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해가 빨리 졌다. 친구는 어둑한 하늘을 보고선 왜 이리 검은 날씨냐며 푸념했다. 나는 네 마음이 검어서 그렇다 말했다. 친구는 껄껄 거리며 ‘네 눈엔 이게 하얗게 보이냐’며 박장대소 했다. 간만에 나도 웃었다. 이런 저녁은 밤보다 더 컴컴하다. 마음이 즐거운 이도 쉬이 인상을 찌푸릴만 하다. 실없는 몇 마디가 눈주름을 지으며 상글상글 웃음을 짓게 해줄 터이다.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날이 어두우니 마음은 밝게 하라는. 답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나름의 설렘이 있다. 말로 풀어내기 힘든 이 미약한 설렘은 마치 근사한 곳에서 무얼 먹을 지 고르던 그 마음과 닿아있다. 이런 사소한 설렘이야말로 사람을 살게 하는 다독임이다. 한껏 따스하다.

 근천스럽게 삶을 영위하려던 구접스런 마음만 미만하던 날이 있었다. 살에 닿는 바람은 푸슬푸슬 부스러지고 생의 의지는 흐너지며 바스라지곤 했다. 마음을 자늑자늑 눅이며 애써 달래도 넘을 수 없는 산은 멀어 보였고 지나온 길은 높아 보였다. 심신이 미약해지고 마음을 다잡기 어렵던 시절이기에 몸과 마음도 자연히 핍진해졌다. 웃음도 사치고 울음은 잔망스러우며 놀이는 범박하고 노래는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

 지금도 환경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다만 마음은 여느 때보다 헌걸차다. 굳이 애써 어려운 책을 읽고 애써 깊은 생각에 빠져서가 아니다. 마음 닿는 데로 발을 내딛고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이 퍽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눌 길 없을 땐 침강하지 말고 그냥 걸어보자. 걷고 또 걷다 보면 닿지 못했던 그 곳에 이미 서 있을지 모른다. 오늘 도 난 그곳에 가려한다. 그 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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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린다. 가을은 겨울에 손짓하고 비는 땅을 껴안는다. 조만간 땅은 얼 테고 비는 눈으로 나붓거릴 테다. 이런 밤엔 베토벤이 좋다. 너무 진지해져버린 베토벤이지만 가끔은 가벼이 들어 줄 필요도 있다. 피아노 4중주가 그렇다. 모차르트를 연상시킬 만큼 발랄하다. 비교적 초기작이니 그의 인생에 그늘이 지기 전이다. 여기서 그늘이란 귓병을 말한다. 음악 하는 이가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 그만큼 짙은 그늘이 어디 있겠는가.

 베토벤의 귓병에 관해선 드라마 하나가 가끔 생각나곤 한다. ‘비단향꽃무’란 드라마 인데 변호사인 류진은 미혼모인 박진희를 사랑한다.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그는 베토벤의 음악이 담긴 음반을 선물한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가 베토벤이라는 이유에서다. 베토벤이 귓병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음악을 만들었기에 때문이라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누군가도 자신의 귓병을 훌륭히 이겨낼 거라 믿는단 말을 덧붙인다. 류진이 말한 귓병은 미혼모를 보는 세간의 곱지 않는 시선이란 것을 굼뜨지 않는 한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누구나 귓병 하나쯤은 갖고 있다. 가난한 집안이나 부족한 외모, 혹은 나쁜 머리도 각자에겐 절실한 귓병이다. 다들 이 귓병에 천착하여 삶을 낭비하거나 불평하곤 한다. 물론 이들도 귓병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한다. 허나 귓병은 이겨내기 보단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에 이들의 투쟁은 종종 좌절로 돌아오곤 한다. 그리고선 세상을 원망하는 데 힘을 쏟는다. 오롯이 마음을 다스리고 정진해도 모자랄 판에 불평에 에너지를 낭비하니 삶은 자신의 지향점과 갈수록 어긋난다. 그럴수록 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한 원망은 깊어지고 자책하는 수준까지 이른다.

