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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 불멸의 음반 100 최악의 음반 20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루브르를 다 돌아다니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테다. 하루에 여덟 시간 정도를 보낸다는 가정하에서다. 물론 그림 하나를 보는 데 10초면 족하다. 그만큼 루브르에는 작품이 많다. 헌데 교향곡은 어떤가. 한 곡에 짧으면 30분, 길면 100분 정도 걸린다. 모차르트의 작품만 다 들어도 한 달은 오디오 앞에서 보내야 할 테다. 미술과 달리 클래식 음악의 시장 규모가 줄어드는 데는 이러한 시간적 제약이 있다. 이뿐만 아니다. 그림을 한 편 보고나면 차 후 봤던 그림인지 아닌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헌데 클래식은 다르다. 교향곡 한곡을 다 들어도 특정 소절이 들었던 교향곡에서 발췌된 건지 아닌지 헷갈리기 일쑤다. 한곡의 교향곡을 들어본 척이라도 하려면 10번 정도는 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 소모다. 특히 하이든이나 바흐의 곡은 대부분 비슷하다. 이들은 특정한 작곡 기법을 바탕으로 대량의 곡을 양산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다 같은 곡으로 들릴 정도다.
특히 요즘 같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선 클래식 같은 문화장르는 덜 매력적이다. 이미 20세기 초, 프로이트는 신경병의 원인으로 고도화된 문화적 축적을 지목했다. 즉 인간이 몇 천년 동안 쌓아올린 지적 성과물을 유지하고 발전해 나가는 데 엄청난 지력이 소모되므로 신경쇠약과 같은 병이 부작용으로 발생한다는 거다. 헌데 21세기 초인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은 지적 성과물이 쌓여져 있다. 이러한 시대에 클래식을 감상한다는 것은 유한계급이나 혹은 제 삶을 충분히 꾸려갈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의 취미일 테다. 클래식의 죽음. 이건 시대의 조류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2.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고파 한다. 글을 쓰는 이는 소설을 남기고 환쟁이는 그림을 남긴다. 음악 하는 이는 곡을 남겼다. 헌데 녹음 기술이 발달하면서 곡이 아니라 연주로도 자신의 존재증명이 가능해졌다. 클래식 음반계가 새로운 곡을 만들기보다 연주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새로운 곡을 만들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니다. 충분히 많다. 우선 음악 자체를 홍보하는 일이 쉽지 않다. 클래식이란 안정된 타이틀을 얻으려면 시간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데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미 음악 애호가에겐 들어야 할 클래식 레퍼토리만으로도 벅차다. 앞서 지적했듯 한 음악가의 전곡을 오롯이 듣는 데만 해도 몇 달이 걸린다. 과거의 좋은 곡을 놔두고 요즘 음악을 들을 이유가 없다. 물론 다른 장르의 음악은 열외로 한다.
그러니 연주로 제 존재 증명하는 데 힘쓴다. 헌데 음반으로 하는 음악 감상이 일반화 되다 보니 다들 비슷한 수준의 연주를 하게 된다. 연주의 차이는 잗다라 하다. 자신은 매우 파격적이라고 연주하지만 같은 곡을 가지고 연주하다 보니 예민하지 않으면 큰 차이를 못 느낀다. 결국 연주 레퍼토리는 바닥이 나고 새로운 곡으로 청중의 귀를 붙잡기도 어렵다. 클래식의 죽음. 기술 진보에 따른 필연이다.
#이 책은 클래식 음악사의 뒷부분을 이야기하며 연대기 순으로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헌데 책을 보며 이보다 더 도저한 필연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여 생각을 읊조려 보았다. 클래식을 좋아한다 하여도 이 음악이 내재한 지위재적 성격은 여전히 불편하다. 문제는 이러한 지위재적 성격에 클래식을 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거다. 문화적 구별 짓기를 위한 도구로써 클래식만큼 시간이 많이 드는 게 또 없다. 과시적 취미로 삼을만하다. 참으로 복잡한 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