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겐 나르시시즘이 있다. 이 나르시시즘이 과하면 주위 사람에게 건방지단 소릴 듣는다. 혹 부족하면 자신감 없단 소릴 듣는다. 나르시시즘이 과한 인간은 잘못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나르시시즘이 상처 받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이 부족한 인간은 잘못을 할 경우 자신을 책망하는 경우가 많다. 나르시시즘의 결핍을 자신을 책망하며 얻는 쾌감으로 벌충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태껏 위와 같이 생각해 왔다. 386 세대가 현 20대를 꾸짖으며 나라꼴을 한심이 여기는 것은 과한 나르시시즘이란 방어기제의 결과로 여겼다. 자신은 열심히 살아왔는데 20대가 잘못해서 그렇다는 시각 말이다. 20대가 인생이 팍팍한 이유로 윗세대들이 행한 세대 착취를 손꼽는 것 또한 또 다른 방어기제의 소산이라 여겼다. 반면 자신이 386 세대에 비해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탓하는 20대는 나르시시즘이 부족하다 보았다. 헌데 이것은 단순한 나르시시즘의 문제가 아니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거대한 사회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가 답인 하다.
386들은 자신들이 일궈 논 민주화의 과실을 따먹는 20대의 사회의식이 빈약하단 말을 한다. 주위를 보면 그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한 듯하다. 다들 현실에 분개하고 푸념을 늘어놓을 준 안다. 다만 왜 그런지에 대해서 물어보면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다. 소피스트들이 즐겨했다는 산파법을 본격적으로 쓰기도 전에 그들은 ‘지지’를 선언한다. 삶에 대한 고민은 많으나 사회 구조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고 국가에 대한 불만은 많으나 선거는 귀찮아한다. 왜 그러냐 물으면 치열한 경쟁 때문이란다. 그렇다. 어릴 때부터 내재화된 치열한 경쟁은 이들을 무지한 20대로 만들었다. 아닌 이들도 많지만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탁상공론으로 여기는 이가 대다수다.
그렇다면 민주화의 과실만 따 먹고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지 않는 20대는 파렴치한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선 386이 물러 준 과실이란 게 물질적 풍요라면 이것은 6,70년 대 노동자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87년의 개헌을 통한 대통령제가 실재하는 과실인가? 단순히 그렇다 할 수 없지만 10대들이 선호하는 객관식 문제로 만들자면 이것이 답일 듯하다. 후에 전개된 인권 향상을 위한 움직임이나 군사 독재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노력도 386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자신감을 가질만 하다. 만약 IMF가 오지 않고 종신고용제가 유지 되었다면 386은 지금 20대를 준엄히 꾸짖을 수 있을 테다. 사회를 이루는 하부구조인 경제적 토대가 비슷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386은 그 윗세대가 이뤄놓은 경제 성장의 과실을 정규직이란 형태로 대부분 향유했다. 지금의 20대보다 더 좋은 자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IT붐이 일어났을 때에도 386은 수혜자였다.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이야기 했듯 빌게이츠가 50년 대 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계 최고의 거부가 되기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IT 붐이 일어났을 때 386은 수혜자가 되기에 적당한 세대였다. 현재 NHN이나 다음의 경영진이 386 세대라는 건 IMF 이후의 마지막 성공 기회마저 386의 차지였다는 방증이다.
386은 민주화를 위해 애썼으니 이 정도 수혜는 당연하단 생각을 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민주화 성취가 역사를 뒤집어 놓을 일을 해낸 것만큼 찬양받을 일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GDP가 올라가면 시민 혁명을 통한 민주주의가 도래하는 게 일반적이다. 스페인이 그랬고 중국은 현재 이러한 반동이 일어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역사의 큰 흐름에 비추어 봤을 때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거다.
