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다시금 김훈의 문장에 빠졌다. 그러다 잠시 김연수의 문장에도 빠졌다. 그러면서 음악을 들었다.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이다. 연주자는 굴드다. 5곡 정도 연주 되더니 시디가 튀어 나머지 곡을 못듣는다. 시디를 바꾼다. 이번엔 페라이어와 아마데우스 사중주단이 연주하는 브람스의 간주곡이다. 이 곡도 1곡을 채 끝내지 못하고 튀는 시디 때문에 연주가 중단된다. 

 시디 플레이어에 문제가 있나 싶어 바람을 불어 넣는다. 먼지도 별로 없건만 왜 시디는 튈까. 시디가 잘못된게 아닌가 하여 리흐테르가 연주하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중 첫 번째 시디를 넣는다. 이 곡을 들으며 상념에 잠긴다. 예전에 바흐의 음악에 관한 멋진 글을 쓰신 분의 필력을 사모한 적이 있었다. 싸이에서 그 글을 본 후 그 분과 친해지기 위해 쪽지를 보내며 나름 애정공세를 펼쳤다. 그러다가 그 분이 내 정성에 감읍하였는지 한번 보자고 했다. 

 그 분은 빕스에서 점심 메뉴를 사주셨다. 내 나이가 한참 어리다 보니 난 얻어 먹기만 했다. 그 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바흐 얘기가 나왔다. 그 분은 굴드의 광팬이었고 평균율과 인벤션을 특히 좋아하셨다. 난 평균율 연주 중 쇼팽같은 바흐를 들려주는 리흐테르를 좋아했다. 그래서 리흐테르 연주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 분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연주라 하셨다. 바흐답지 않다며. 그랬다. 그 분은 왠지 엄격한 느낌을 주었다. 더 리더에 나오는 케이트 윈슬렛과 같은 독일 여자의 엄격함과 쉬이 부서질 것 같은 여린 신경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내 홈피에서 문학소년의 향이 났다며 생각보다 발랄한 나를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다행이라 여기신 듯했다. 상대방에 맞춰 종종 내 색깔을 없애거나 진하게 하길 좋아하는 편이었던 나는 그 날 만큼은 묘한 유채색의 맑음을 선사하려 했다. 흠모할 만한 글을 쓴 사람과 직접 대화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 항상 나르시시즘에 도취돼 있던 내 생애에 특이할 만한 일이었다. 

 하루는 그 분이 미술관을 가자고 하여 그 분 차를 타고 동물원 옆 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평소 미술을 좋아라 했던 나는 그 분과 미술관을 돌아보며 같이 품평회도 하고 조금씩 젠체도 하곤 했다. 미술관 보다 기억에 남는 건 과천 가는 길을 장식한 낙엽이었다. 노란 낙엽과 텅 빈 도로는 영화 감독들이 좋아할 만한 풍경을 보여줬다. 가을에 취하고 낙엽에 취한 기억이 이런 저런 대화보다 기억에 남는다. 

 그 분은 어느 날 자기 홈피에 글을 남기지 말라 하셨다. 이유는 묻지 말라며. 열 살 정도 어린 청년이 한껏 발랄한 척 하며 지분거리는 게 싫었나 보다. 기실 내가 보기엔 그 분은 그런 지분거림이 싫지 않았으나 주위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게 틀림 없어 보인다. 당시 자아도취에 취해있던 내 눈엔 그렇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시디가 다시 튀었다. 이번엔 30분 정도 있다 튀었으니 꽤나 오래 갔다. 그 분은 뭐하고 있을까. 나한테 소개팅도 시켜줬던 분인데. 그러고 보니 소개팅을 한 지도 참 오래 된 듯하다. 2.5년 전이니. 다들 내겐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는 것이 정당해 보인다며 남들 다 하는 상렬지사는 어울리지 않다는 듯 보나 보다. 

 삶이 너무 공허한 것 같다는 느낌의 내 말을 듣고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삶이 근사해 질 거라며 소개팅을 주선해 줬던 분인데.. 당시 소개팅 했던 분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며 좀 더 적극적으로 만나보라던 그 분의 채근이 떠오른다. 어떤 방식으로든 곁에 두면 좋은 인연이 되었을 사람이었는데 주윗 사람을 더 챙긴다고 내가 연락을 하지 않던 사람. 가슴이 아리지는 않고 그냥 좀 더 친하게 지낼 거 라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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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23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제 키신이 연주하는 바흐를 들었어요.
놓쳐버린 인연은 늘 아쉽지요.

바밤바 2009-04-23 23:48   좋아요 0 | URL
키신의 바흐가 궁금하네요. 키신의 어릴적 연주를 들어 본게 다라서 말입죠. ㅎ

비로그인 2009-04-2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흐.. 바흐를 들을 때마다 조촐하나마 그간 모은 시디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알듯 말듯, 언뜻 익숙하지만 늘 새로운.

