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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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엔 생략은 없지만 압축은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압축 성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민주주의의 성장 자체도 압축적이다. 그러다 보니 민주주의국가로서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지 못했다. 후에 부담해야 한다. 이른바 후불제 민주주의다.

 유시민씨가 이전에 쓴 책들은 참 쉬웠다. 경제학이나 세계사에 관한 책이다 보니 달리 편중돼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나친 애정으로 중심을 잃었다. 어쩌면 그가 차곡하게 쌓아두었던 내공이 국회의원과 장관을 거치며 다 소진됐는지 모르겠다. 지나친 나르시시즘도 보이고 자기변명도 늘었다.

 나는 유익한 정보가 담겨있거나, 쉬이 볼 수 없는 통찰력이 번뜩이거나 혹은 문장 자체가 지극히 아름다운 글을 좋다고 여긴다. 고종석 씨의 글이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추었다 할 수 있다. 다만 속세에 발은 담구지 않은 선인이 쓴 글 같은 느낌이 들어 세상을 보는 프레임에 많은 영향을 주진 않는다. 강준만의 글은 그런 면에서 최고다. 그는 한 달에 한권 정도 책을 쓰며 공평무사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사안 파악이 잘 안 될 때 강준만씨의 글을 읽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한층 두터워진 듯하여 좋다. 가끔 강준만을 좌파라 생각하는 지인들이 있던데 이 사람은 중도다. 멋진 중도다.

 유시민의 글을 읽으며 참여 정부가 왜 집권 내내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중시한 건 인간적 아름다움이었다. 인간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건 아랫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최민수식 후까시나 소지섭식 간지는 폼 나고 다들 찬양해 하지만 무리의 지도자가 행할 태도는 아니다.

 글 자체도 소구력이 없었다. 이야기를 재밌게 하기 위한 많은 사례가 나왔지만 익히 접했던 사연 들이라 식상했고 본인의 넋두리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학자와 같은 정치한 글을 유시민에게 기대한 내 잘못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관료제의 비경제성을 논파하고 자신들의 신념이 국민에게 거부감을 산 원인 대한 반성이 주내용이었으면 했는데 아쉽다. 결국 그와 그의 주군은 후불해야 할 민주주의의 값을 더 높여만 놓았다. 중도실용을 표방한 이명박 정권을 들어서게 했기에 그렇다. 유시민이 나르시시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그의 글에서 이전같은 느낌을 받긴 어려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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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이런 말을 했다. ‘문화는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많다. 묘한 것은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감춰진 바를 가장 모른다는 점이다. 외국 문화가 아닌 자신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운찬 총리 후보에 대한 청문회가 한창이다. 그의 깨끗한 이미지는 이미 너덜 해졌다. 그나마 깨끗이 살아 온 정운찬이 그 정도면 나머지 지도층은 얼마나 편법 속에서 살았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지도층의 이러한 도덕성 결여를 탓하는 건 문제의 표피만 건드리는 것뿐이다. 기실 이러한 현상엔 감추어진 누적된 역사가 있다. 이러한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선 척박한 지도층의 도덕의식 문제는 꾸준히 제기 될 테다. 범사회적인 지도층의 무책임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양의 신분제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기 위한 서열의 의미가 강했다. 이에 반해 서양은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규제했다. 사제, 기사, 농노로 삼분하듯 서양의 신분제는 각자 맡은 일이 달랐다. 엄격한 서열은 있어도 신분과 역할이 뒤섞이지는 않았다. 동양의 신분제는 위상만 나뉠 뿐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규정하진 않았다. 동양의 병농일치 개념이 그런 예다. 서양에선 농민은 국가 경제적 토대를 담당했고 병사는 국가 방어나 영토를 늘렸다. 이런 차이 때문에 로마시대에 존재했던 상비군은 동양 사회의 경우 근대 이후에야 생긴다. 물론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인들도 가사에 전념하다 전쟁에 나서곤 했다. 헌데 이들은 군에 복무하지 못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자신의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는 사고가 무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었던 거다. 로마 자체가 도시 국가에서 발전하였기에 시민의 정치 참여는 잦은 편이었다. 즉 지도층의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라는 의식이 강했다. 또 당시 로마 인 중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 자연스레 귀족이 되었다. 귀족의 신분은 강한 자가 억지로 편성한 것이 아니라 공익에 헌신한 대가로 차츰 강화돼온 형태였다.

