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쇼팽 : 전주곡, 피아노 소나타 2번
DG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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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시간 뒤면 시험이다. 그래도 나는 쇼팽을 듣는다. 가장 야하고 은밀한 시간이다. 아르헤르치 연주다. 쇼팽 전주곡이다. 별다른 감상이 필요 없다. 가장 사적인 시간을 향유하기 위해 볼륨을 최대한 높인다. 타인의 귓가에 내가 느낀 울림을 주진 못하겠지만 푸른 밤하늘이라도 들으라고 소리를 키운다. 내일 시험은 자못 사람을 초조하게 한다. 방임하며 해탈하며 살려고 했지만 조급한 마음은 주인의 명령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내일은 시험이다. 그래도 나는 쇼팽을 듣는다. 반복이다. 전주곡은 반복이다. 평균율이다. 야한 평균율이다. 수학적인 아름다움을 다 벗어던진 관능의 음악이다. 고전 음악을 듣고 수음을 하냐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영적 쾌감과 동물적 쾌감의 경계가 별게 아니라는 말이 였을까. 쇼팽을 듣고 오르가즘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비릿한 밤꽃향내 보다 더 육감적인 살 떨림의 향연이 펼쳐진다. 내일 시험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이 향연 앞에 잠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성공이라는 이 땅에 태어난 지극히 자명한 이유를 추구해야 함에도 나의 마음은 언제나 부유한다. 그리고선 쇼팽을 듣는다. 이기적이다. 내 육체와 내가 향유하는 재화가 다 남의 손에서 빚어진 것이거늘, 속된 이 마음은 죄책감 하나 없이 영혼을 살찌우는데 급급하다. 바흐에게서 미켈란젤로가 느껴진다면 쇼팽에게선 클림트가 느껴진다. 몽환적이면서 야하다. 옛날, 성 깊숙이 숨겨진 처녀가 있었다. 제우스는 그녀를 탐했다. 그리고선 그녀 몸속으로 들어갔다. 제우스의 정액을 받아들일 때 그녀의 얼굴이 쾌락으로 얼룩졌다. 이 장면을 클림트는 금빛 찬란한 매혹으로 표현한다. 쇼팽의 연주에도 이러한 금빛 찬란한 쾌락이 있다. 가랑이를 벌리고서 오롯이 받아들여도 좋을 진한 관능미가 있다. 들라클루아가 그린 쇼팽의 얼굴이 생각난다. ‘장송’이란 소설에서도 언급한 이 초상화는 너무 딱딱하다. 쇼팽은 천상 여인네의 것이다. 물랑루즈에 기거했던 로트렉처럼 쇼팽의 아름다움은 천박한 지상의 것이다. 시험이 더더욱 얼마 남지 않았다며 요동치는 심장과 달리 신경은 점점 느슨해진다. 음악으로 세상을 매혹시켰던 단명한 천재의 음률이 잠시 눈을 붙이라며 내 눈두덩을 감싸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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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 [할인행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수잔 플리트우드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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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세상은 화마에 휩싸인다. 북한이 쳐들어 온 것이다. 하늘은 저녁놀 마냥 붉디 붉다. 핏빛이라기엔 검붉은 색감이, 아마 포화가 남기고 간 그을음이 혼재되었기 때문이리라. 하늘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화마가 휩쓸고 간 죽음의 색깔이 뭉크의 그림보다 더 심오한 절규를 쏟아낸다. ‘하늘만은 함께 있지 않았냐’ 는 시구도 이젠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하늘이 나를 더욱 짓누르기에.

  내 인생은 당신들 마냥 치열하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전쟁으로 모든 꿈이 수포가 될 이시기에 나의 유유자적한 생애는 일말의 안식을 선사한다. 그렇게 느리게 살라고 역설했던 내 철학이 보상을 받는다. 이 아수라를 벗어나기 위한 정신의 도피가 이런 저열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고는 웃는다. 저열하지만 꽤나 효과 있는 정신적 안정제다. 물론 비겁한 방어기제의 소산이다.

