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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남자는 자신이 그녀의 첫사랑이길 바라고 여자는 그가 자신의 마지막 남자이길 바란다.’ 야심만만 같은 프로에서 자주 언급되는 진부한 아포리즘이다. 헌데 이 아포리즘은 남자와 여자, 그들 각자의 사랑에 관한 생각을 잘 나타낸다는 데서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남자는 10대 중반에 성욕과 맞물린 열정 덕에 긴긴 밤을 지새우고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성욕의 알싸한 맛을 알아간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사랑에 관한 다른 정의는 그들 자신의 성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남자는 ‘첫사랑을 절대 잊지 못한다’는 시시한 말도 첫 경험 당시 두려움 따윈 없고 쾌감과 설렘만이 남는 남자의 욕망을 나타낸다. 이에 반해 사회적으로 성이 억압된 여성은 첫 경험을 두려워하고 죄의식을 느끼며 임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한나와 미하엘이 처음 몸을 섞었던 10대 중반과 30대 중반이란 나이는 알맞은 접점이다. 가장 쾌감을 만끽할 시기였기에 둘의 사랑은 깊었고 남들과 달랐다. 또한 쉬이 사위어들지 않을 불꽃이었다.
이 영화는 이러한 사랑 놀음에서 파생된 씨줄과 날줄이 적절히 엮여져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세 가지 관점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연인들 간의 사랑, 아우슈비츠, 그리고 인간이 숨기고 싶어 하는 지독한 약점 혹은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둘의 사랑은 적당히 탐스러운 30대 여인의 농밀함과 육체의 쾌락과 감정적 사랑을 구분하기 힘든 10대의 무분별함 속에서 찬란히 빛난다. 세간의 시선은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기에 더 간절해진다. 파격적이지만 중요한 극 중 장치다.
헌데 아우슈비츠가 나오며 이야기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낸다. 한나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 참여한 과거 경력이 발단이다. 무엇보다 한나 슈미츠라는 이름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를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죄의 범박함과 관료제의 비이성적 구조를 갈파했던 한나 아렌트는, 소설의 한나와 묘하게 오버랩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독일인 특유의 꼼꼼함과 확신이 있었던 한나를 이해하게끔 하는 단초가 된다. 다만 이야기의 구조를 한층 더 깊게 만드는 그녀의 상처가 단순한 아우슈비츠 이상의 말을 자아낸다.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의 문맹이 말로 풀어지지 못했던 모든 복선의 시발점이었다. 그녀는 문맹을 인정하는 치욕을 세상이 퍼붓는 비난과 긴 수감 생활보다 더 두려웠기에 죄를 인정하고 또 부풀린다. 이 두 가지 중요 포인트가 법정에서 드러나며 이야기는 그녀를 동정하게끔 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미하엘의 무력함에 대한 질타를 가한다.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비난과 무참히 그를 버렸던 이별의 생채기가 그를 저어하게 만든다. 결국 미하엘 또한 한나 만큼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후엔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게 하는 비겁함이 그의 결혼을 파경으로 이끌고 그의 삶을 비루하게 한다. 그의 끝없는 방황은 누군가와 닮았다. 삶의 또 다른 회전목마다. 상처를 피해 도망만 다니던 그도 결국엔 자신을 치유하기로 결심한다.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하며 말이다.
그가 처음 읽어주는 책은 오디세이다. 오디세이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헌데 단지 유명하고 많이 회자되기에 이 책을 고른 건 아니었다. 그러면 왜 하필 오디세이 일까? 그건 10년의 트로이 전쟁과 10년의 항해 때문에 보냈던 오디세우스의 20년 방황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일 테다. 미하엘도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의 긴 방황을 접고 그의 페넬로페인 한나에게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무의식적 선택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선택이란 그렇게 진지한 고민 끝에 내려지는 일보단 순간의 감정에 좌우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이성에 억눌러져 있던 무의식에 좌우되기 마련이고 엉키고 설킨 무의식이 제 살길을 도모하려 미하엘에게 오디세이를 택하라 한 것이다. 오디세이를 읽으며 그 또한 한나의 문맹만큼 큰 상처로 남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비겁함’에 대한 씻김굿을 벌였고 제 아픔을 눅였을 테다. 그 후 그는 많은 책을 읽어준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간절함과 첫사랑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이 그를 ‘더 리더’로 만들어 준 것이다.
헌데 한나는 가석방을 남겨두고 그 날 밤 자살한다. 교도소 내에서도 수녀와 같은 엄격함과 자애로움을 동시에 보여줬던 그녀는 결국 자신을 첫사랑으로 여기는 그 아이와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물론 쇼생크 탈출에서 보여줬던 가석방 후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늙은이마냥 힘겨운 세상을 버거워 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파 뱀에 물려 죽었던 클레오파트라의 심정과 바투 이어져 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그에게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되었고 무뚝뚝했던 그녀 또한 그를 영원히 가슴에 품은 것이다.
다만 소설이 주는 잔향은 영화보다 짙지는 않다. 아마 영상이란 매체가 주는 매혹이 소설 속 설명보다 더 농염했기 때문일 테다. 무엇보다 소설을 읽기 전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특정 묘사마다 어떤 장면이 떠올라서 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 덕에 나는 한나를 더 이해하였고 케이트 윈슬렛이 보여줬던 그 눈빛의 떨림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곧 있음 눈이 켜켜이 쌓여 세상을 하얗게 만들 시절이 다가올 테다. 나도 누군가에게 책 읽어주는 사람이 되어 그이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 짙은 빛깔의 흔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