 이런 심리 뒤에는 이 귓병을 방패막이 삼아 자신의 존엄을 보호하려는 구접스런 비겁함도 작용한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질병이 본인에겐 엄청난 압박이자 삶의 걸림돌이다. 이 걸림돌에 자꾸 넘어지다 보면 관성이 되고 자기비하에 따른 나르시시즘에 빠져 현실도피가 이뤄진다. 아픔도 만성이 되니 쾌락이 되고 자기비하도 정치하게 하다 보니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자신의 아픔을 이해 못하는 타인의 낮은 감수성을 탓하고 제 숨겨진 재능을 이해 못하는 세상이 야속하다. 그러면서 꾸준히 침강하고선 히키코모리가 되거나 인생의 열패자가 된다.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던진 것이다. 아름답기보단 추하고 동정이 생기기보단 한심하다.

 베토벤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선 구접스런 삶과 운명에 대한 원망이 드러난다. 자신의 존엄을 높게 평가했던 그이기에 귓병의 존재는 제 삶과 맞바꿔버리고 싶을 만큼 굴욕적이고 암담했다. 그런 침잠의 시간 이후 그는 다시 일어선다. 제 존엄을 진정 사랑한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거룩한 발걸음이었다. ‘영웅’ 교향곡으로 그는 부활한다. 당시 50분에 가까운 그의 교향곡을 길다고 불평하는 이도 많았지만 새로운 음악에 충격을 받은 이도 많았다. 그랬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됐다고 알려진 이 음악은 자신의 위대함에 헌정된 나르시시즘의 절정이다.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이나 니체가 말한 초인이 한 음악가의 삶속에서 오롯이 구현된 것이다.

 베토벤이 만든 음표만으론 이런 위대함을 느끼긴 힘들다. 그의 삶을 알고 그의 다른 곡을 알며 음악과 관련된 역사를 알아야지만 그 울림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클래식이란 음악 장르는 진입장벽이 있고 상위문화로 분류되지만 또 그 노력만큼의 값진 보상을 주기도 한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인풋 대비 아웃풋으로 봐도 나쁘진 않다.

 어떤 귓병은 잗다라하여 사소한 변명거리조차 되지 못하고 어떤 귓병은 누가 봐도 심각해서 눈물을 자아낼 만큼 비참해 보인다. 그렇다고 귓병에 주저앉아 있다 보면 암세포처럼 자신을 좀먹고 있는 고황(膏肓)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다. 서울역의 노숙자나 은둔형 외톨이도 다 사연이 있을 테지만 제 삶을 귓병하나 때문에 포기한다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귓병이 발목을 붙잡고 어깨를 짓누른다 하여도 제 몸이 부서질 만큼 삶과 부딪혀보고 바스라지는 것이 더 값진 일일 테다. 그렇다면 자신의 영웅 교향곡이 어느새 완성돼 있을지도 모른다. 베토벤의 유산보다 값진 나만의 교향곡 말이다.

 덧붙이자면 윗글이 그저 그런 아포리즘의 나열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단순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읊조리는 것과 십여 년의 수련 끝에 이런 경구를 읊조리는 것은 분명 다르다. 나 또한 그의 귓병만큼이나 내 삶을 황폐화시킨 질병으로 인해 꽤 많은 것을 잃었다. 올 해로 그 병이 만 10년을 넘다보니 때마침 깨달은 바가 있어 물 흐르듯 위의 글을 썼다. 신랑을 찾아 나선 쥐순이 가족이 몇 년간의 발품 끝에 옆 집 쥐돌이가 최고 배필이었단 사실을 깨달은 것과 마찬가지다. 몇 년의 발품이 있었기에 쥐돌이는 쥐순이의 ‘애달픈 그리움’이 된 것이다. 참고로 바람구두님의 글에 감화를 받아 이런 생각에 닿은 듯하다. 매번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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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면 떠난 사람이 그립다. 애써 잡으려 했던 망상들은 거추장스럽다. 불신시대의 많은 말은 짙은 나약함을 상징할 뿐이다. 어제는 한껏 멋을 내고 길거리를 활보하였지만 알아주는 이가 없더라. 귓불에 가시가 박힌 듯 화끈거렸다. 믿지 못할 정도로 스스로를 추스르곤 다시 걸었다. 하늘이 푸르고 높았다. 흉 족은 겨울양식을 위해 중원을 습격했다는 데 한국의 가장들은 지난한 삶을 위해 제 삶을 침범한다. 삶이 무엇인지 아는 건 사치다. 아니 고역이다. 그저 묵묵히 세상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남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면 된다.

