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과 대학로에서 커피를 마셨다.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내게 곡 제목을 물었다. 뉴에이지 계통의 음악이었다. 예전엔 많이 들은 곡이다. 유키 구라모토 내지는 이루마 곡 같다고 했다. 찬찬히 들어보니 이루마 곡이었다. 이루마 1집에 있던 곡이었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내게 이 곡이 무슨 곡이냐는 질문을 잘한다. 연주곡은 물론이고 팝이나 오래전 가요도 질문 대상이다. 예전엔 그런 걸 가르쳐주는 게 좋았다. 인정받는다는 느낌에서였을 테다. 그러다보니 곡 제목을 자연스레 외우게 되었다. 요즘은 그렇기 힘들다. 듣는 음악이 워낙 많으니 기억의 간섭 현상이 일어난다. 즐겨 듣는 곡이 아니고선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렵다. 뉴에이지 계열 음악은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의 주제 음이 꾸준히 반복되는 구조라 곡 제목을 쉬이 유추할 듯 하지만 전달하고자하는 감정의 폭이 엇비슷하여 헷갈리기 마련이다.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그들의 유명한 교향곡을 제외하곤 구별하기 힘들다. 워낙 다작을 한데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서일 테다. 가끔 쇼팽과 베토벤의 소나타가 헷갈리기도 하고 말러의 곡을 듣고 수많은 작곡가가 연상되기도 한다. 정말 익숙한 선율이 아니고선 이건 누구의 무슨 곡이라 하기 힘들다.
그래도 익숙한 곡은 연주자가 누군지 까지 알아맞히려 애쓰곤 했다. 참 부질없다. 예전 고전음악연구회라는 모임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어느 부분에 강조를 하여 연주를 하냐에 따라 음악이 달리 들린다는 내용이었다. 매우 주정적인 연주가 나왔는데 녹음 상태와 박력 있는 연주에서 푸르트뱅글러가 히틀러 생일에 연주한 도이치 그라모폰 앨범이 아닐까 했다. 그 앨범을 갖고 있었고 음질이 안 좋아 별로 듣진 않는 터였다. 다만 정석적 연주와 반대되는 개성적 지휘자의 음반이라고도 해서 푸 선생이 맞는 것 같았다. 나의 추측은 맞았고 누군가는 나를 클래식 고수라 칭했다. 내 모자람을 알기에 웃어 넘겼지만 그런 추어올림이 싫지만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낯부끄럽다.
음악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머리에 입력 시킨 건 중 2때부터인 것 같다. 그 땐 거리에서 나오는 음악의 제목과 가수를 알아채는 사람이 신기했었다. 친구는 외국 영화의 한 장면만 보고선 영화 제목과 배우이름을 알아맞히는 나를 신기해했었다. 그런 선망의 눈빛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음악도 즐기는 장르에서 내 교양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 갔다. 언젠가부터 나는 지식 검색 사이트마냥 친구들이 음악이나 영화 관련 질문을 해오면 척척 대답하곤 했다. 헌데 영화를 좀 더 깊게 보고 음악을 좀 더 깊게 들으며 내 취향은 지인들과 멀어졌다. 아마 그런 존재증명이 덧없다고 느껴졌나 보다. 그 후 나는 그들이 검색어를 입력하면 조금만 헷갈려도 ‘모른다’라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요즘은 책에 관심이 많아져 책 읽고 서평 쓰는데 하루를 오롯이 투자한다. 책과 대화하며 필자의 치우침을 비난하고 또 토론하며 마음을 즐거이 한다. 문제는 이럴수록 예전 친구들과의 대화가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홀로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게 된다는 거다. 괜히 어쭙잖은 먹물 행세나 하며 나를 벼려온 시간이 가엽게 느껴졌다.
음악은 그냥 듣고 그림은 그냥 보고 영화는 그냥 느끼고 책은 그냥 읽어야겠다. 나를 포장하려는 일련의 작업과 위의 취미가 맞물린다면 나는 영원한 3류가 될 듯하다. 다들 제 자신을 포장하기 바쁜 시대에 이런 무심(無心)함은 나를 사회적으론 3류로 만들지 모른다. 그래도 스스로가 자존감을 가지며 나를 사랑한다면 스스로 곧추 설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모르지만 그러도록 노력해야겠다. 그게 아름다움이라고 본다. 스스로에게 베푸는 가장 근사한 아름다움 말이다. 취미가 ‘구별짓기’의 한 용도로 쓰인다면 그 취미는 갑자기 속물이 되어 버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