 과거를 살펴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가 강했던 서양을 잘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 스파르타 장군 레오니다스도 300명의 전사와 함께 전사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죽어가는 페르시아 병사들을 아이갈레오스 산꼭대기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에서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서양 역사의 지배자들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이에 반해 한무제의 업적으로 알려진 서역 원정과 흉노 정벌은 명령만 내렸을 뿐이다. 예외적으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참전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은 평안도에서 스물여덟 살 한창 나이에 미국 공군 폭격을 받고 전사했다.

 우리 역사도 중화주의를 받들었던 과거를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지도층 무책임의 큰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선 삼국시대 이후 국가 지도자가 군대와 생사를 함께한 사례가 없다. 고려 초기 왕 현종은 거란이 남침하나 전라도 나주까지 도망쳤다. 비슷한 시기에 잉글랜드 왕 리처드와 프랑스와 필리프가 왕의 신분으로 십자군 원정에 참전한 사실과 대비된다. 임진왜란 땐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했다. 비슷한 시기 스웨덴 왕 구스타프는 유럽 대륙의 혼란기에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발트해를 건너 삼십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다. 왕조시대 왕국의 주인은 왕이었고 사직을 보존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기에 그나마 변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승만은 공화국의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나자 재빨리 부산으로 피신했다. 그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국모소리 까지 들었다. 1950년경의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선거로 뽑는 왕이었던 것이다.

 15세기 북이탈리아 도시들의 경제적 번영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관련이 깊다. 그들은 대부분 개인적 취향이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예술 후원에 나섰지만 르네상스 걸작들이 대량 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교회의 권위가 약해져 가고 있었기에 우수한 화가들은 교회를 홍보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 이러한 문화 산업에 대한 후원은 자신의 신분에 걸맞은 사회 활동을 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표현이었다. 17~18세기 독일도 마찬가지다. 영방국가로 나뉘어 있던 독일 지역 군주들이 음악의 소비자로 나서 클래식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탈리아 또한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 했기에 오페라가 발전할 수 있었다. 절대군주가 들어섰던 프랑스와 이미 국가 기반이 탄탄했던 영국이 고전 음악의 영향이 약했던 데는 이런 스폰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 현상은 최근까지 이어진다. 유럽 미술품이 미국 예술관에 다수 소장된 데는 파시즘의 손아귀로부터 유럽 예술을 구하려던 미국 예술계의 공로가 컸다. 1940년 프랑스와 독일이 잠시 후전을 맺은 틈을 타 미국에서 응급구조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들은 파리에 머물고 있던 예술가들을 나치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는 작전을 펼쳤다. 위원장인 배리언 프라이와 마르세유 주재 미국 부영사인 하이럼 빙엄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후원을 받아 마티스, 피카소, 샤갈, 칸딘스키 등 많은 화가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위원회는 우선 200여 명의 이주민 예술가와 지식인에게 임시 미국방문 비자를 주어 미국으로 탈출시켰고 그밖에 2천여 명의 난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미국 기업가 록펠러가 뉴욕 시에 수도시설을 기부하고 2010년까지 시민들의 수도료를 면제해준 것, 전도가 유망한 젊은 연주자에게 고가의 명품 바이올린을 무료 대여해주는 스트라디바리 협회의 활동은 박애나 도덕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와 전통에 따른 행위다. 오늘날까지도 동양 사회의 상류층에게서 기부 문화를 찾기 힘든 점이나 높은 사회적 신분을 누리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의식이 부족한 점은 도덕성 결여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회 발전에 기여한 역사 부재 탓이다.

 결국 정운찬은 이러한 역사적 무의식을 체득하여 실행에 옮기다 보니 청문회에서 난타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는 꽤나 열심히 살았고 나름 청렴결백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할 테다. 1000만원이란 용돈 또한 과거의 떡값 정도로 생각했을 테다.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 최고 지성의 상징인 서울대총장이었던 사람의 의식이 이 정도다. 유전자에 각인된 역사적 무의식이 무섭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권력과 멀고 털어서 먼지가 나야 권력에 다가갈 수 있는 현실이 참으로 비루하다. 차라리 영화 데어 윌비 블러드에 나오는 다니엘 플레인뷰와 같은 사람이 오히려 쿨해 보인다. 명예보단 돈만 밝히는 그 집요함. 위선은 없고 위악만 남은 그런 캐릭터가 오히려 인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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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4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때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를 많이 봤다. 책도 많이 봤다. 영화를 찍을 생각은 안했다. 그러다보면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 믿었다. 하지만 유명한 감독들은 무슨 아카데미 출신이 많았다. 나는 서울 소재 모 사립대 경제학과 학생이었다. 감독은 내게 먼 길이었다.