 기실 말이 쉽다. 남보다 열심히 사는 건 매일 아침 7시에 눈을 뜨는 것보다 어렵다. 나와 남은 다 스스로를 총애하기에 타인 위에 서고프다. 같은 욕망이 부딪히니 살이 패이고 피가 튄다. 그럴수록 승리에 대한 욕망은 집착으로 변한다. 다들 이런 집착이 자본주의를 살찌우고 그대를 살찌운다며 부추긴다. 싸움을 해 본 이는 알겠지만 눈이 뒤집히면 차후 사안은 걱정거리도 아니다. 그저 물어뜯고 몇 번 더 때리는 게 우월전략이다. 죽음과 맞닿은 그 치열함은 간헐적인 전투를 통해 일상이 되고 관성이 된다. 누군가는 승리자가 되고 누군가는 패배자가 되어 몇 덩어리 빵을 들고 귀가한다.

 자본이 인간을 옮아 매는 방식도 치밀해졌다. 다들 스스로 손톱을 다듬고 이를 날카로이 세운다. 아니 이빨을 날카로이 한다. 그대들은 모두 짐승이다.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사보타주를 일삼거나 고담준론을 일삼다간 초식동물만도 못한 비루한 신세가 된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동맥이 끊어져도 이 싸움은 멈출 줄 모른다. 제 자식 볼에 상처하나 날 쯤에야 세상을 향해 독한 멘트 몇 번 날리고 나약한 자신을 반성한다. 그야말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임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고 누군지도 모른다. 단지 공포의 채찍질이 두렵고 욕망이 주는 당근을 따먹으려고 나아간다. 뼈를 드러내며 빵을 구걸하는 이는 남은 뼈마저도 팔아야 한다. 죽은 이를 위해 흘릴 눈물은 곱상한 쟤네들이나 하는 짓이고 집 한 칸 없는 이는 실컷 웃어야 한다. 뒤쳐진 자를 바라보며 짓는 웃음이야 말로 삶의 원동력이다. 섹스보다 탐스럽다.

 수백 명을 죽였지만 그대 뒤엔 시체가 없다. 자본은 그대에게 갑옷과 방패와 칼을 제공해 주고선 시체를 앗아갔다. 문제는 시체가 뒤에 있다고 여기는 그대다. 그 전리품이 성 하나쯤은 쥐어줄 것이라 믿는 다는 거다. 망상이다. 뒤돌아보라. 아무 것도 없다. 혹 자본이 자비가 아닌 성긴 면을 보여주어 몇 구의 시체를 남겨줬다면 냉큼 챙겨라. 밤은 짧고 낮은 길다. 이 밤에 무엇을 하지 않고선 저 시체를 다 뜯어 먹어 네 뱃속을 채우지 못한다.

