이는 매일같이 똥을 싸대고 있는데 그 대표의 책을 읽는다고요? 본문과 결론이 안 어울리네요.

비로그인 2017-06-0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 시기 좀 보세요. 돈 벌려고 책 낸 거 안 보이나요? 정말이지 한경오는 좆중동보다 더 역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