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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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심드렁했다.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아팠다. 아픈데 끌렸다. 아플수록 몰입했고 그런 몰입이 잔망스럽게 느껴졌다. 상처를 후벼 팔수록 그 피범벅에 오롯이 집중했다. 책과 나와의 거리는 바투 이어져있었지만 소설과 내 삶의 거리는 그토록 먼 것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심란하다. 그들의 아픔을 터럭만큼 느꼈을 뿐인데도 나는 밤새 낮게 울었다.

황석영은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게 해주는 작가다. 덕분에 고맙고 한껏 우러르고 싶다. 중 2 때 배운 ‘학마을 사람들’과 같은 소설은 상흔(傷痕)의 외피에 불과했다. 이렇게 다소곳이 적나라해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란 말이 가슴에 여울진다. 왜 전쟁은 슬픈지. 왜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은 더더욱 슬픈지. 배웠다. 간만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혼령(魂靈)을 내세운 그 에두름 덕인 듯하다. 카타르시스 같은 슬픔이 가벼운 삶을 흔든다. 아직도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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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것에 별로 욕심이 없다. 자잘한 것에 더 끌린다. 그 자잘함이란 소박함과도 닿아있다. 그러다 보니 일의 우선순위가 섞갈리기 일쑤다. 그런 내게 친구들은 독기를 품고 살라 한다. 좀 더 진중하고 가열 차게 산다면 남보다 편히 살 거란 말을 덧붙인다.

 그들의 말이 지극히 옳다고 생각한다. 잗다란 것을 좇다 큰일을 그르치곤 하기에 그렇다. 허나 그런 그르침이 나를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될 거라 위로하며 살았다. 문제는 나이였다. 살아 온 시간이 점점 두터워지며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 마음 가는 데로만 행동했더니 삶이 점점 야위어간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얼마 전 알라딘에서 했던 서평 대회 때문이다.

 서평 대회 기간에 내겐 중요한 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을 잘 봐야 내 인생은 노력보다 빛날 수 있었다. 허나 나는 책을 읽고 흔적을 남기는데 열중했다. 3일 정도 공부하면 될 거라 여겼지만 경쟁자들은 한 달은 넘게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시험에서 떨어졌고 다시 서평을 쓰며 마음을 눅였다. 헌데 내가 쓴 서평 중 단 하나가 당첨됐다. 공들여 쓴 서평들이었는데 마음 가는 데로 쓴 한편만 된 거다. 화가 났다. 묘한 경쟁심과 스스로의 쾌락에 도취되어 일의 경중(輕重)을 파악하지 못한 미욱함이 원망스러웠다. 서평을 쓰는데 들인 노력의 반만 기울였어도 시험을 통과하긴 어렵지 않았을 테다. 작은 보상으로 큰 상실을 메우려 했던 마음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서평은 계속 쓸 예정이다. 이제 할 게 별로 없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학교 도서관에서 친구 이름으로 황석영 씨 책 네 권을 빌렸다. 다만 알라딘이란 사이트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마케팅 전략에 넘어가 인생을 둘러가게 된 현실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게 내 탓이란 자기 객관화 정도는 가능하지만 마음을 삭히기 어렵다. 아.. 진짜..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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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1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도닥도닥 다시 볼 수는 없는 시험인거예요?

바밤바 2009-12-18 14:56   좋아요 0 | URL
내년에 볼 수 있는 시험인거예요 ㅠㅠ
누나~ 맥주 사줘요~ 엉엉

무해한모리군 2009-12-23 15:57   좋아요 0 | URL
좋아요 맥주를 사겠어요!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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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숙 씨에게 수업을 들은 지인들이 있다. 그들의 호불호는 나뉜다. 그녀의 깊은 사유가 좋다는 쪽과, 386 특유의 거들먹거림과 마초 주의적 사고가 싫다는 말. 이 책을 보면 두 이야기 다 수긍이 간다. 우선 인생의 지난함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차원으로의 극복을 강조하는 그녀의 객기를 보자. 삶의 고통을 다른 차원으로 이겨내라는 몽상가적인 타이름이 나온다. 개인의 자지레한 아픔을 환원적으로 일반화시키는 그 무던함에서 386적 오만이 느껴진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생각의 과정은 꽤나 치밀하고 재미있다. 그녀는 마초이면서 공부를 많이 한 사상가가 맞는 듯하다.

