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세트 - 전10권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문열은 우파다. 국내 작가 중 가장 많은 욕을 먹는다. 80년 대 학번 선배들은 그의 책을 안고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심장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헌데 요즘 그에 대한 세상의 대우는 박하다. ‘홍위병’관련 발언이나 촛불 시위에 대한 부정적 언급은 이문열에게 보수 꼴통이란 이미지까지 주었다. 그런 그늘진 구석과 달리 그의 문장은 현란하다. 말은 적당히 리듬감 있고 생각은 웅숭깊다. 사상은 적당히 치우쳐있지만 문장은 명쾌하고 고문(古文)과 범박하지 않은 어휘가 적당히 섞여 맛깔 나는 글을 선사한다. 이 책 삼국지에서도 그렇다. 오히려 대중과 가장 알맞은 접점을 찾았다는 면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삼국지는 무협지처럼 조금은 현란하고 과시적이며 극 중 인과관계는 약간 허술하다. 그렇기에 재미있고 사람들이 좋아한다. 황석영이나 김홍신, 심지어 장정일도 평역을 남겼다. 황석영이나 김홍신은 원전에 충실하다 보니 읽는 맛이 덜하고 장정일은 새로운 시도를 하였으나 삽입된 그림이 더 기억에 남는다. 원작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며 글을 이끌어간 이문열의 삼국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다.  

또한 삼국지는 매우 보수적인 정치관을 갖고 있으며 영웅사관에 기초한 문학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한(漢)나라라는 부패한 국가를 조조 같은 군벌이 뒤집으려는 시도를 사람들은 불편하게 본다. 또한 이런 군웅들 때문에 피폐해져 가는 백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듯한 시각은 지극히 편협해 보인다. 인맥과 혈연에 의한 정치는 동양적 구습의 절정으로 보이고 지나치게 충성을 강요하는 측면은 전체주의의 맹아로도 읽힌다. 진보적 사관을 가진 이에겐 여러모로 불편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불편해 하는 좌파 지식인들은 삼국지에선 정도를 뛰어넘는 불편함을 느낀다.

헌데 삼국지가 이야기하는 세상과 현재의 세상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의리가 중요하고 명분이 중요시되며 권력 투쟁은 더 치열해졌다. 달관하지 않는 이상 삼국지가 이야기하는 서사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촘촘한 이야기 구조는 빽빽한 세상에서 살아나갈 박진감을 주고 두서없는 말의 향연은 궤변일지라도 논쟁의 쾌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삼국지를 알지 못하면 현재의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교양서로도 읽을만하다. 특히 한자를 많이 쓰고 시구(詩句)를 많이 삽입하여 고문학을 읽는 듯한 쾌감을 주는 이문열의 삼국지는 적절한 선택이다.

다만 삼국지에 몰입한 나머지 제 자신을 제갈량이나 유비와 같은 인물로 보고선 세상을 폄훼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고에이에서 만든 삼국지 게임을 하고선 허랑방탕한 세상을 비웃으며 온라인에서 마스터베이션 하는 행위는 지극히 삼가야 한다. 김영하가 이에 관한 단편 소설을 쓴 적이 있는 데 중딩 때 내 모습이 떠올라 약간 씁쓸하였다. 컴퓨터 게임이 짜놓은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열패감을 잊으려는 노력은 비루한 삶을 더 침강하게 할 뿐이다. 헌데 와우(WoW)같은 오락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현실은 삶이 더욱 비루해지고 그 비루함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군상들의 치밀함이 한층 강화된 진실을 말해 준다.

삼국지의 세계는 현실과 닿지 못하는 이상의 세계고 그곳의 몇몇 군상들은 다소 평면적이다. 제갈량이나 곽가의 깊은 헤아림은 감탄을 주지만 현실 속 상대는 삼국지 속 우둔한 그들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삼국지를 읽고 과대망상에 걸리면 안 되는 이유다. 폰 노이만이 이야기한 게임 이론을 바탕으로 봐도 선택은 항상 실시간적이고 상대의 우월전략과 열등전략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봐, 제갈량의 신묘한 계략은 쉬이 이루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만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했을 때 보인 재기발랄함이나 평판을 중요시했던 유비의 영악한 올곧음은 배울만하다. 삼국지란 소설이 꾸준히 읽히는 이유다.

1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이문열의 삼국지는 많은 장점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장점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다만 삼국지에 천착하여 세상을 다 안다 여기는 어쭙잖은 인간들을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너무 어릴 때 삼국지를 읽은 자들이 보이는 폐해 중 가장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적당히 즐기면서 읽다보면 삼국지의 마니아가 돼 있을 테다. 지나치지 않은 공평무사한 마니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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