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깊어간다. 시간은 허랑방탕하다. 어미 말 안 듣고 해질 때까지 놀다 길 잃은 아이 같다. 그래도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아침 햇살은 날 재촉하지 않는다. 뉘엿뉘엿 지는 해는 결의를 다지게 하기 보단 마음을 푼푼하게 한다. 방에 쟁여 둔 클래식 음반들은 세상에 받은 상처를 곱다시 핥아주고 또 눅여준다. 아무 책이나 즐겨 읽는 습관은 세상보단 나를 더 알게 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습관은 마음을 긴장을 달래주고 어깨를 가볍게 한다.

그렇다고 매양 세상을 등지진 않는다. 하루에 신문 4개 정도를 보며 이런 저런 사안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세상일에 놀라기도 하고 또 스스로의 이해력에 감탄하기도 한다. 하루에 최소 1시간은 넘게 보는 듯한 티비는 지인들과 대화를 풍성하게 하고 핍진한 마음을 도닥여 준다. 월간지나 주간지도 몇 개씩 보면서 누군가의 예리함에 감탄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어눌함에 기고만장해 지기도 한다.

이런 시간이 다시 오기 힘들 걸 알기에 오히려 더 열심이다. 세상에 나갈 시간이 다가 올수록 취미는 일이 되고 반드시 성취해야할 필수 과제가 된다. 그럴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위어 간다. 어제도 지인들을 만나 인생을 좀 성기게 살자고 했더니 그들이 내게 되물었다. 성기다는 말이 무어냐며. 나는 그저 좀 빈틈 있고 허랑방탕하게 살잔 말이라 하니 그들은 내 어휘력이 뛰어나다며 신기하게 여겼다. 일상에선 디오니소스적 자아에 충실하다 보니 가끔 밀실의 언어가 나오면 주위를 당황하게 하곤 한다. 그럴 때면 겸연쩍게 웃고 만다. 일상에 까지 벼려진 밀실의 언어를 갖다 된다면 인생이 성기기 보단 빽빽할 듯해서 이다.

이제 가을도 저녁놀처럼 그 황홀함이 붉게 번져간다. 바람은 이런 붉음을 시샘이라도 하듯 애써 푸른색으로 너울댄다. 조금 있으면 추위가 일상이 되고 입김이 말보다 먼저 튀어나올 시절이다. 조금 더 성기고 성기게 살아 다가 올 계절도 너끈히 이겨 냈으면 한다. 오늘은 간만에 하이든의 교향곡을 들을 테다. 그의 곡은 단조롭지만 단단하고 지루하지만 잔재미가 있다. 아마 하이든이야 말로 유명 작곡가 중 가장 성긴 인생을 산 듯하다. 왜 그러냐 묻거들랑 그의 음악을 들어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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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0-2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쓰신 시간이 저랑 비슷하군요~

바밤바님과 처음 만난 것이 제가 카라얀 음반에 대한 느낌을 적었을 때 아니었나요? 얼마전 기억이 나네요 ㅋ 카라얀의 베토벤과 브루크너는 세월이 지나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함께 코다이 쿼텟의 하이든은 가격에 비해 높은 퀄리티로 즐거움을 주는 음반이 아닐까 싶네요~

음반에 대한 느낌을 나눌 수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편안한 밤되세요~^^

바밤바 2009-10-22 23:09   좋아요 0 | URL
저도 써클 님 덕분에 많이 배우고 많이 느낀 답니다.^^
좋은 밤 되세요~~ 감기 조심 하시구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