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Regis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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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가 느꼇던 환희에 찬 기쁨이 실내악곡 숭어에 생동한다면 그의 만년의 우울함은 후기 피아노 소나타에 스르르 녹아 있다. 한국 나이로 32살에 죽은 이 영감 많은 천재에게 삶은 찰나의 행복을 값지게 해 줄 고난의 연속이였나 보다.

 그 고난의 무게가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쌓이고 또 쌓였을 적에 슈베르트의 영감은 슬픔으로 점철된다.

 '얼지마.. 죽지마.. 그럼 부활할거야..' 라는 말 한마디 해줄 따스한 이 있었더라면 조금은 덜 침잠했을 것인데. 

 여린 감성을 지닌 희대의 천재에겐 오히려 무관심이 속편했을지도 모를 일.

자신의 가치관으로 타인을 재단하는 저 많은 옹졸한 이들에게 덜 회자 되었기에 그의 상처가 조금 더 유려하게 오선지 위에 표출된 듯.

하늘이 부여한 재능은 상처를 동반하는 법.

 리히테르의 슈베르트 후기 피아노 소나타 앨범은 그 상처에 연유한 넓디 넓은 생채기를 묵묵히 짚어 나간다.

조금 더 괴팍했더라면 조금 더 살았을지 모를 천재에겐.

따스한 위로의 말보다 묵묵히 그의 음악을 경청하고 또 연주해 줄 지인이 필요했을 지도.

 '울지마.. 아프지마.. 그럼 고독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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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치열하다. 삶을 위해. 삶이란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지만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쌓인 요즘 사람들에겐 전혀 다른 나라의 이야기다. 하나 둘 늘어가는 걱정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상위 집단에 속하기 위한 무차별적 흐름은 속세를 등지고 살았던 죽림칠현에 현세에 재림한다 해도 딱히 피해가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요즘 세상의 흐름은 너무 빠르다. 무엇을 위한 삶인지 모르는 아니 모르게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 하에서 사람들은 외롭고 굶주리고 또 애정을 갈구한다. 성장이나 분배라는 정치적인 단어 대신 여유와 나눔이라는 단어가 주류 이데올로기가 됐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언젠가 나 조차 어느 사막에 떨어져 홀로 물을 찾는 방랑객이 되더라도 눈물 한움큼 흘리지 않고 일사병 걸린 군중들에게 참 도움을 주고 싶은 여행객이 되고 싶다.

 바람이 딱히 누구의 마음도 시원스레 하지 못하고 모랫바람만 날리게 하더라도 그 바람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가졌으면 한다. 낙타의 등 위에서 홀로 유람하는 가진자들에 대한 나같은 자들의 분노를 식혀줄 것은 오아시스의 물 한모금이 아니라 그런 바람에게 가지는 감사의 마음일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불행해지는 삶의 모순의 울타리에서 조금은 벗어나자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행복하다면 누군가는 상대적 빈곤감에 의해 갑자기 불행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모두가 조금은 기꺼이 불행의 몫을 나누어 가지자.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서 다같이 한번 뛰어 올라 보는거다.

 혹시 아나.. 그러다 보면 지구의 내핵과 외핵이 그 발길질에 혼비백산하여 현 세계를 뒤집어 놓을지.. 그러면 다들 제가 뛰어오른 그 한움큼의 땅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선지자들의 지혜를 오롯이 가슴에 새겨 담을지.. 그러면 이 치열하고도 목적없는 물결속에서도 우리는 웃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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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Sergei Rachmaninov - Symphony No.2 etc. / Previn - Great Recordings Of The Century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v) 작곡, Andre Previn / 이엠아이(EMI)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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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은 3악장 아디지오의 매력 하나만으로도 순음악적 아름다움의 본질에 근접한 곡이다. 앙드레 프레빈이 말끔히 지휘한 이 연주는 최근의 이반 피셔와 부다페스트 관현악단의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명반이였다.

 하지만 워낙 곡이 아름답기 때문에 자잘한 음반평은 사족이다. 그냥 조용히 그 음에 빠져들면 그만이다. 특히 3악장 아디지오에서 흐르는 주선율의 아름다움은 여름에도 가을을 가을에도 봄을 그리고 겨울에도 아련함을 선사할 수 있는 감성의 피조물이다. 신경쇠약이 걸렸었던 이 우울한 인생의 작곡가의 생애에도 따스한 추억이 감지되는건 그의 피아노 협주곡보다 덜 유명한 이 교향곡 2번 덕분일 게다. 3악장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장치로 작용한 듯한 1악장과 2악장의 나름 웅장한 선율은 빛나는 주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조연이지만 그 또한 놓지기 힘든 아름다움이다.

