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이런 말을 했다. ‘문화는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많다. 묘한 것은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감춰진 바를 가장 모른다는 점이다. 외국 문화가 아닌 자신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운찬 총리 후보에 대한 청문회가 한창이다. 그의 깨끗한 이미지는 이미 너덜 해졌다. 그나마 깨끗이 살아 온 정운찬이 그 정도면 나머지 지도층은 얼마나 편법 속에서 살았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지도층의 이러한 도덕성 결여를 탓하는 건 문제의 표피만 건드리는 것뿐이다. 기실 이러한 현상엔 감추어진 누적된 역사가 있다. 이러한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선 척박한 지도층의 도덕의식 문제는 꾸준히 제기 될 테다. 범사회적인 지도층의 무책임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양의 신분제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기 위한 서열의 의미가 강했다. 이에 반해 서양은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규제했다. 사제, 기사, 농노로 삼분하듯 서양의 신분제는 각자 맡은 일이 달랐다. 엄격한 서열은 있어도 신분과 역할이 뒤섞이지는 않았다. 동양의 신분제는 위상만 나뉠 뿐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규정하진 않았다. 동양의 병농일치 개념이 그런 예다. 서양에선 농민은 국가 경제적 토대를 담당했고 병사는 국가 방어나 영토를 늘렸다. 이런 차이 때문에 로마시대에 존재했던 상비군은 동양 사회의 경우 근대 이후에야 생긴다. 물론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인들도 가사에 전념하다 전쟁에 나서곤 했다. 헌데 이들은 군에 복무하지 못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자신의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는 사고가 무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었던 거다. 로마 자체가 도시 국가에서 발전하였기에 시민의 정치 참여는 잦은 편이었다. 즉 지도층의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라는 의식이 강했다. 또 당시 로마 인 중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 자연스레 귀족이 되었다. 귀족의 신분은 강한 자가 억지로 편성한 것이 아니라 공익에 헌신한 대가로 차츰 강화돼온 형태였다.
과거를 살펴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가 강했던 서양을 잘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 스파르타 장군 레오니다스도 300명의 전사와 함께 전사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죽어가는 페르시아 병사들을 아이갈레오스 산꼭대기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에서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서양 역사의 지배자들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이에 반해 한무제의 업적으로 알려진 서역 원정과 흉노 정벌은 명령만 내렸을 뿐이다. 예외적으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참전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은 평안도에서 스물여덟 살 한창 나이에 미국 공군 폭격을 받고 전사했다.
우리 역사도 중화주의를 받들었던 과거를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지도층 무책임의 큰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선 삼국시대 이후 국가 지도자가 군대와 생사를 함께한 사례가 없다. 고려 초기 왕 현종은 거란이 남침하나 전라도 나주까지 도망쳤다. 비슷한 시기에 잉글랜드 왕 리처드와 프랑스와 필리프가 왕의 신분으로 십자군 원정에 참전한 사실과 대비된다. 임진왜란 땐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했다. 비슷한 시기 스웨덴 왕 구스타프는 유럽 대륙의 혼란기에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발트해를 건너 삼십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다. 왕조시대 왕국의 주인은 왕이었고 사직을 보존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기에 그나마 변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승만은 공화국의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나자 재빨리 부산으로 피신했다. 그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국모소리 까지 들었다. 1950년경의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선거로 뽑는 왕이었던 것이다.
15세기 북이탈리아 도시들의 경제적 번영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관련이 깊다. 그들은 대부분 개인적 취향이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예술 후원에 나섰지만 르네상스 걸작들이 대량 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교회의 권위가 약해져 가고 있었기에 우수한 화가들은 교회를 홍보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 이러한 문화 산업에 대한 후원은 자신의 신분에 걸맞은 사회 활동을 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표현이었다. 17~18세기 독일도 마찬가지다. 영방국가로 나뉘어 있던 독일 지역 군주들이 음악의 소비자로 나서 클래식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탈리아 또한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 했기에 오페라가 발전할 수 있었다. 절대군주가 들어섰던 프랑스와 이미 국가 기반이 탄탄했던 영국이 고전 음악의 영향이 약했던 데는 이런 스폰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 현상은 최근까지 이어진다. 유럽 미술품이 미국 예술관에 다수 소장된 데는 파시즘의 손아귀로부터 유럽 예술을 구하려던 미국 예술계의 공로가 컸다. 1940년 프랑스와 독일이 잠시 후전을 맺은 틈을 타 미국에서 응급구조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들은 파리에 머물고 있던 예술가들을 나치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는 작전을 펼쳤다. 위원장인 배리언 프라이와 마르세유 주재 미국 부영사인 하이럼 빙엄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후원을 받아 마티스, 피카소, 샤갈, 칸딘스키 등 많은 화가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위원회는 우선 200여 명의 이주민 예술가와 지식인에게 임시 미국방문 비자를 주어 미국으로 탈출시켰고 그밖에 2천여 명의 난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미국 기업가 록펠러가 뉴욕 시에 수도시설을 기부하고 2010년까지 시민들의 수도료를 면제해준 것, 전도가 유망한 젊은 연주자에게 고가의 명품 바이올린을 무료 대여해주는 스트라디바리 협회의 활동은 박애나 도덕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와 전통에 따른 행위다. 오늘날까지도 동양 사회의 상류층에게서 기부 문화를 찾기 힘든 점이나 높은 사회적 신분을 누리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의식이 부족한 점은 도덕성 결여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회 발전에 기여한 역사 부재 탓이다.
결국 정운찬은 이러한 역사적 무의식을 체득하여 실행에 옮기다 보니 청문회에서 난타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는 꽤나 열심히 살았고 나름 청렴결백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할 테다. 1000만원이란 용돈 또한 과거의 떡값 정도로 생각했을 테다.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 최고 지성의 상징인 서울대총장이었던 사람의 의식이 이 정도다. 유전자에 각인된 역사적 무의식이 무섭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권력과 멀고 털어서 먼지가 나야 권력에 다가갈 수 있는 현실이 참으로 비루하다. 차라리 영화 데어 윌비 블러드에 나오는 다니엘 플레인뷰와 같은 사람이 오히려 쿨해 보인다. 명예보단 돈만 밝히는 그 집요함. 위선은 없고 위악만 남은 그런 캐릭터가 오히려 인간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