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삼성전자에 갔다. 강남역에 있었다. 비슷한 건물이 세 개였다. 헷갈렸다. 덕분에 팔지 않아도 될 발품을 팔았다. 정확히 4분 늦게 프런트에 도착했다. 전화를 했다. 약속 시간이 되어도 연락이 없어 안 오는 줄 알았단다. 그래서 다른 약속을 잡았다 한다. 우울했다. 4분 늦었다고 약속을 다시 잡는 게 삼성맨의 특성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허나 방금 잡은 약속은 다시 취소하면 된다며 나와 인터뷰를 하였다. 다행이었다. 아침부터 식겁했다. 인터뷰는 무난했다. 깐깐할 줄 알았는데 좋은 사람이었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가까스로 연락이 되었는데 몸이 안 좋아서 다음 주에 인터뷰를 하자고 한다. 미리 언질을 주던가.. 짜증은 났지만 말은 공손히 했다. 스스로가 초라해 보였다. 웅..

세 번째 약속은 1시 반에 있었다. 첫 인터뷰가 10시 10분에 끝났으니 세 시간 동안 할 일이 없게 된 거다. 그나마 책 한권과 영자신문을 들고 가서 다행이었다. 세 시간 동안 삼성 로비에 앉아 책만 읽었다. 3층에 있는 로비라 조용했다. 책 읽기 좋았다. 근데 점심시간이 되자 두 명의 여인네와 한 명의 남정네가 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더니 성형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요즘은 태아도 성형을 한다는 말도 하고 자기도 성형을 하고 싶다거나 지인 중 수술 몇 번씩 한 애들 이야기 등등.. 하는 뭐 시시한 이야기였다.

헌데 신경이 쓰였다. 데시벨이 높았기 때문이다. 불현듯 어떤 불쾌함이 스멀스멀 일었다. 나도 직장인이 되면 저런 대화나 하고 있진 않을런지, 아니면 저런 대화가 잔망스럽다며 비웃다가 왕따를 당하진 않을런지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등지고 있었기에 서로 낯을 확인할 일은 없었지만 얼굴이 궁금했다. 허나 돌아보지 못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빛나는 곳에서 일어나는 저급한 언어의 향연을 직시할 자신이 없었나 보다. 그들은 연예인과 성형에 대한 얘기로 30분을 떠들다 갔다. 책에 집중하지 못한 채 삶이 이리도 던적스러운 모양새인가 하는 비애에 젖었다.

지금도 개운치 못하다. 치열함이 찬양받고 아름다움이 숭배 받는 시절엔 말이 가벼워지나 보다. 가벼운 말이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그들의 말이 자본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주제라면 난 선택을 해야 할 듯하다. 나 또한 저열해 지며 배를 불리든지 홀로 고고해하며 세상과 멀어지든지. 몸을 쇼파에 깊숙이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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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0-23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친한 친구들을 만나서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어야 할 때의 초라함이란..

바밤바 2009-10-23 19:42   좋아요 0 | URL
괜찮아요 누나~ 우리 친하게 지내면 되잖아요~ 껄껄

Forgettable. 2009-10-23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분... -_-
여튼 정말 스트레스 대박인 알바에요.
저는 아예 회사에서 가끔씩 대화에 끼지 않아요. 그냥 웃거나 무표정으로 고개만 끄덕끄덕-
잡담도 피곤한 관계란..

바밤바 2009-10-25 11:05   좋아요 0 | URL
음.. 다들 소소한 걱정을 안고 사네요. 나만 그런게 아니었어~~ 껄껄
 
8월의 크리스마스 O.S.T.
한석규 노래, 조성우 작곡 / 이엔이미디어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추억은 애잔하다. 닿을 수 없기에 슬프고 쉬이 잊혀 지기에 서글프다. 그래도 추억이 있어 행복하다. 가끔 삶을 뒤돌아 볼 때 추억만큼 깊은 게 없다. 깊기에 빠져나오기 어렵고 아늑하기에 쉬이 잠들어 버린다.

그런 추억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OST다. 곡은 좋고 옛 생각을 나게 한다. 한석규의 노래는 꾸미지 않아 좋고 그의 나레이션은 애써 우울하지 않아 좋다. 조성우의 음악은 옛것만이 낼 수 있는 울림을 준다. 귀도 마음도 다 가라앉는다.

헌데 가끔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한다. 허진호가 이 영화와 ‘봄날은 간다’를 남기고선 요절했으면 어떨까 하는. 그렇다면 그는 영화계의 유재하가 되어 사랑받고 그리움이 되지 않았을까. 또 농밀한 고백의 언어와 살갑게 표현한 심상한 세상에 대한 묘사로 찬란히 빛나지 않았을까. 두 편의 빼어난 영화 덕에 허진호는 평범해지고 무뎌져 간다. 안타깝다. 영화 속 음악도 가슴을 흔들지 못한다.

