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어제 우리나라의 소득격차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른 기사다. 많은 사람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지는 데 이 무슨 사맛디 아니한 소식이라며.

 기실 이 기사는 옳다. 통계청의 조사도 틀린 게 없다. 다만 실체적 진실과 맞닿아 있지 않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소득을 기준으로 한 격차는 확실히 줄고 있다. 기사에서 말하듯 펀드 손실과 같은 금융 소득 감소와 저소득층 지원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헌데 이 통계는 자산의 격차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즉 단순히 월 소득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부동산과 예금과 같은 자산의 분배 문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다. 특히 우리나라 부자들은 외국과 달리 배당이나 채권 투자와 같이 소득으로 집계되는 재산 보단 부동산과 같이 한방에 큰돈을 버는 자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위 통계의 허울 좋은 실상을 말해준다.

 실망 실업자와 취업 준비생은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아 체감보다 낮은 현재 실업률과도 참으로 궁합이 맞는 통계라 할 수 있다. 진실이지만 묘하게 현실을 왜곡하는 이러한 통계는 참으로 난감하다. 미국은 실업률 통계만 하더라도 각각 다른 기준으로 집계한 다섯 가지 버전을 발표한다. 통계의 오류를 바로잡고 국민이 알아서 판단하라며 ‘정보 비대칭’ 문제를 정부가 알아서 해결해 준 것이다. 헌데 한국의 통계청은 ‘수(數)’에 관한 권력을 가지고 현실을 호도한다. 정부 기관은 그들의 지대추구 행위를 위해 존재한다는 심증이 다시금 강하게 든다. 통계청이 자산 격차 실태도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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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6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웃음을 짓게하는 얘기네요.
아주 잘 집어내셨어요.

바밤바 2009-11-16 16:0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누나도 통계 전공이니까 잘 알거라 보아요~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11-16 18:44   좋아요 0 | URL
어허 그런 선입견은 버려주세요.
제가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시나용? ㅎㅎㅎ

바밤바 2009-11-17 17:00   좋아요 0 | URL
ㅎ 누나 공부 잘하게 생겼어요~ 칭찬임~ㅋ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 불멸의 음반 100 최악의 음반 20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루브르를 다 돌아다니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테다. 하루에 여덟 시간 정도를 보낸다는 가정하에서다. 물론 그림 하나를 보는 데 10초면 족하다. 그만큼 루브르에는 작품이 많다. 헌데 교향곡은 어떤가. 한 곡에 짧으면 30분, 길면 100분 정도 걸린다. 모차르트의 작품만 다 들어도 한 달은 오디오 앞에서 보내야 할 테다. 미술과 달리 클래식 음악의 시장 규모가 줄어드는 데는 이러한 시간적 제약이 있다. 이뿐만 아니다. 그림을 한 편 보고나면 차 후 봤던 그림인지 아닌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헌데 클래식은 다르다. 교향곡 한곡을 다 들어도 특정 소절이 들었던 교향곡에서 발췌된 건지 아닌지 헷갈리기 일쑤다. 한곡의 교향곡을 들어본 척이라도 하려면 10번 정도는 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 소모다. 특히 하이든이나 바흐의 곡은 대부분 비슷하다. 이들은 특정한 작곡 기법을 바탕으로 대량의 곡을 양산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다 같은 곡으로 들릴 정도다.

 특히 요즘 같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선 클래식 같은 문화장르는 덜 매력적이다. 이미 20세기 초, 프로이트는 신경병의 원인으로 고도화된 문화적 축적을 지목했다. 즉 인간이 몇  천년 동안 쌓아올린 지적 성과물을 유지하고 발전해 나가는 데 엄청난 지력이 소모되므로 신경쇠약과 같은 병이 부작용으로 발생한다는 거다. 헌데 21세기 초인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은 지적 성과물이 쌓여져 있다. 이러한 시대에 클래식을 감상한다는 것은 유한계급이나 혹은 제 삶을 충분히 꾸려갈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의 취미일 테다. 클래식의 죽음. 이건 시대의 조류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2.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고파 한다. 글을 쓰는 이는 소설을 남기고 환쟁이는 그림을 남긴다. 음악 하는 이는 곡을 남겼다. 헌데 녹음 기술이 발달하면서 곡이 아니라 연주로도 자신의 존재증명이 가능해졌다. 클래식 음반계가 새로운 곡을 만들기보다 연주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새로운 곡을 만들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니다. 충분히 많다. 우선 음악 자체를 홍보하는 일이 쉽지 않다. 클래식이란 안정된 타이틀을 얻으려면 시간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데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미 음악 애호가에겐 들어야 할 클래식 레퍼토리만으로도 벅차다. 앞서 지적했듯 한 음악가의 전곡을 오롯이 듣는 데만 해도 몇 달이 걸린다. 과거의 좋은 곡을 놔두고 요즘 음악을 들을 이유가 없다. 물론 다른 장르의 음악은 열외로 한다. 