 이야기는 잘 읽힌다. 구술문학처럼 입말을 주로 사용해서 그렇다. 애써 젠체하지도 않고 말로 사람을 기죽이려 하지 않는다. 드문드문 푸코적 사유나 들뢰즈의 노마디즘이 주석 없이 언급되지만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소설을 하나의 도그마로 설정하여 담론의 전개했기에 한계가 명확하다. 소설 속 인물에서 진리를 찾고 설파하기에 사유의 기반이 허약할 수밖에 없다. 조정래가 말했듯 소설은 작가의 성향을 오롯이 드러내는 고백의 글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임꺽정과 홍명희는 맞닿을 수밖에 없다. 결국 고미숙이 말한 임꺽정의 노마디즘과 청석골의 꼬뮌주의는 홍명희가 바라마지 않았던 탈봉건주의와 이상사회의 또 다른 표현이다. 물론 홍명희에 대한 언급도 종종 하며 이야기의 치우침을 경계하려 한다. 그러나 서사의 바탕은 역사 속 임꺽정이 아닌 홍명희의 임꺽정이다. 임꺽정이란 이야기가 도그마라는 전제를 독자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소구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미숙은 또 갖바치를 언급하며 그와 같은 공부가 본래적 공부라 강조한다. 요즘 사람들의 공부는 밥벌이를 위한 공부로 삶을 살찌우는 게 아니라 핍진하게 하는 것이라 역설한다. 지극히 온당하지만 사뭇 속세와 괴리된 듯한 그 준엄함이 살짝 거슬린다. 개인적으로 일상의 구접스러움을 이겨내는 사람이야 말로 평범하지만 그만큼 위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두가 학문에 매진하고 갖바치마냥 신통방통한 능력을 가진다면 삶은 또 다른 차원의 배척과 집단의 다툼이 있을 테다.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며 그 대응으로 개인의 노마디즘을 강화하라는 말이 레토릭으로 들리는 이유다. 자본 없이 실존의 불안을 이겨내기 힘들고 공부만으론 자본을 양산해 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책을 읽고서 괜찮은 영화 한 편 보고 난 뒤의 카타르시스와 울림 정도만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현 상황에선 자본 축적과 관련된 모든 게 다 노동이다. 푸코가 말했듯 광기란 말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그 쓰임이 시대에 따라 달랐듯 공부란 말도 이젠 그 의미가 달라졌을 뿐이다.

 고미숙이 쓴 ‘열하일기’와 ‘이 영화를 보라’ 외에도 몇 권을 더 읽은 적이 있다. 예전엔 그녀가 풀어내는 사유에 감동하였고 스스로의 불민함을 탓하였으며 그녀의 다름이 지극히 옳아 보였다. 허나 지인들의 절박함과 스스로의 비루함을 절감하는 시간을 보내며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의 다름은 삶의 탈출구를 제공하기 보단 현실이 얼마나 던적스러운지를 가르쳐주는 고매한 불평이라고 본다. 물론 청석골 사람들처럼 자유롭고 거침없이 너나들이하는 모양새는 원시의 힘이 느껴져 좋고 또 지극히 바람직하다. 다만 역사는 이러한 바람직함 속에서 비루함을 드러냈고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더 많은 억압기제를 낳았다. 이것이 현실을 고르디우스의 매듭마냥 얽히게 하였고 모두를 자본을 양산하기 위한 부품으로 일정 기능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유를 꿈꿀수록 현실에서 버둥거리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공부는 답이 아니다. 지나치게 명쾌한 해법은 경쾌하지만 공허하다. 아마도 고미숙은 개인의 변화가 사회 변혁을 이끌어 낼 거란 믿음에서 한 말일테다. 허나 현실이 개인을 옮아 매는 방식이 너무나 치밀한 요즘이다. 그 치밀함이 천라지망(天羅地網)과 같다. 위 고사에서 ‘천’에 해당하는 말이 요즘엔 자본이다. 책은 유쾌하지만 삶은 버겁고 책은 명징하지만 삶은 고민의 연속이다. 섭생(攝生)의 기술을 통해 편안한 삶을 살았다는 도가(道家)의 사람들도 현 한국 사회에선 허덕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정신적 성장만으론 삶은 해체하기 어렵다. 제 아무리 세상이 매트릭스라 외쳐봤자 네오와 같은 힘이 없다면 다 부질없을 뿐이다. 고미숙의 글은 재미있지만 그래서 공허하다. 깊은 사유가 두터운 벽을 뚫지 못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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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인들과 대학로에서 커피를 마셨다.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내게 곡 제목을 물었다. 뉴에이지 계통의 음악이었다. 예전엔 많이 들은 곡이다. 유키 구라모토 내지는 이루마 곡 같다고 했다. 찬찬히 들어보니 이루마 곡이었다. 이루마 1집에 있던 곡이었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내게 이 곡이 무슨 곡이냐는 질문을 잘한다. 연주곡은 물론이고 팝이나 오래전 가요도 질문 대상이다. 예전엔 그런 걸 가르쳐주는 게 좋았다. 인정받는다는 느낌에서였을 테다. 그러다보니 곡 제목을 자연스레 외우게 되었다. 요즘은 그렇기 힘들다. 듣는 음악이 워낙 많으니 기억의 간섭 현상이 일어난다. 즐겨 듣는 곡이 아니고선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렵다. 뉴에이지 계열 음악은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의 주제 음이 꾸준히 반복되는 구조라 곡 제목을 쉬이 유추할 듯 하지만 전달하고자하는 감정의 폭이 엇비슷하여 헷갈리기 마련이다.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그들의 유명한 교향곡을 제외하곤 구별하기 힘들다. 워낙 다작을 한데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서일 테다. 가끔 쇼팽과 베토벤의 소나타가 헷갈리기도 하고 말러의 곡을 듣고 수많은 작곡가가 연상되기도 한다. 정말 익숙한 선율이 아니고선 이건 누구의 무슨 곡이라 하기 힘들다.