  이런 몽롱한 위안으로 지탱하고 있는 내 눈에 군용차들이 보인다. 징집영장을 가져왔다며 아래층부터 젊은 것들은 몽땅 다 잡아간다. 순간 심장이 터질 듯하다. 국가라는 체제에 대한 불신 가득했던 생애가 다시금 국가의 훈육을 받아야 하다니. 내가 있는 곳으로 군인들이 올라온다. 하늘은 검붉다 못해 시커멓다. 하늘보다 내 가슴이 더 타들어 간다. 군사 문화를 경멸하며 집단의 폭력에 분노하던 연약한 지식인은 모든 게 다 꿈이 였으면 한다. 바닷가에서 생에 대한 의지 하나만으로 펄떡이던 횟감용 물고기 마냥 내 가슴은 비루한 뜀박질을 그치지 않는다.

  그 뜀박질이 어느 정점에 이르렀나 보다. 스르르 눈이 뜨인다. 다행이다. 꿈이다. 하지만 여전히 심장은 헐떡인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였기에 아직도 핏발선 헌병의 고함소리가 후두부를 강타한다. 나도 모르게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랬기 때문일까. 어쩌면 꿈속에서의 나의 간절한 소망에 하늘이 보답하사, 몽환에서 나를 해방시켜 줬으리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이 생각난다. 나도 영화 속 주인공 마냥 간절히 원했기에 모든 것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왔을지 모른다. 세계 3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이전 상태로 회귀할 수 있기를 하늘에 기도한다. 전쟁이 발생하기 전 날의 고요한 아침 햇살을 그리며. 그리고선 누군가의 계시에 이끌려 집안일을 돌보던 여자와 동침한다.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방안이라 믿으며.

  그리고 다시 눈을 뜬다. 그는 이 모든 아수라장이 다시금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것을 목도한다. 이제 신에게 바치기로 했던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차례다. 우선 그는 집을 불태운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자명한 명제가 불길로 시현된다. 그리고선 미친 듯이 뛰어 다닌다. 예수 마냥 자신을 바쳐 세상을 구원한 이 현자를 가족들은 미치광이 취급한다. 물질을 숭상하는 그들에게 재화를 이유 없이 소멸시키는 행위는 범죄일 따름이다.

  이 때, 주인공의 아들은 눈을 뜬다. 아이는 사고로 눈을 잃었지만 아버지의 희생 덕분인지 시력을 찾았다. 그와 함께 죽은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죽은 나무에도 3년 동안 물을 주면 살아난다는 전설이 기적처럼 실현된다. 너무나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영화 초기의 나레이션이 명징한 형태로 현시된다.

  어쩌면 나도 꿈속에서 이 모든 걸 다 돌릴 수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했을지 모른다. 지극히 이기적인 나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너무나 간절한 기도를 하늘에 드렸을지도. 영화를 봤을 땐 특유의 미장센과 롱테이크 촬영 기법이 지루했다. 하지만 그 여백 가득한 생각의 전달 과정이 꿈에 나타날 만큼 깊은 울림을 남겼나 보다. 장자가 이야기한 호접몽의 형태로. 칸 영화제에서 4개 부문을 수상했다는 명작의 깊이가 무의식 속에 아로새겨졌나 보다. 영화계의 시인으로 불리었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이름이 딜레탕트를 꿈꾸던 청춘에게 명장으로 각인된다.

  햇살 가득한 풍경이 이렇게 살가울지 몰랐다. 무엇을 희생하기는 커녕 나태한 삶을 긍정하는 천연덕스러운 방어기제와 작별해야겠다. 아직도 그 검붉은 하늘이 머릿속을 맴돈다.  두려웠고 무서웠기에 어떤 전쟁 속 참화의 고통보다 더 맨살에 와 닿았다. 꿈에서 나는 희생한 것도 없이 이 찬란한 햇살을 맞이할 수 있었다. 간절한 것도 없고 치열한 반성도 없는 한량의 맘에 숭고한 ‘희생’의 아름다움이 깊이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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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6-2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꾹꾹 눌러담은 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봉인된 시간' 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는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kingdavid 2008-07-09 16:53   좋아요 0 | URL
이곳에서도 님을 만나네요.. 님의 발자취..ㅋㅋㅋ

바밤바 2008-06-27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보면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되게 지루하죠. 공간과 공간 사이에 놓여진 수많은 여백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감동과 지루함이란 두가지 다른 결과를 낳게 하지요.^^

비로그인 2008-07-29 11:56   좋아요 0 | URL
네..