 혹 문화적 욕구가 샘솟는다면 암컷을 찾아 몸을 맡겨라. 문화는 그대의 천박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유해한 상품이다. 부르주아 계급들이 가지고 놀다 지친 찌꺼기조차 네 구접스런 삶을 더 묽고 퍽퍽하게 할 것이다. 암컷은 수컷에게 가랑이를 벌리고 수컷은 암컷에게 제 능력을 발산하라. 쏟아지는 육체의 유희 속에 그대들의 벌어진 상처는 약간 아물고 헝클어진 머리는 봐줄만한 모양새로 정돈 될 테다. 너무 서로의 몸을 탐하진 말지어다. 자본의 칼날이 더 매서워진 근자엔 감각의 제국마냥 서로의 뿌리를 채취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낮을 낮 삼아 밤을 낮 삼아 자강불식 하면 네 몸에도 성수가 뿌려질지 모른다. 그때서야 그대는 보일테다. 지난한 전투를 일삼는 좀비 무리들의 덧없는 일상을. 참고로 이 글은 18 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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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흥얼거려지는 노래가 있다. 지금 생각나는 노래는 숙녀에게, 종로에서, 어떤 그리움 이다. 숙녀에게는 변진섭이 아닌 유리상자의 노래가 익숙하다. 이세준의 미성이 노래의 분위기와 꼭 맞다. 2005년 가을 경에 처음 들었을 땐 익숙한 선율 때문에 원곡이 무엇인지 꽤나 궁금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 한명은 세상의 모든 음악을 다 알 필욘 없다며 괜한 설레발을 나무랐다. 후에 변진섭이 원곡의 주인공이란 걸 알았고 그의 곡도 찾아 들었다. 유리상자와는 다른 담담한 고백의 언어가 마음에 꼭 들었다. 유리상자가 가끔씩 보이는 우울함을 잘 살렸다면 변진섭에게선 수줍은 호기심이 묻어났다. 당시 사귀던 아이에게 이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지만 노래를 불러 줄 새도 없이 이별을 통보 받았었다. 그 애의 맑은 미소만 보고 가끔씩 보인 우울한 눈빛을 읽어내지 못한 내 불민함 탓이었다.

 종로에서는 검찰청에서 공익요원으로 활동할 때 많이 들었다. 총무과 옆엔 자료 보관실이 있었는데 거기 주임과 후배 공익 셋이서 이 곡을 자주 들었다. 그 주임님은 ‘후르츠 바스켓’이란 만화를 좋아했다. 약간 어리바리하면서 속은 푼푼한 타입이었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거나 실없는 소릴 해도 언제나 웃으며 잘 들어주던 분이었다. 항상 웃고 있어서 언제나 그런 줄 알았는데 후배 공익의 말에 따르면 나만 보면 그 분 표정이 밝아졌다고 한다. 나도 주임님을 좋아라 하였다. 어느 날 그분은 직장 동료에게 시집을 갔지만 여전히 나를 잘 챙겨주셨다. 조금만 친해지면 반말을 하는 나였기에 그 분별없음을 귀엽게 보셨나 보다.

 종로에서는 제이에스의 노래로 자주 들었다. 이 곡도 리메이크 곡이라는 데 원곡은 남자가 불러서인지 애절한 느낌이 덜했다. 당시 내가 곁에 있어도 그립다고 말하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 간절함에 닿지 못하는 내 모습에 자주 울음을 보였다. 사랑이란 말도 자주 들었지만 말은 쌓이지 않고 언제나 맴돌았고 홀로 속앓이를 하던 그 아이를 난 그렇게 보냈다. 가끔 종로를 거닐 때 마다 그 아이의 모습과 함께 이 노래가 떠오른다. 내일은 사랑한다 말해줬어야 했는데 말의 덧없음을 경계하던 가난한 마음이 지금은 야속하다.