 그러니 연주로 제 존재 증명하는 데 힘쓴다. 헌데 음반으로 하는 음악 감상이 일반화 되다 보니 다들 비슷한 수준의 연주를 하게 된다. 연주의 차이는 잗다라 하다. 자신은 매우 파격적이라고 연주하지만 같은 곡을 가지고 연주하다 보니 예민하지 않으면 큰 차이를 못 느낀다. 결국 연주 레퍼토리는 바닥이 나고 새로운 곡으로 청중의 귀를 붙잡기도 어렵다. 클래식의 죽음. 기술 진보에 따른 필연이다.

 #이 책은 클래식 음악사의 뒷부분을 이야기하며 연대기 순으로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헌데 책을 보며 이보다 더 도저한 필연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여 생각을 읊조려 보았다. 클래식을 좋아한다 하여도 이 음악이 내재한 지위재적 성격은 여전히 불편하다. 문제는 이러한 지위재적 성격에 클래식을 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거다. 문화적 구별 짓기를 위한 도구로써 클래식만큼 시간이 많이 드는 게 또 없다. 과시적 취미로 삼을만하다. 참으로 복잡한 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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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6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당신이 클래식을 듣는 이유는?
백분을 들일 만큼 무언가 있는거겠지요?

바밤바 2009-11-16 16:10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정신은 그리 강한 것 같지 않으니 시간이 답이겠네요^^
부가 답변은 밑에 써클님이 해주신 듯~ ㅎ

비로그인 2009-11-2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 읽으셨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클래식을 듣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만큼 시계가 천천히 가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연주와 음반에 대한 것, 클래식 음악과 그것을 둘러싼 것들이 문화자본으로서 어떤 영향을 하는지, 레브레히트가 중점을 두고 기술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수긍할 만한 것인지..등 생각할 거리는 많아 보입니다.

언젠가 저도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가 있을 듯 하네요..^^
즐거운 월요일 되세요~ (위에 휘님도요 ㅋ)

바밤바 2009-11-16 16:11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해 볼 거리가 많았던 거 같아요~
시계가 느리게 가게 한다는 말이 적절한 듯~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일수록 음악과 친해지면 마음이 다습해 질 듯^^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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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자는 자신이 그녀의 첫사랑이길 바라고 여자는 그가 자신의 마지막 남자이길 바란다.’ 야심만만 같은 프로에서 자주 언급되는 진부한 아포리즘이다. 헌데 이 아포리즘은 남자와 여자, 그들 각자의 사랑에 관한 생각을 잘 나타낸다는 데서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남자는 10대 중반에 성욕과 맞물린 열정 덕에 긴긴 밤을 지새우고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성욕의 알싸한 맛을 알아간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사랑에 관한 다른 정의는 그들 자신의 성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남자는 ‘첫사랑을 절대 잊지 못한다’는 시시한 말도 첫 경험 당시 두려움 따윈 없고 쾌감과 설렘만이 남는 남자의 욕망을 나타낸다. 이에 반해 사회적으로 성이 억압된 여성은 첫 경험을 두려워하고 죄의식을 느끼며 임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한나와 미하엘이 처음 몸을 섞었던 10대 중반과 30대 중반이란 나이는 알맞은 접점이다. 가장 쾌감을 만끽할 시기였기에 둘의 사랑은 깊었고 남들과 달랐다. 또한 쉬이 사위어들지 않을 불꽃이었다. 

