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가을은 겨울에 손짓하고 비는 땅을 껴안는다. 조만간 땅은 얼 테고 비는 눈으로 나붓거릴 테다. 이런 밤엔 베토벤이 좋다. 너무 진지해져버린 베토벤이지만 가끔은 가벼이 들어 줄 필요도 있다. 피아노 4중주가 그렇다. 모차르트를 연상시킬 만큼 발랄하다. 비교적 초기작이니 그의 인생에 그늘이 지기 전이다. 여기서 그늘이란 귓병을 말한다. 음악 하는 이가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 그만큼 짙은 그늘이 어디 있겠는가.
베토벤의 귓병에 관해선 드라마 하나가 가끔 생각나곤 한다. ‘비단향꽃무’란 드라마 인데 변호사인 류진은 미혼모인 박진희를 사랑한다.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그는 베토벤의 음악이 담긴 음반을 선물한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가 베토벤이라는 이유에서다. 베토벤이 귓병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음악을 만들었기에 때문이라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누군가도 자신의 귓병을 훌륭히 이겨낼 거라 믿는단 말을 덧붙인다. 류진이 말한 귓병은 미혼모를 보는 세간의 곱지 않는 시선이란 것을 굼뜨지 않는 한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누구나 귓병 하나쯤은 갖고 있다. 가난한 집안이나 부족한 외모, 혹은 나쁜 머리도 각자에겐 절실한 귓병이다. 다들 이 귓병에 천착하여 삶을 낭비하거나 불평하곤 한다. 물론 이들도 귓병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한다. 허나 귓병은 이겨내기 보단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에 이들의 투쟁은 종종 좌절로 돌아오곤 한다. 그리고선 세상을 원망하는 데 힘을 쏟는다. 오롯이 마음을 다스리고 정진해도 모자랄 판에 불평에 에너지를 낭비하니 삶은 자신의 지향점과 갈수록 어긋난다. 그럴수록 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한 원망은 깊어지고 자책하는 수준까지 이른다.
이런 심리 뒤에는 이 귓병을 방패막이 삼아 자신의 존엄을 보호하려는 구접스런 비겁함도 작용한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질병이 본인에겐 엄청난 압박이자 삶의 걸림돌이다. 이 걸림돌에 자꾸 넘어지다 보면 관성이 되고 자기비하에 따른 나르시시즘에 빠져 현실도피가 이뤄진다. 아픔도 만성이 되니 쾌락이 되고 자기비하도 정치하게 하다 보니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자신의 아픔을 이해 못하는 타인의 낮은 감수성을 탓하고 제 숨겨진 재능을 이해 못하는 세상이 야속하다. 그러면서 꾸준히 침강하고선 히키코모리가 되거나 인생의 열패자가 된다.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던진 것이다. 아름답기보단 추하고 동정이 생기기보단 한심하다.
베토벤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선 구접스런 삶과 운명에 대한 원망이 드러난다. 자신의 존엄을 높게 평가했던 그이기에 귓병의 존재는 제 삶과 맞바꿔버리고 싶을 만큼 굴욕적이고 암담했다. 그런 침잠의 시간 이후 그는 다시 일어선다. 제 존엄을 진정 사랑한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거룩한 발걸음이었다. ‘영웅’ 교향곡으로 그는 부활한다. 당시 50분에 가까운 그의 교향곡을 길다고 불평하는 이도 많았지만 새로운 음악에 충격을 받은 이도 많았다. 그랬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됐다고 알려진 이 음악은 자신의 위대함에 헌정된 나르시시즘의 절정이다.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이나 니체가 말한 초인이 한 음악가의 삶속에서 오롯이 구현된 것이다.
베토벤이 만든 음표만으론 이런 위대함을 느끼긴 힘들다. 그의 삶을 알고 그의 다른 곡을 알며 음악과 관련된 역사를 알아야지만 그 울림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클래식이란 음악 장르는 진입장벽이 있고 상위문화로 분류되지만 또 그 노력만큼의 값진 보상을 주기도 한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인풋 대비 아웃풋으로 봐도 나쁘진 않다.
어떤 귓병은 잗다라하여 사소한 변명거리조차 되지 못하고 어떤 귓병은 누가 봐도 심각해서 눈물을 자아낼 만큼 비참해 보인다. 그렇다고 귓병에 주저앉아 있다 보면 암세포처럼 자신을 좀먹고 있는 고황(膏肓)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다. 서울역의 노숙자나 은둔형 외톨이도 다 사연이 있을 테지만 제 삶을 귓병하나 때문에 포기한다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귓병이 발목을 붙잡고 어깨를 짓누른다 하여도 제 몸이 부서질 만큼 삶과 부딪혀보고 바스라지는 것이 더 값진 일일 테다. 그렇다면 자신의 영웅 교향곡이 어느새 완성돼 있을지도 모른다. 베토벤의 유산보다 값진 나만의 교향곡 말이다.
덧붙이자면 윗글이 그저 그런 아포리즘의 나열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단순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읊조리는 것과 십여 년의 수련 끝에 이런 경구를 읊조리는 것은 분명 다르다. 나 또한 그의 귓병만큼이나 내 삶을 황폐화시킨 질병으로 인해 꽤 많은 것을 잃었다. 올 해로 그 병이 만 10년을 넘다보니 때마침 깨달은 바가 있어 물 흐르듯 위의 글을 썼다. 신랑을 찾아 나선 쥐순이 가족이 몇 년간의 발품 끝에 옆 집 쥐돌이가 최고 배필이었단 사실을 깨달은 것과 마찬가지다. 몇 년의 발품이 있었기에 쥐돌이는 쥐순이의 ‘애달픈 그리움’이 된 것이다. 참고로 바람구두님의 글에 감화를 받아 이런 생각에 닿은 듯하다. 매번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