 그래서 알아보니 피디 출신들도 감독을 많이 하더랬다. 피디가 되고 싶었다. 피디가 되려면 센스가 뛰어나야 된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은 내 센스가 뛰어나다고 했다. 특히 고등학교 친구들은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들은 나에 대한 과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하든 잘하거란 식의 믿음 말이다. 난 스스로가 그렇지 않다 여겼다. 난 그냥 몽상가였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무언가 잘 되겠지라 여기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4학년이 되자 피디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경제학 수업은 어려웠다. 공부에 더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모 방송사 원서를 썼다. 서류에 붙었다. 난 내가 붙어서 다 붙는 줄 알았다. 헌데 3:1의 경쟁률이었다고 누가 가르쳐줬다. 스스로가 대견했다. 시험을 봤는데 작문을 쓰라 했다. 폴리니와 아르헤르치의 음악에 대한 변증법적 고찰을 썼다. 쇼팽을 메인 테마로 했다. 차가움과 정열이 아름다운 데칼코마니를 이룬다고 했다. 문제는 기획안이었다. 처음 써 보는 거였다. 보아하니 이 방면 공부한 사람들은 익숙할 듯 했다. 대충 적어 냈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고민을 했다. 결론은 소설가였다. 소설가들은 기자 출신이 많았다. 기자가 되기로 했다. 모 언론사 원서를 냈다. 단번에 최종까지 갔다. 또 스스로가 대견했다. 헌데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특기에 ‘스타크래프트’라고 썼는데 나를 동네 한량으로 본 듯했다. 편집국장이 왜 그게 특기냐고 물어봐서 나도 당황했었다. 허나 그러려니 했다. 후엔 내가 가고 싶은 언론사만 원서를 썼다. 5군데 정도 넣었다. 이상하게 서류는 잘 붙었다. 필기에서 떨어졌다. 이 길이 아닌가 싶었다. 근데 또 다른 주요 언론사 최종까지 갔다. 다시 자신감이 붙었다. 헌데 이번에도 면접 가서 헛소리를 했다. 왜 문화부 가고 싶냐고 하길래 다른데 보다 쉬울 거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여기서 다른 데란 타 언론사의 문화부를 지칭하는 거였다. 질문이 그런 식으로 왔기 때문이다. 역시 떨어졌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주린 배를 쥐고선 놀았다. 나름 인생의 황금기였다. 재밌는 일이 많았다. 오상원의 ‘유예’가 생각나게 하는 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방학이라 여겼다. 이제 취업시즌이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아무데나 원서를 넣는다. 소설가나 영화감독은 이제 생각지 않는다. 그냥 밥벌이 하는 이 땅의 노동자가 되려 한다.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밥벌이가 얼마나 위대한지 이야기 했다. 그러한 일상의 고달픔과 힘겨움을 이겨 내는 일이 평범함이 아니라 비범함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잗다란 일을 구접스럽게 생각한 지난날의 오만이 누군가에게 죄송하다. 누군가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이제 어른이 돼야겠다.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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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9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9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9-2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요새 무심한 날씨는 참 좋네요^^

바밤바 2009-09-21 19:0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오늘은 비까지 오네요~ ㅎㅎ

드팀전 2009-09-2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배고플 것 같고..그 시간을 견딜 열정이나 재능도 없어보여서..ㅋㅋ 제 대학시절 베프는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했지요...
.. 언론사의 고위층이란 사람들이 좀 조직의 중간관리자들이고 보수적이니...너무 튀거나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네요..취업이 힘든 시절인데 조금 더 애쓰셔서 좋은 기자나 PD 노동자가 되세요.

바밤바 2009-09-21 19:10   좋아요 0 | URL
오~ 제가 좋아라하는 팀전님이네요^^ 모두가 최선을 다하라지만 항상 여분의 힘은 남겨두고 사는 게 저한테 맞는거 같아요. 불확실성에 대한 보험이라고 할까.. 팀전님 글 자주 보고 있습니다~ 좋은 글 계속 써주시길~
 

 

 메일이 왔다. 다음 블로거 뉴스 특종에 선정 됐단다. 5000원이 알라딘 적립금으로 쌓인단다. 기뻤다. 알라딘 블로그에 접속했다. 보아하니 별로 읽은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특종이 됐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여태껏 특종에 선정된 기사 목록을 보았다. 중복 수상이 많았다. 대충 메커니즘을 알게 됐다. 아 돈 맛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좀 공들여 쓴 글은 다음 블로거 뉴스로 연동 시켜야겠다. 돈은 사람을 글 쓰게 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쓴 강준만 씨 책 서평이 금주의 서평이 되어 내게 50000원의 적립금을 안겨줬다. 그 때는 서평을 열심히 써서 돈을 더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보통 책을 읽고 나선 저자의 생각을 내 것으로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헌데 서평을 쓰려면 문장 하나하나가 잘 기억에 남는 일주일 내에 써야 된다. 꽤나 괜찮은 서평을 쓰려면 책을 두 번 정도 읽어야 되고 읽고 나서 이틀 내에 써야 된다. 또 폰트 10 기준으로 에이포 용지 2장정도 쓰려면 2시간은 넘게 걸린다. 노동이다. 또 다른 문제는 나는 대부분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본다는 거다. 극소수는 친구한테 빌려서 본다. 즉 책을 사서 안 본다. 대신 시디를 산다. 책은 머리에 남는다. 음악은 머리에 안 남는다. 멜로디가 가슴에 남긴 하지만 마치 좋아하는 여인을 상상하는 것과 실제 보는 것만큼 차이가 있다.