 이 영화는 이러한 사랑 놀음에서 파생된 씨줄과 날줄이 적절히 엮여져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세 가지 관점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연인들 간의 사랑, 아우슈비츠, 그리고 인간이 숨기고 싶어 하는 지독한 약점 혹은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둘의 사랑은 적당히 탐스러운 30대 여인의 농밀함과 육체의 쾌락과 감정적 사랑을 구분하기 힘든 10대의 무분별함 속에서 찬란히 빛난다. 세간의 시선은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기에 더 간절해진다. 파격적이지만 중요한 극 중 장치다.

 헌데 아우슈비츠가 나오며 이야기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낸다. 한나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 참여한 과거 경력이 발단이다. 무엇보다 한나 슈미츠라는 이름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를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죄의 범박함과 관료제의 비이성적 구조를 갈파했던 한나 아렌트는, 소설의 한나와 묘하게 오버랩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독일인 특유의 꼼꼼함과 확신이 있었던 한나를 이해하게끔 하는 단초가 된다. 다만 이야기의 구조를 한층 더 깊게 만드는 그녀의 상처가 단순한 아우슈비츠 이상의 말을 자아낸다.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의 문맹이 말로 풀어지지 못했던 모든 복선의 시발점이었다. 그녀는 문맹을 인정하는 치욕을 세상이 퍼붓는 비난과 긴 수감 생활보다 더 두려웠기에 죄를 인정하고 또 부풀린다. 이 두 가지 중요 포인트가 법정에서 드러나며 이야기는 그녀를 동정하게끔 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미하엘의 무력함에 대한 질타를 가한다.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비난과 무참히 그를 버렸던 이별의 생채기가 그를 저어하게 만든다. 결국 미하엘 또한 한나 만큼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후엔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게 하는 비겁함이 그의 결혼을 파경으로 이끌고 그의 삶을 비루하게 한다. 그의 끝없는 방황은 누군가와 닮았다. 삶의 또 다른 회전목마다. 상처를 피해 도망만 다니던 그도 결국엔 자신을 치유하기로 결심한다.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하며 말이다.

 그가 처음 읽어주는 책은 오디세이다. 오디세이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헌데 단지 유명하고 많이 회자되기에 이 책을 고른 건 아니었다. 그러면 왜 하필 오디세이 일까? 그건 10년의 트로이 전쟁과 10년의 항해 때문에 보냈던 오디세우스의 20년 방황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일 테다. 미하엘도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의 긴 방황을 접고 그의 페넬로페인 한나에게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무의식적 선택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선택이란 그렇게 진지한 고민 끝에 내려지는 일보단 순간의 감정에 좌우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이성에 억눌러져 있던 무의식에 좌우되기 마련이고 엉키고 설킨 무의식이 제 살길을 도모하려 미하엘에게 오디세이를 택하라 한 것이다. 오디세이를 읽으며 그 또한 한나의 문맹만큼 큰 상처로 남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비겁함’에 대한 씻김굿을 벌였고 제 아픔을 눅였을 테다. 그 후 그는 많은 책을 읽어준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간절함과 첫사랑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이 그를 ‘더 리더’로 만들어 준 것이다.

 헌데 한나는 가석방을 남겨두고 그 날 밤 자살한다. 교도소 내에서도 수녀와 같은 엄격함과 자애로움을 동시에 보여줬던 그녀는 결국 자신을 첫사랑으로 여기는 그 아이와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물론 쇼생크 탈출에서 보여줬던 가석방 후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늙은이마냥 힘겨운 세상을 버거워 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파 뱀에 물려 죽었던 클레오파트라의 심정과 바투 이어져 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그에게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되었고 무뚝뚝했던 그녀 또한 그를 영원히 가슴에 품은 것이다.