그 인물 시선의 처리하며 아주 짧은 시간에나 깨닫게 되는 찰나의 모습을 담아내는 모습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키에슬로프스키 감독과도 몇 몇 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데요.

러시아의 영화전통속에서 피어난, 시간을 참 잘 다룬 영화감독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교육 과학부는 중.고등학교 교육 자율화 방안을 발표 했다. 0교시 부활, 우열반 설립 허가, 야간 자율학습 부활 등이 주요 내용이다. 경쟁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의 노선과 잘 부합하는 방안이다. 선택. 집중을 강조하는 시장 원리와 공교육의 접목이다. 과연 이러한 방안이 인재를 양성하고 공교육을 강화 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러한 목적이 달성 된다면 국가 발전과 국민의 행복 증진이라는 궁극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교육부 정책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향상 시킨다고 한다. 아침부터 벌어지는 0교시 수업과 밤까지 진행되는 야간 자율 학습을 통한 경쟁 촉진 방안이다. 이렇게 강도 높은 학습이 학생의 능력을 향상 시킬지 의문이다. 지식의 양적 성장은 이룰 수 있겠지만 학생들의 창의력은 . 현재 노동 시장은 창의성 있는 인재를 원하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강행되는 학습은 시장의 수요와 역행하고 있다.

  공교육을 강화하여 사교육 시장의 수요를 줄인다는 목표도 성취되기 힘들다. 사교육에 대한 수요는 어떤 체제에서든 급우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상대적인 측면이 강하다. 어떠한 형태로 교육 과정을 바꾸든지 간에 경쟁을 기반으로 한 현 체제에서는 사교육에 대한 수요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인재를 기르고 공교육을 강화하려는 목표는 이번 개편안으로 성취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번 개편안이 국가 발전과 국민의 행복 증진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서는 지금의 학생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해답은 물론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서울대반과 같은 우열반이 생기고 학생들 스스로도 경쟁의 대열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학생들은 더 이상 교육과학부의 소관이 아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는 갓20세가 됐을 때부터 일괄 관리해오던 학생들을 방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실태는 현재 문제되는 고학력 실업과 같은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 높아진 대학 진학률이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 불일치(mismatch)를 낳아 대학생의 구직난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학력을 높이기 위해 투자되었던 노력과 자본이 구직을 통해 적절한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 과다 공급돼 있는 기존의 고학력 실업자를 해결하지 못한 채 꾸준히 신규 대학생을 양산 한다면 정부의 근시안적 정책을 탓할 수밖에 없다. 교육 과학부의 학력 강화 방침이 시장과 역행하는 것이다. 이번 정책이 학생들의 학력 향상을 이뤄 낸다 하더라도 국가 발전과 국민 행복 증진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달성하기에 요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의 교육부 개편안은 학생 개인은 물론 국가 경쟁력 면에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윈이 말한 적자생존의 이론이 적용 되는 상황에선 승자 독식(winner takes it all)이 나타난다. 학생간의 경쟁을 강화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시장의 논리에 학생을 맡겨버리는 현 정책은 다윈이 이론이 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루는 말고삐를 잡고 뛰어가는 나그네가 있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바쁘면 말을 타고 가지 왜 고삐를 잡고 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벌컥 화를 내며 바쁜데 말 탈 시간이 어디 있냐며 그 행인을 나무랐다. 교육부가 지금 하고자 하는 정책은 이 말고삐를 잡고 뛰는 나그네와 같다. 조금 더 멀리보고 더 생각한다면 우리 교육도 모두가 패배자가 되는 상황을 타개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행인의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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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에 대한 찬가를 부르는 유명한 수필이 있다. 대부분 고등학교 문학 책에서 한번쯤은 봤을테다. 청춘의 활기와 열정을 찬양하는 내용. 젊음에 경탄하는 글귀는 청춘에 대한 동경과 시샘을 엿보게 한다.  청춘이란 중년층에겐 닿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이고 청년들에겐 생득적인 시간의 축복이다. 공교육 시스템에 억눌려 있는 10대 들의 마음도 이러한 청춘에 대한 찬가를 들은 후엔, 세상을 향한 열정으로 용솟음 칠 것이다. 열정을 표출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 두기만 한다면 어느 순간 홧병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10대에겐 이러한 홧병마저 사치다. 남은 열정마저 학력 증진에 쏟아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지금의 10대들은 본인이 20대가 되면 억압 되었던 열정을 마음껏 표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테다. 10대들에겐 안된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지금의 20대는 열정을 표출하기는커녕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열정을 봉인하기 바쁘다. 대학에 들어서자마자 시작되는 취업에 대한 압박은 열정이라는 단어를 우선순위 뒤켠으로 영구히 이월 시킨다. 혹여나, 여분의 열정이 있다면 아직 철이 덜 들었다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약육강식'의 경쟁원리가 당연시 되는 요즘, 열정을 사치로 여기는 인식은 정당해 보이기도 하다. 내면의 음성에 귀 기울일 시간 없이 세상이 가리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지금의 20대의 오갈데 없는 상황을 본다면 말이다. 지금의 20대는 결과적으로 ‘열정 상실의 시대’의 주체이며 객체이다. 세상이 가리키는 가치를 충실히 이행 할 수밖에 없는 약자이기에 20대는 객체다. 하지만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열정을 봉인하는 안정지향의 모습을 보이기에 20대는 주체이기도 하다. 