 덕분에 고향집 내방 책장엔 시디가 가득하다. 책장 하나를 너끈히 채운다. 책장의 크기는 대충 그대들이 모셔 둔 그 책장만 할 테다. 거기에 시디 4개가 한 공간을 차지한다. 즉 세로로 한 줄에 4개의 시디가 들어간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뒤편에 놓인 음반들은 잘 안 듣는다. 눈에 잘 안 들어오기 때문이다. 말 그래도 Out of sight, Out of mind다. 어차피 잘 안 듣는 음반을 뒤편에 놓아두긴 했다. 그래도 뒤편 밑에 놓인 음반들이 가엽긴 하다. 처음 포장지를 뜯을 땐 설렘을 주던 음반들이다. 호호.      

 근데 어느 날부터 나는 바밤바님이 되었다. 사실 바밤바는 내 친구 별명이다. 제일 친한 친구다. 만날 붙어 다녔다. 그러다 보니 비번도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게 바밤바님이라 그러면 처음엔 이상했다. 지금은 적응됐다. 그 사이 내 친구 별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거의 1년에 하나씩 별명을 지어주는 데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니 이제 별명 지어주기 힘들게 됐다. 바투 다가앉아 담소라도 나눠야 이런 저런 호칭이 나오는데 몇 달 째 같은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음. 친구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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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가 쓰고 싶었다. 할 말이 있는 건 아니다. 할 말은 없다. 그냥 일기가 쓰고 싶었다. 생각이 많았다. 많은 생각은 말이 되지 않았다. 행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꿈부터 꿨다. 가을이 다 가도록 꿈을 꾼다. 마음이 공허하다. 꿈마저 꿔 지지 않는다. 겨울이 돼야 잠이 드나 보다. 그래서 곰은 겨울에 자나 보다.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봄날의 곰을 좋아한다 그랬다. 배두나도 그랬다.

 다시 양을 센다. 하나. 둘. 셋. 꿈은 미타찰에서 도 닦을 날 기다리는 제망매가처럼 소실됐다. 소멸했다. 가뭇없이 사라졌다. 마음만 성기고 분위기만 버성기다. 가을이 익어 겨울을 맺으면 봄이 툭 하니 떨어진다. 그리고선 여름에 썩는다. 여름은 상실의 계절. 그래서 난 지난 여름에 밤을 노래하며 보조개를 지었나 보다.

 마음껏 쓰니 마음이 놓인다. 로르샤흐 테스트 마냥 윗글을 잘게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은 여흥 수단일 테다. 내가 마음을 의탁하던 지인이 잠시 내 곁을 떠난다. 축하를 하지만 서글프다. 얼굴은 웃지만 마음은 시리다. 1년을 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친구였다. 그 많은 이야기가 방울처럼 알알이 맺혀 그 아이의 바람을 영글게 했다. 어딜 가든 푼푼할 친구다. 더 야물게 여울져 쉬이 부서지지 않는 보석이 되길 바란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친구야. 그대가 세상에 빛이 되는 데 열중하도록. 그대의 회사도 예전의 명성을 찾길 바란다. 난 가을이니 수확을 준비할 테다. 겨울을 위해 쟁여 둘 잗다란 낟알 말고, 삼대를 먹여 살릴 큰 농장을 이루겠다. 땅을 파서 먹고 사는 일이 있더라도 아직 내 바람은 북극성처럼 굳건하다. 그럼 벼를 타작할 때 보세나. 마음만큼 마음을 주지 못해 쌀이라도 나중에 쥐어 줘야겠다. 그러려면 만석꾼은 안 되더라도 천석꾼은 되어야 할 듯. 다만 찰진 쌀이 쉬이 부대에 담길 수 있게 조그마한 기도 하나나 해주시게. 그걸로 충분할 듯 하이. 언제나 처음 그댈 본 그때처럼 여유 있는 미소 짓게나. 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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