 다만 소설이 주는 잔향은 영화보다 짙지는 않다. 아마 영상이란 매체가 주는 매혹이 소설 속 설명보다 더 농염했기 때문일 테다. 무엇보다 소설을 읽기 전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특정 묘사마다 어떤 장면이 떠올라서 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 덕에 나는 한나를 더 이해하였고 케이트 윈슬렛이 보여줬던 그 눈빛의 떨림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곧 있음 눈이 켜켜이 쌓여 세상을 하얗게 만들 시절이 다가올 테다. 나도 누군가에게 책 읽어주는 사람이 되어 그이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 짙은 빛깔의 흔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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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트 - 전10권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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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은 우파다. 국내 작가 중 가장 많은 욕을 먹는다. 80년 대 학번 선배들은 그의 책을 안고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심장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헌데 요즘 그에 대한 세상의 대우는 박하다. ‘홍위병’관련 발언이나 촛불 시위에 대한 부정적 언급은 이문열에게 보수 꼴통이란 이미지까지 주었다. 그런 그늘진 구석과 달리 그의 문장은 현란하다. 말은 적당히 리듬감 있고 생각은 웅숭깊다. 사상은 적당히 치우쳐있지만 문장은 명쾌하고 고문(古文)과 범박하지 않은 어휘가 적당히 섞여 맛깔 나는 글을 선사한다. 이 책 삼국지에서도 그렇다. 오히려 대중과 가장 알맞은 접점을 찾았다는 면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삼국지는 무협지처럼 조금은 현란하고 과시적이며 극 중 인과관계는 약간 허술하다. 그렇기에 재미있고 사람들이 좋아한다. 황석영이나 김홍신, 심지어 장정일도 평역을 남겼다. 황석영이나 김홍신은 원전에 충실하다 보니 읽는 맛이 덜하고 장정일은 새로운 시도를 하였으나 삽입된 그림이 더 기억에 남는다. 원작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며 글을 이끌어간 이문열의 삼국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다.  

또한 삼국지는 매우 보수적인 정치관을 갖고 있으며 영웅사관에 기초한 문학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한(漢)나라라는 부패한 국가를 조조 같은 군벌이 뒤집으려는 시도를 사람들은 불편하게 본다. 또한 이런 군웅들 때문에 피폐해져 가는 백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듯한 시각은 지극히 편협해 보인다. 인맥과 혈연에 의한 정치는 동양적 구습의 절정으로 보이고 지나치게 충성을 강요하는 측면은 전체주의의 맹아로도 읽힌다. 진보적 사관을 가진 이에겐 여러모로 불편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불편해 하는 좌파 지식인들은 삼국지에선 정도를 뛰어넘는 불편함을 느낀다.

헌데 삼국지가 이야기하는 세상과 현재의 세상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의리가 중요하고 명분이 중요시되며 권력 투쟁은 더 치열해졌다. 달관하지 않는 이상 삼국지가 이야기하는 서사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촘촘한 이야기 구조는 빽빽한 세상에서 살아나갈 박진감을 주고 두서없는 말의 향연은 궤변일지라도 논쟁의 쾌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삼국지를 알지 못하면 현재의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교양서로도 읽을만하다. 특히 한자를 많이 쓰고 시구(詩句)를 많이 삽입하여 고문학을 읽는 듯한 쾌감을 주는 이문열의 삼국지는 적절한 선택이다.

다만 삼국지에 몰입한 나머지 제 자신을 제갈량이나 유비와 같은 인물로 보고선 세상을 폄훼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고에이에서 만든 삼국지 게임을 하고선 허랑방탕한 세상을 비웃으며 온라인에서 마스터베이션 하는 행위는 지극히 삼가야 한다. 김영하가 이에 관한 단편 소설을 쓴 적이 있는 데 중딩 때 내 모습이 떠올라 약간 씁쓸하였다. 컴퓨터 게임이 짜놓은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열패감을 잊으려는 노력은 비루한 삶을 더 침강하게 할 뿐이다. 헌데 와우(WoW)같은 오락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현실은 삶이 더욱 비루해지고 그 비루함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군상들의 치밀함이 한층 강화된 진실을 말해 준다.

삼국지의 세계는 현실과 닿지 못하는 이상의 세계고 그곳의 몇몇 군상들은 다소 평면적이다. 제갈량이나 곽가의 깊은 헤아림은 감탄을 주지만 현실 속 상대는 삼국지 속 우둔한 그들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삼국지를 읽고 과대망상에 걸리면 안 되는 이유다. 폰 노이만이 이야기한 게임 이론을 바탕으로 봐도 선택은 항상 실시간적이고 상대의 우월전략과 열등전략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봐, 제갈량의 신묘한 계략은 쉬이 이루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만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했을 때 보인 재기발랄함이나 평판을 중요시했던 유비의 영악한 올곧음은 배울만하다. 삼국지란 소설이 꾸준히 읽히는 이유다.