 어떤 그리움은 이은미의 노래다. 성시경의 음색으로 자주 들었다. 이은미의 곡은 사무치고 성시경의 곡은 아프지만 감미롭다. 내 여친이었던 아이는 이은미의 이 곡을 슬프다고 싫다 하였다. 마치 그 노래 속 임이 내 모습을 보는 듯 하다며 헤어진 후 들으면 마음이 매우 아플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그 아인 언제나 나를 바라보며 편안함을 느꼈고 그러면서도 외로워했다. 지금도 그 혼자만의 외로움으로 어떤 그리움을 미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항상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슬픔도 눈물도 다 남의 것이라 여겼던 지난날이었다. 그런 이기적이고 슬겁지 못했던 마음이 매우 서글퍼 보인다. 내 앞 길을 비추는 또 다른 그리움은 소슬한 가을엔 왜 혼자이면 안 되는지 알게 해준다. 그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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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10-3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바밤바님의 어리광이라 ^^

클래식 이야기를 하실 땐 저야 쇼팽정도밖에 모르는지라 잘 몰랐는데, 정말 음악 이야기를 잘해주시는군요. 밤의 DJ같은거 하시면 딱일듯;;;; 녹음해서 파일 올려주시라능 ㅎㅎ

바밤바 2009-10-31 14:08   좋아요 0 | URL
ㅎㅎ 밤의 디제이 하면 잼있을거 같네용~
클래식 이야기 보단 사람 이야기를 더 좋아라 한답니다~ㅋ

무해한모리군 2009-10-3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에 있어도 그리운 연애 참 길게 하며 이십대를 보냈는데..
나도 누군가 오늘 그립네요.
박지윤의 그대는 나무같아를 들으며 저도 여기 주말 아침을 멜랑꼬리에 젖어요ㅎ

어떤 그림움
http://blog.naver.com/dedelind?Redirect=Log&logNo=20068572292

바밤바 2009-10-31 14:08   좋아요 0 | URL
제목이 좋네요. 그대는 나무같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아프겠네요.ㅎ
김동률의 '사랑하지 않으니까요'도 생각나네요~ㅎ
 

 

 예전에 글쓰기 스터디를 같이 했던 형이 있다. 그는 키가 크고 잘생겼다. 한 때 모델로 활동했었다. 헌데 그의 눈은 외로워 보였다. 소통을 갈망하지만 닿을 수 없는 세상에 지레 마음을 닫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가 궁금했고 자주 질문을 했다. 그의 답은 사변적이었지만 확신에 차 있었고 말과 말 사이엔 철학자와 교수들이 너울댔다. 나는 그와 얘기하는 게 좋았고 조금 다른 그를 좀 더 관찰하고 팠다.

 어느 날 그는 스터디를 홀로 파하고선 소식을 끊었다. 원래 소소한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다보니 자연스레 버성기고 멀어졌다. 그런 그를 오늘 만났다. 그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짧은 불안과 삶에 대한 긴 성찰을 말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확신에 차있었지만 몇몇의 말은 마음에 닿지 않았다. 공허한 말 속에 치열한 삶을 실어내려는 둘의 대화는 그렇게 엉키고 무거웠다.

 많은 말을 하고 속을 비워 냈지만 마음은 둔탁했다. 말을 파헤치며 생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가 버거웠다. 맞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은 서로가 알고 있었다. 좁히려는 시도도 늘이려는 시도도 없었다. 단지 오고가는 묵직한 사유의 언어들은 진솔했기에 낯설고 날것이기에 차가웠다. 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는 음악 이야기를 하였으나 언어로 세속화된 음악은 대화를 더 침강시키고 공기를 짓눌렀다. 말은 잇달아 벽에 부딪혔고 머리는 더 적확한 말을 위해 벼리고 또 벼려졌다.

 훗날을 기약하며 한 시간이 넘는 대화를 끝냈지만 사유는 초라했고 잗다란 생각은 끝없이 이어졌다. 믿지도 내팽개치지도 못할 시간이 가을밤을 채웠다. 말의 밀도는 생각보다 가볍고 긴 말도 하나의 생각조차 오롯이 표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나는 외로웠다. 그는 이성복 시인의 글을 읽으라 했다. 그가 권해준 시인의 글을 읽으면 나아질지 모른다. 글로 풀어내니 말이 더 사변적이고 공허하다. 이 무질서함을 감내하기 위해선 나만의 뮤즈가 필요하다. 그 애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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