 변변한 일자리 하나 얻기 힘든 20대 앞에서 열정을 운운하는 태도가 건방지다며 나무랄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맹목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흐름에 어느 정도 늘임표(페르마타)를 찍어 줄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늘임표를 찍을 수 있을까.

 

 

 우선, 학업에 인생을 저당 잡힌 10대가 그들의 과업에 대해 사보타주를 한다. 김영하의 소설 ‘퀴즈쇼’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현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책도 많이 읽고 외국어와 컴퓨터에도 능하다. 악기 하나쯤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예술적 소양이 높고 해외여행도 많이 다녀와 견식 또한 넓다. 하지만 어느 세대보다 취업문이 좁고 밥벌이하기 힘들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물질적 풍요라는 축복과 함께 찾아 온 경제 주체간의 심화된 경쟁 때문이다. 이 경쟁은 한정된 파이를 놓고 벌이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학업 성취도가 높아졌다고 해서 명문대 입학 정원을 늘리지 않고 토익 점수의 평균이 높아 졌다고 취업문을 늘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본다면 타인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보타주를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다. 이러한 생각이 20대에게 전파 된다면 프랑스의 ‘68 혁명’과 같은 거대한 물결이 과도한 경쟁의 흐름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연대의식이다. 독서실 옆 칸의 친구를 경쟁자가 아닌 동지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다면 버거워만 보이던 사회의 흐름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봉인된 열정을 표출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다. 고등학교 문학책에서 청춘을 찬양했던 수필가도 찬탄해 마지않을 그 열정 말이다. 