 추가로 달려 있는 소품들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멜랑꼴리 정서와 섬세한듯 여린 정서를 잘 드러낸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시베리아의 흰색과 잘 어울리지만 가끔은 그 설경속에 피어있는 하나의 푸른 새싹을 위한 교향시 같은 느낌도 준다. 그만큼 시리고 여리고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희망을 품고 또 갈망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평생을 우울증과 답답함에 살더라도 아름다운 선율을 포착할 감각이 있다면야 일년을 겨울에 살아도 마음속은 항상 봄날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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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INEMENT:세느강의 정경
유키 구라모토 (Yuhki Kuramoto) 연주 / 씨앤엘뮤직 (C&L)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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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키 구라모토의 이 음반은 아름다운 자켓 디자인이 주는 묘한 색채감을 뛰어넘는 내밀한 순수 미학점 쾌감을 선사한다. 이 앨범의 첫곡인 ROMANCING TIME 과 같은 경우는 01년도 수능 언어영역 듣기 평가의 시그널 음악으로 나온 적이 있을 정도로 나름 대중화된 곡이다. 두번째 곡인 세느강의 정경은 선우재덕이 나오던 아침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사용 되었던 곡이다. 세느강을 직접 가보면 고풍적인 향기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생기 발랄함 때문에 밝음의 정서를 느끼는 사람이 대다수다. 하지만 유키구라모토의 이 곡은 슬픔이 주된 정서를 이루고 있는 걸로 보아 같은 풍경 또한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말을 처연히 잘 나타낸다. 런던 필과의 협연으로 인해 협주곡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이 곡은 유키구라모토가 세느강의 정경이 내다 보이는 둔치에서 실연을 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이 처연한 곡이 끝난 후 나오는 루이즈 호수의 정경은 사뭇 세느강의 정경과 대척점에 있는 정서를 전달해 준다. 설레임이 가득한 릴리시즘의 정점을 보여주는 이 곡의 아름다움은 런던 필의 아름다운 현악 반주와 잘 어울려 원곡이 가졌던 미세한 음표 사이의 여백에 충만감을 제공한다.

 그리고 나머지 곡들은 그냥 그렇다. 딱히 귀에 꽂히는 멜로디 라인을 선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뭐.. 아니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다. 고 3때 첨 들었던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은 클래식을 더 자주 듣는 요즘도 귓가에 울릴 때가 있다. 음악의 순기능이 정서 순화라 하였을 때 상위 장르라 볼 수 있는 클래식이 쉬이 가지지 못하는 직접적인 감정의 맞닿음이 잘 구현된 음반이라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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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tsam 2007-09-02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ㅡ첼로 독주도 많이 듣나?

바밤바 2007-09-0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흐 첼로조곡 말고는 잘 안듣는데^^;;
 

 '고즈넉히 살다가 고즈넉히 가면 그만인데 왜그리들 힘들게 사시는지..' 참 있어 보이는 말이다. 내가 한 말은 아니고.. 누가 한 말인데 속세를 초월한 듯한 그의 말투에 비위를 상하게 하는 거만함이 느껴진다. 편하기 위해 힘들게 사는 현대인의 역설을 그 사람은 아실지.. 아신다 한들 먹고 살만한 혼자만의 가업이 따로 있기에 그런 말을 내 뱉으시는지.. 아니면 뭔지. 

 아무도 개미의 노동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부러워 하는 것은 그 노동 뒤에 보장되는 따스한 겨울과 풍성한 식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밥 좀 빌어 먹자고 열렬히 치열한 군상들에게 독야청정 한듯한 식자들의 고담준론은 베짱이의 바이올린 무반주 소나타보다 더 저속할 뿐이다.

 그리고선 모두가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의 일련의 모임들이 하나의 탑을 이루어 그들의 인생을 반추해볼 만큼 충분히 그 높이가 커졌을 때 개인은 생각한다. 과연 그때의 나의 선택은 정말 최선이였나.. 반성과 후회가 이웃하여 나란히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면 삶에 대한 열렬한 애정 보다는 무거워져 가는 어깨의 무게감에 한숨을 내쉬기 마련이다.

 그리고선 돌아갈 수 없는 옛 추억에 몸을 의탁해 하나 씩 현실의 무게를 줄여 나간다. 버리고 또 버리다 보면 시인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에 나오는 원전 형태의 자아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애절한 마음으로 누구도 보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승무를 춘다. 날아라.. 날아라.. 훨훨~ 얇은사 하이얀 고깔이 고이 접어 나빌리는 그런 애틋하고 아름다운 승무가 아니라 아이를 잃고 장이 뒤틀어 졌던 그 단장이란 고사의 주인공인 원숭이의 표정과 마음으로 승무를 춘다.

 하나씩 벗기고 또 버리고 하다 보면 윤동주님의 싯귀에 나온 부끄럽고도 그리운 나의 자화상이 보인다. 그리곤 죽음보다 강렬한 나르시즘에 빠져 야상곡에 귀를 기울이며 해가 좀 더 늦게 뜨길 기원하며 이불을 몰아쥔다.

 가끔 그런 잡생각에 머리가 아파 잠이 깰 때는 이런 통속적인 글귀에 마음의 비계 덩어리를 실어 이글이글 구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덜 굽혀도 내 살이고 바싹 타도 내 살이기에 햇살 맑은 날 다시 보면 비록 역겨워 지더라도 그런 화식(火食)을 빙자한 인육의 카니발도 썩 괜찮은 행위다. 그리곤 맘의 홧톳불에다 대고 이렇게 얘기하면 오늘의 숙면은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고기는 익혀 먹되 야채와 같이 먹는 습관을 들이며 될 수 있는한 많이 씹어 위에 부담이 되지 않게 하고 탄 부위는 먹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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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tsam 2007-09-0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계붙은 삼겹살.
잘 얻어먹고 간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