하지만 과도한 입시열기와 일자리 나누기로 표출된 20대 임금 깎기를 통한 세대 착취는 한국적 현상이다. 김영하가 소설 ‘퀴즈쇼’에서 이야기 했듯, 대부분이 영어에 능숙하고 해외 여행이나 봉사활동의 경험이 있으며 컴퓨터 조작에 능숙하고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아는 세대가 이리도 팍팍하게 사는 일은 비상식적이다. 386을 비롯한 윗세대들의 민주화 너머의 세상을 향한 밑그림이 부족했던 탓일 것이다. 프랑스는 달랐다. 68혁명을 통해 프랑스의 20대는 드골을 몰아내고 민주적 성취를 이뤘다. 당시 10대들 또한 시위에 나서 파리의 대학을 끌랑제꼴이란 형태로 통합되게 한다. 즉 프랑스의 민주화는 후세대를 배려하는 양태를 띄었다. 하지만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에 우리나라의 입시 경쟁은 오히려 더 치열해졌다. 학벌사회는 강화됐다. 386이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20대 앞에 교조적으로 서기엔 뒷세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20대는 민주화의 과실을 투표권 외에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낳은 것 중 IMF 사태는 결정적이었다. 90년 대 후반 학번은 갑작스런 취업 한파에 입사 서류를 들고 동동거렸다. 비정규직이 확대되고 빈약한 복지제도를 대신하던 종신 고용은 무너졌다. 이러한 급속한 전환은 나라가 망한다는 묵시록적 공포 속에 국민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졌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밑에서 죽어나간 자들의 곡소리는 전체주의 국가 속 하층민의 소리마냥 묵살되었다. 386은 무얼 했나? 신자유주의 도입을 통한 경제 체질 개혁을 재벌 타파라 찬성했고 주주자본주의가 실현된다고 반겼다. 기업을 개인 재산으로 여기는 재벌 일가의 권한이 약화 된다고 좋아했다. 허나 장하준 교수가 ‘개혁의 덫’이란 책에서 주장했듯 이런 변화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꼴만 낳게 된다. 또한 이러한 주주자본주의는 현재의 고성장 저고용의 원인이기도 하다.
잠시 왜 주주자본주의가 문제인지 살펴보자.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되면 주식회사들은 주식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하던 고전적 상황에서 탈피해, 이익금으로 자신의 주식을 매입하거나 소각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주주들이 보유한 주식의 가치를 극대화하라고 이사회에서 경영방침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미국에서 그랬고, 1990년대 유럽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IMF 사태 이후 우리나라 회사들도 돈을 벌면 신규 투자를 하기 보다는 자사의 주식을 매입해서 주식 당 평가액을 높이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회에도 불리하고 조식구성원에게도 불리한 반면, 대규모 주식 보유자들에게 더 유리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NHN만 보더라도 작년에 2400억의 흑자를 냈다. 경영주는 전체 주의 5%정도 주식을 갖고 있었다. 48% 정도의 지분은 외국인들의 것이었다. 결국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사주 매입으로 2400억을 썼다. 매출액은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고 결국 고용 창출은 없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을 위한 우호적 환경만 조성되었다. 물론 IMF 당시 외화 도입을 통해 외환위기를 극복할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금융 위기 극복 이후 외국 투자가들이 벌어들인 무수한 이익은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었다. 또한 장기적 성장보단 단기 이익 창출에 집중하는 주주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는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켰다. 현 세대의 취업이 어려운 데는 이러한 경제 구조의 변화에도 원인이 있다.
그렇다면 왜 20대 들은 우석훈이 말하는 것처럼 짱돌을 들고 밖으로 나서지 않을까? 이들은 ‘나누어 통치하라’는 방식을 쓴 정부의 시책에 휘둘려서인지 군집의 힘이 약하다. 10대에는 내신과 수능으로 20대에는 스펙 높이기에 바빠 한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이것은 20대 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냉전’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던 미국의 저널리스트 윌터 리프만은 민주주의의 한계를 인정하고 유권자는 그들 자신의 일에 너무 바빠 투표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을 촉구했다. 리프만이 이 말을 했을 때 보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중의 정치 무관심은 생존의 발로이고 경영학에서 자주 말하는 선택 집중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결국 20대가 386의 도덕적 우월의식에 대해 거부감을 갖듯 386이 20대의 무관심을 타박하는 건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386이 성취해 온 민주주의란 자산을 부정할 수 없듯 20대가 직면한 과잉 경쟁의 사회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경제구조가 많이 달라졌다. 결국 마치 절연된 세대 인 것 마냥 20대를 비난하는 386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제 무감각을 탓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경쟁 과잉의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를 했다는 데서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20대에 대한 꾸짖음 보단 그들을 껴안고 다독여야 한다. 386이 20대 시절에 가장 중요했던 문제가 민주주의라면 지금의 20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존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현 10대나 20대 들의 음악을 감각적이고 깊이가 없다고 비난하는 386들은 제발 취향적 우월주의를 버렸으면 한다. 10대 들 중 김광석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빅뱅이나 소녀시대의 음악은 10대에게는 또 다른 감성으로 다가가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이런 음악 시장을 주도하는 이수만은 386세대이고 박진영이나 양현석은 바로 그 밑 세대 아닌가. MTV와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로 음악의 판도가 바뀌어 점점 율동과 비쥬얼이 음악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요소다. 천박한 음악성을 논하기 전에 시대적 맥락을 좀 더 고려하고 그 음악을 양산해내는 같은 세대를 향한 비판이 선행됐으면 한다. 알아듣지도 못할 현대음악이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서도 말했던 그들만의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세대는 특히 유념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