글을 읽으며 꽤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데요. 밤에 읽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바밤바 2009-04-23 23:49   좋아요 0 | URL
그냥 손이 가는 데로 썼어요. 아침은 밤의 연장이란 생각으로 밤새 품었던 잡념들을 글로 풀었지요. ㅎ
 

 간만에 일찍 일어났더니 눈에 다크써클이 서린다. 눈두덩을 묘하게 감싼 검푸른 자욱이 지난 시간의 고민을 대신 말해준다. 마지막 중간고사를 앞두고선 묘하게 나른해지는 심정은 헤아릴 길 없다. 시험이 끝나면 영화를 보러 가야겠다는 둥 산행을 가야겠다는 둥 지인과 함께 산책을 가야 겠다는 둥의 나른한 계획만 서있다. 마음과는 달리 아마 그러진 못할 것이다. 하루를 꼬박 세울 과제에 아직 손도 못댔기 때문이다. 만성화된 나태야 말로 내겐 가장 치열한 주적인 듯하다. 시험공부 하기 싫어서 쓰는 글이다 보니 알맹이가 없고 무척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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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할까 - 헛똑똑이의 패러독스 세상 모든 호기심 WHY? 2
로버트 J. 스턴버그 지음, 방영호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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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할까? 저자가 여러 사람인 이 책은 이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해 준다. 특히 '섹스 스캔들 이후 클린턴이 보인 행동에 대한 인지 분석' 부분과 '왜 지능이 옾은 사람보다 현명한 사람이 행복할까?' 부분이 마음에 든다. 뇌에 과한 이론이 나올 줄 알았는데 심리학적으로 해석해 줘 어디 가서 젠체 하기 좋을 소스를 많이 던져 주는 책이다. 

 고정된 지능과 유연한 지능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학습기회를 수용함으로써 무지가 드러나거나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온 편이기에 고정된 지능에 대한 설명이 좋았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대단한 발견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유연한 지능의 소유자들의 생각을 따라야 겠다. 

 다만 오탈자가 많고 이야기가 두서 없이 전개되는 부분이 많아 몇몇 파트는 이해하기 힘들다. 저자가 여러 명이다 보니 책 내에서도 글의 좋고 나쁨이 편차가 큰 편이다. 암묵지식, 만족지연능력, 자기 조직화된 임계성 현상에 관한 설명은 좀 더 명쾌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스스로를 똑똑하다 여기는 데 자꾸 반복되는 멍청한 일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이 책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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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의 겉과 속 - 한국 정치는 왜 늘 복마전인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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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준만의 글은 쉽다. 거대 담론을 다루든 개별 현상을 다루든 그의 글엔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조금 어렵다.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끌어온 글이 많고 끌어 온 글 중 번역투의 글이 많아 쉬이 읽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가치가 훼손 되는 것은 아니다.  

 강준만의 통찰력은 빛난다. 워낙 많은 책을 내신 분이라 동어 반복되는 부분도 많지만 슬쩍 넘어가 줄 수 있는 부분이다. 이야기가 많이 부딪히고 주장은 다소 뭉그러져 있지만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보는 듯하여 나쁘지 않다. 한국이란 나라가 뭔가 잘못 되었는데 왜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 이 책을 보면 되겠다. 팩트나 인용구만 나열해도 자신의 주장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그의 지독한 책읽기가 부럽다. 밑바닥 부터 두루 살핀 후 사건의 본질을 풀이해 주는 선생님 같은 자상함도 보인다. 

 다만 명료하지 않다. 너무 조심스럽다. 양시론이나 양비론에 넘어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가슴에 와 닿는 문장하나 보이지 않는다. 보편타당과 공평무사함에 너무 매몰되진 않았나 한다. 조금 더 목소리를 냈으면 한다. 지식인들의 지식인이란 그의 사회적 지위는 그만한 오만을 떨어도 될 만한 이유를 제공한다. 진지한 그의 글쓰기는 아름답진 않지만 참되고 성실하다. 그래서 난 강준만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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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법칙 - 개정완역판 로버트 그린의 권력술 시리즈 2
로버트 그린 외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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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쓴 유혹의 기술을 재밌게 봤다. 이 책도 그 책과 연장선상에 있다. 그의 책은 매혹적이다. 역사적 사례를 곁들여 주장을 강화한다. 견강부회하거나 짜깁기한 면도 보이긴 하나 그리 큰 흠은 아니다. 어차피 자기주장을 내 새우는 글이란 이런 옹이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밑 둥을 볼 일이다. 무엇보다 쉽다. 사례가 지나치게 많아 지루할 때도 있으나 곱씹어 볼 만한 이야기도 많다. 곁가지에 실린 갖가지 사례 또한 뛰어난 편집 덕인지 눈에 잘 읽힌다. 그냥 마음 편히 잠언록 하나 읽는다는 마음으로 훑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알다시피 인생의 바이블이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런저런 지침서가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풍부한 사례만으로도 지적 쾌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덜하다. 혹시나 무언가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면 마음에 기댈만한 큰 잠언하나로 잠시 불안을 잠재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지나치게 재촉하지도 허술하게 말을 던지지도 않기에 좋은 책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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