크리스마스와 8월의 중간 지점이 지금 이 맘 때다. 영화 속 풍경과 가장 어울리는 계절인 듯하다. 귀신 이야기에 무서워하며 부끄러운 듯 팔짱을 끼는 심은하의 수줍은 미소가 생각난다. 가을의 끝머리와 겨울의 들머리에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헌데 심은하는 이 영화 이후 몇 편의 작품 이후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대중은 심은하를 그리워하고 그녀의 빠른 퇴장을 아쉬워한다. 허진호가 위 두 작품만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면 심은하를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더 간절히 그의 이름은 회자됐을 테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들으며 그의 비범한 소소함을 기대한다. 허진호를 아직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이 영화에 빼곡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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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알바를 하게 됐다. 각 회사의 마케팅 팀장을 인터뷰 하는 일이다. 간단한 일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녹록치 않다. 그들과 약속을 잡기 어렵고 잡은 약속도 변경하기 일쑤다. 또 노회한 사람들이다 보니 잠깐 정신을 놓으면 어느새 그들의 언어에 섭슬린다. 쉽지 않다.

그래도 많은 걸 배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기세 싸움이 중요하다는 거. ‘을’이라고 을의 입장에서 행동하기 보단 ‘갑’인냥 허세를 부리는 게 낫다는 거. 상대에 대해 조사를 하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상대적으로 마음을 편하게 한다는 거. 뭐 서른만 넘으면 당연히 알게 되는 인간사의 평범한 진리를 불민한 성정 탓에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일도 아침 9시 까지 양재동 삼성 건물로 출근해야 된다. 정장을 입고 아침 바람을 몇 번 맞았더니 볼이 시리다. 한 손에 영자 신문을 들고 한 손에 인터뷰 용지를 든 채 길을 나서야 한다. 그나마 선크림을 바르고 다녀 햇살은 반갑다. 돈은 다음 주에 입금 될 듯하다. 덕분에 시디를 몇 개 살 수 있게 되었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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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0-23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지다. 그글도 여기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궁금해궁금해

바밤바 2009-10-23 17:07   좋아요 0 | URL
그거 기업 기밀이라 안되어요~ ㅎㅎ 메롱 메롱~
 
[수입] 종교 음악 모음집 [30 FOR 4] - 1회 수입 한정반
바흐 (Jean-Sebastien Bach) 외 작곡, 르네 야콥스 (Rene Jacobs / Harmonia Mundi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애써 마음을 쓰지 않아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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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깊어간다. 시간은 허랑방탕하다. 어미 말 안 듣고 해질 때까지 놀다 길 잃은 아이 같다. 그래도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아침 햇살은 날 재촉하지 않는다. 뉘엿뉘엿 지는 해는 결의를 다지게 하기 보단 마음을 푼푼하게 한다. 방에 쟁여 둔 클래식 음반들은 세상에 받은 상처를 곱다시 핥아주고 또 눅여준다. 아무 책이나 즐겨 읽는 습관은 세상보단 나를 더 알게 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습관은 마음을 긴장을 달래주고 어깨를 가볍게 한다.

그렇다고 매양 세상을 등지진 않는다. 하루에 신문 4개 정도를 보며 이런 저런 사안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세상일에 놀라기도 하고 또 스스로의 이해력에 감탄하기도 한다. 하루에 최소 1시간은 넘게 보는 듯한 티비는 지인들과 대화를 풍성하게 하고 핍진한 마음을 도닥여 준다. 월간지나 주간지도 몇 개씩 보면서 누군가의 예리함에 감탄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어눌함에 기고만장해 지기도 한다.

이런 시간이 다시 오기 힘들 걸 알기에 오히려 더 열심이다. 세상에 나갈 시간이 다가 올수록 취미는 일이 되고 반드시 성취해야할 필수 과제가 된다. 그럴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위어 간다. 어제도 지인들을 만나 인생을 좀 성기게 살자고 했더니 그들이 내게 되물었다. 성기다는 말이 무어냐며. 나는 그저 좀 빈틈 있고 허랑방탕하게 살잔 말이라 하니 그들은 내 어휘력이 뛰어나다며 신기하게 여겼다. 일상에선 디오니소스적 자아에 충실하다 보니 가끔 밀실의 언어가 나오면 주위를 당황하게 하곤 한다. 그럴 때면 겸연쩍게 웃고 만다. 일상에 까지 벼려진 밀실의 언어를 갖다 된다면 인생이 성기기 보단 빽빽할 듯해서 이다.

이제 가을도 저녁놀처럼 그 황홀함이 붉게 번져간다. 바람은 이런 붉음을 시샘이라도 하듯 애써 푸른색으로 너울댄다. 조금 있으면 추위가 일상이 되고 입김이 말보다 먼저 튀어나올 시절이다. 조금 더 성기고 성기게 살아 다가 올 계절도 너끈히 이겨 냈으면 한다. 오늘은 간만에 하이든의 교향곡을 들을 테다. 그의 곡은 단조롭지만 단단하고 지루하지만 잔재미가 있다. 아마 하이든이야 말로 유명 작곡가 중 가장 성긴 인생을 산 듯하다. 왜 그러냐 묻거들랑 그의 음악을 들어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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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0-2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쓰신 시간이 저랑 비슷하군요~

바밤바님과 처음 만난 것이 제가 카라얀 음반에 대한 느낌을 적었을 때 아니었나요? 얼마전 기억이 나네요 ㅋ 카라얀의 베토벤과 브루크너는 세월이 지나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함께 코다이 쿼텟의 하이든은 가격에 비해 높은 퀄리티로 즐거움을 주는 음반이 아닐까 싶네요~

음반에 대한 느낌을 나눌 수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편안한 밤되세요~^^

바밤바 2009-10-22 23:09   좋아요 0 | URL
저도 써클 님 덕분에 많이 배우고 많이 느낀 답니다.^^
좋은 밤 되세요~~ 감기 조심 하시구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