 뜨거운 열정이 훌륭한 일꾼이 되는데에만 투입 되는 것은 자본가의 배만 불릴 뿐이다. 열정이 조금 더 다양하게 사용된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주윗 사람들의 배와 정신 또한 살찌울 것이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콘택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주라는 넓은 공간에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 하는 것은 공간의 낭비다’라고. 취업과 성공을 위해서만 표출되는 열정 또한 우주의 여백만큼 낭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열정을 되찾기 위해 열정을 사용하는 일종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청춘에 관한 수필을 읽고서도 뜨거운 혈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지금 하는 일을 잠시 접고 촛불 시위에라도 나가보자.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기 전에 청춘이 부여한 열정을 즐기자. 세월도 열정이 만들어 낸 추억만은 침범하지 못하기에 청춘의 신인 헤베에게 감사 드리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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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활기찬 발걸음. 당신을 만나기 때문이다. 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때우듯, 그댈 향한 간절함을 지피기 위해 나는 시간을 때웠다. ‘너를 4시에 보기로 했다면, 난 3시 30분부터 행복할거야’라는 어린왕자 이야기 속 여우의 말이 오늘처럼 절실하긴 처음이다. ‘흘러간 시간만큼 그대 얼굴에도 시간의 흔적이 가득 하겠죠.’ 나는 속말로 혹여나 세월에 지쳐버린 그대 얼굴을 못 알아볼까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대를 기다리는 시간은 유쾌한 지루함이다. 어떤 말이 이 터질듯 한 설렘을 정확하게 나타낼까? 국어사전을 다 해매여도 나만의 지극히 이기적인 이 감상을 설명할 단어는 없을 테다. 이럴 땐 모국어가 원망스럽다. 새로운 언어로 이 벅찬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본인은 숫제 언중의 하나란 것을 자각하며 잠시나마 못마땅한 얼굴이 된다. 수많은 감상 속에 어느덧 그댈 보기로 한 장소에 다다른다. 간만에 보는 그대를 스스로 어색하게 여길까봐 친구 몇 명을 데려올까도 생각했지만 ‘애서라’다. 그대에게 만큼은 열렬한 마니아 이고픈 이 간절한 소유욕이 제아무리 절친한 지인도 거리를 두게 한다. 어제 밤, 당신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여덟 시간에 걸쳐 돌이켜 보았다. 조마조마 하면서 웃음 가득한 행복을 선사해준 그대이기에 짧고도 짧은 여덟 시간 이였다. 이제 새로운 추억으로 그대를 보지 못했던 시간의 여백을 채울 때다. 새신을 신은 아이 마냥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 오늘 만큼은 그대를 처음 보았던 그때의 아이다. 네버랜드로 돌아간 피터팬이다. 김동률의 ‘아이처럼’은 내 노래다.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고 약속 장소의 문을 연다. 그리고 말한다.

  “인디애나 존스, 1장이요!”

  혼자 영화 보러 온 사람이 낯설어 보여서 일까?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 보인다. 무슨 잘못한 것 마냥 내 어깨가 움츠러든다.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객으로 이 직원 앞에 서있다. 손님은 왕이다. 고로 이 직원에게 나는 왕인 것이다. 다시금 왕의 위엄을 갖추고 그녀를 쳐다본다. 그러자 그녀는 왠지 미안해하는 얼굴이다. 왕의 위엄에 짓눌린 듯 하다. 이 모든 것은 찰나에 일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수직으로 상승한 듯한 느낌이 내겐 영겁이다. 그 무거운 영겁의 질량이 그녀의 한마디로 공중에 산화한다.

  “죄송합니다, 손님. 인디애나 존스 매진입니다.”

  순간 가슴이 저려온다. 옛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 보단 조금 덜하지만 꾸준한 망치질이 심장에 가해진다. 20 여 년간 기다려온 시간이 20 여 년에 하루를 더하여 기다려야 하다니. 원래 조급한 사람이 아니지만 오늘 만큼은 누구보다 성급하고 재촉하며 그댈 만나려 했거늘. 남은 하루는 또 어떻게 기다리냐며 누구에게라도 타박을 가하고 싶지만 풀 길 없는 답답함은 울분으로 가슴에 여울진다. 20 여 년 하고도 하루라. 20 여 년을 기다린 사람이 하루를 못 기다리겠냐 만은 왠지 20년 보다 더 긴 하루를 보낼 듯하다. 아인슈타인이 이야기 하지 않았나. ‘시간은 상대적이다’ 라고. 내일 그대를 다시 만날 때 까지 내 시간의 주인은 내가 아닐 테다. 잠의 신이라는 모르페우스에게 이 기다리다 지친 육신을 의탁하고픈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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