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활기찬 발걸음. 당신을 만나기 때문이다. 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때우듯, 그댈 향한 간절함을 지피기 위해 나는 시간을 때웠다. ‘너를 4시에 보기로 했다면, 난 3시 30분부터 행복할거야’라는 어린왕자 이야기 속 여우의 말이 오늘처럼 절실하긴 처음이다. ‘흘러간 시간만큼 그대 얼굴에도 시간의 흔적이 가득 하겠죠.’ 나는 속말로 혹여나 세월에 지쳐버린 그대 얼굴을 못 알아볼까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대를 기다리는 시간은 유쾌한 지루함이다. 어떤 말이 이 터질듯 한 설렘을 정확하게 나타낼까? 국어사전을 다 해매여도 나만의 지극히 이기적인 이 감상을 설명할 단어는 없을 테다. 이럴 땐 모국어가 원망스럽다. 새로운 언어로 이 벅찬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본인은 숫제 언중의 하나란 것을 자각하며 잠시나마 못마땅한 얼굴이 된다. 수많은 감상 속에 어느덧 그댈 보기로 한 장소에 다다른다. 간만에 보는 그대를 스스로 어색하게 여길까봐 친구 몇 명을 데려올까도 생각했지만 ‘애서라’다. 그대에게 만큼은 열렬한 마니아 이고픈 이 간절한 소유욕이 제아무리 절친한 지인도 거리를 두게 한다. 어제 밤, 당신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여덟 시간에 걸쳐 돌이켜 보았다. 조마조마 하면서 웃음 가득한 행복을 선사해준 그대이기에 짧고도 짧은 여덟 시간 이였다. 이제 새로운 추억으로 그대를 보지 못했던 시간의 여백을 채울 때다. 새신을 신은 아이 마냥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 오늘 만큼은 그대를 처음 보았던 그때의 아이다. 네버랜드로 돌아간 피터팬이다. 김동률의 ‘아이처럼’은 내 노래다.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고 약속 장소의 문을 연다. 그리고 말한다.

  “인디애나 존스, 1장이요!”

  혼자 영화 보러 온 사람이 낯설어 보여서 일까?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 보인다. 무슨 잘못한 것 마냥 내 어깨가 움츠러든다.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객으로 이 직원 앞에 서있다. 손님은 왕이다. 고로 이 직원에게 나는 왕인 것이다. 다시금 왕의 위엄을 갖추고 그녀를 쳐다본다. 그러자 그녀는 왠지 미안해하는 얼굴이다. 왕의 위엄에 짓눌린 듯 하다. 이 모든 것은 찰나에 일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수직으로 상승한 듯한 느낌이 내겐 영겁이다. 그 무거운 영겁의 질량이 그녀의 한마디로 공중에 산화한다.

  “죄송합니다, 손님. 인디애나 존스 매진입니다.”

  순간 가슴이 저려온다. 옛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 보단 조금 덜하지만 꾸준한 망치질이 심장에 가해진다. 20 여 년간 기다려온 시간이 20 여 년에 하루를 더하여 기다려야 하다니. 원래 조급한 사람이 아니지만 오늘 만큼은 누구보다 성급하고 재촉하며 그댈 만나려 했거늘. 남은 하루는 또 어떻게 기다리냐며 누구에게라도 타박을 가하고 싶지만 풀 길 없는 답답함은 울분으로 가슴에 여울진다. 20 여 년 하고도 하루라. 20 여 년을 기다린 사람이 하루를 못 기다리겠냐 만은 왠지 20년 보다 더 긴 하루를 보낼 듯하다. 아인슈타인이 이야기 하지 않았나. ‘시간은 상대적이다’ 라고. 내일 그대를 다시 만날 때 까지 내 시간의 주인은 내가 아닐 테다. 잠의 신이라는 모르페우스에게 이 기다리다 지친 육신을 의탁하고픈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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