1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이문열의 삼국지는 많은 장점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장점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다만 삼국지에 천착하여 세상을 다 안다 여기는 어쭙잖은 인간들을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너무 어릴 때 삼국지를 읽은 자들이 보이는 폐해 중 가장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적당히 즐기면서 읽다보면 삼국지의 마니아가 돼 있을 테다. 지나치지 않은 공평무사한 마니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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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이어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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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글래드웰은 어느새 유명해졌다. 그의 저서는 신문 칼럼에서 종종 인용되고 발췌된다. 사람들이 놓치고 지나가는 부분을 꼭 집어 분석한다. 번역도 깔끔하다. 좋다.

로쟈님의 서재에 자주 놀러 가는 데 그분은 서재를 가꾸는 데에만 분명 10000시간 이상을 투자할 테다. 지식 중개상을 하고 계시지만 가끔씩 보이는 깊은 성찰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다. 멋지시다. 나도 어느 부문의 전문가가 되려면 10000시간을 써야할 듯하다. 보통 책을 한 권 읽는 데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면 2000권의 책을 읽어야 책 좀 읽었단 소리를 할 수 있을 테다. 헌데 책을 읽기만 하고 외따로 정리하지 않으면 중요 내용이 쉬이 떠오르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평이란 형태로 읽은 흔적을 남긴다. 헌데 서평을 쓰는 건 그리 녹록지 않다. 1시간이 넘게 걸리는 때도 있다. 실제로 컴퓨터 앞에 앉아 보내는 시간이 1시간이 넘으므로 그 지식을 내면화 하고 말로 풀어내기 위한 담금질의 시간까지 합하면 2시간 정도 소요된다 하겠다. 결국 1400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면 그나마 책 좀 읽었다 할 수 있겠다.

책 내용으로 돌아가자. 글래드웰은 재미있는 예시를 많이 들었다. 내가 매우 좋아라하는 비틀즈부터 한국 조종사 이야기 까지 다양하다. 나는 그의 책에서 배운 관찰력을 일상에서 종종 써먹기도 했는데 출처를 밝혔기에 그의 저작권을 침해한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80년 대 이후 설립된 기업 중 100대 기업이 없다며 요즘 아이들이 패기가 없다고 단정하는 윗세대들의 말은 무책임하다. 지금 정도의 능력과 안목을 가진 20대가 60년대에 태어났다면 최소한 미래에 대한 불안보단 열정으로 달아올랐을 테다. 팍팍해진 경쟁 구도와 치열한 삶의 양태는 열정보단 불안을 가까이 하게 한다. 빌게이츠나 이병철 회장이 현 시대에 태어났다면 대기업 정규직 내지는 중소기업 하나 근근이 운영하는 정도일 테다. 아웃라이어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 세대의 불안을 정당화 하고 윗세대를 나무랐다. 이런 정당화는 기실 삶의 질 개선에 도움은 되지 않아도 왠지 모를 죄책감을 더는 데는 좋은 역할을 하니 나쁘지 아니하다. 또한 동양인이 수학에 뛰어난 원인도 한 음절로 말할 수 있는 일련의 숫자 정렬 방식과 논농사로 다져진 부지런함을 꼽은 건 매우 특이한 관점이다. 논농사가 부지런함을 유전자에 각인시켰다는 관찰은 다소 사맛디 아니하나 수를 쉽게 세기 때문에 숫자에 강하다는 해석은 꽤 그럴 듯하다.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책은 결국 아웃라이어가 되기 위해선 10000시간의 노력과 행운, 또 문화적 유산(일종의 아비투스)이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대부분 치열하게 사는 요즘 사람에겐 통제할 수없는 변수인 행운이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헌데 노력하는 사람도 운 좋은 사람을 못 이긴다는 아포리즘이 이 책의 결론이라면 우울하다. 밝게 보자. 이 책은 세상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 다양한 변수에 대한 관찰과 다른 생각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즉 이 책이 제시하는 결과보단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다른 시각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추천한 20권의 휴가 관련 서적 중 이 책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왜 그대의 삶이 빡셀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통찰과 위로, 또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저 그런 경영 경제 서적 10여권 보다 훨씬 나은 효용을 준다. 그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나는 서둘러 1400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써야겠다. 물론 20살 이후로 매년 130권 정도의 책을 읽었으니 서른이면 그 경지에 도달할 듯하다.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이라고 송나라 대유학자 주자는 말했다. 나 또한 불민한 나를 재촉해 아웃라이어의 경지에 다다르려 한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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