  

 

 

 

 

 

 

 

 

 그래도 익숙한 곡은 연주자가 누군지 까지 알아맞히려 애쓰곤 했다. 참 부질없다. 예전 고전음악연구회라는 모임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어느 부분에 강조를 하여 연주를 하냐에 따라 음악이 달리 들린다는 내용이었다. 매우 주정적인 연주가 나왔는데 녹음 상태와 박력 있는 연주에서 푸르트뱅글러가 히틀러 생일에 연주한 도이치 그라모폰 앨범이 아닐까 했다. 그 앨범을 갖고 있었고 음질이 안 좋아 별로 듣진 않는 터였다. 다만 정석적 연주와 반대되는 개성적 지휘자의 음반이라고도 해서 푸 선생이 맞는 것 같았다. 나의 추측은 맞았고 누군가는 나를 클래식 고수라 칭했다. 내 모자람을 알기에 웃어 넘겼지만 그런 추어올림이 싫지만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낯부끄럽다.

 음악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머리에 입력 시킨 건 중 2때부터인 것 같다. 그 땐 거리에서 나오는 음악의 제목과 가수를 알아채는 사람이 신기했었다. 친구는 외국 영화의 한 장면만 보고선 영화 제목과 배우이름을 알아맞히는 나를 신기해했었다. 그런 선망의 눈빛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음악도 즐기는 장르에서 내 교양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 갔다. 언젠가부터 나는 지식 검색 사이트마냥 친구들이 음악이나 영화 관련 질문을 해오면 척척 대답하곤 했다. 헌데 영화를 좀 더 깊게 보고 음악을 좀 더 깊게 들으며 내 취향은 지인들과 멀어졌다. 아마 그런 존재증명이 덧없다고 느껴졌나 보다. 그 후 나는 그들이 검색어를 입력하면 조금만 헷갈려도 ‘모른다’라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요즘은 책에 관심이 많아져 책 읽고 서평 쓰는데 하루를 오롯이 투자한다. 책과 대화하며 필자의 치우침을 비난하고 또 토론하며 마음을 즐거이 한다. 문제는 이럴수록 예전 친구들과의 대화가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홀로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게 된다는 거다. 괜히 어쭙잖은 먹물 행세나 하며 나를 벼려온 시간이 가엽게 느껴졌다. 

 음악은 그냥 듣고 그림은 그냥 보고 영화는 그냥 느끼고 책은 그냥 읽어야겠다. 나를 포장하려는 일련의 작업과 위의 취미가 맞물린다면 나는 영원한 3류가 될 듯하다. 다들 제 자신을 포장하기 바쁜 시대에 이런 무심(無心)함은 나를 사회적으론 3류로 만들지 모른다. 그래도 스스로가 자존감을 가지며 나를 사랑한다면 스스로 곧추 설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모르지만 그러도록 노력해야겠다. 그게 아름다움이라고 본다. 스스로에게 베푸는 가장 근사한 아름다움 말이다. 취미가 ‘구별짓기’의 한 용도로 쓰인다면 그 취미는 갑자기 속물이 되어 버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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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16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_+ !!!

바밤바 2009-12-16 19:2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유혹하는 에디터 - 고경태 기자의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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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중혁은 이 책에 대해 “글 쓰는 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라고 했다. 고경태가 편집장으로 있는 씨네 21의 한 지면에서 말이다. 김중혁의 선의(善意)를 십분 이해한다 해도 다소 의심이 가는 구석이다. 그래서 책을 직접 읽었다. 글 쓰는 이가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서는 아닌 듯하다. 그냥 읽어봄 직한 좋은 책이다.

 책을 읽다 비문 하나랑 비표준어 하나를 발견 했으나 줄을 그어놓지 않아 기억이 안 난다. 편집 기자의 책에도 이런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편집을 다루는 책에선 그럴 순 없다. 그렇다고 책의 진정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사진과 재미있는 예화는 글을 쉽게 읽히게 한다. 다만 사진과 사진을 설명하는 글이 한 페이지에 있지 않고 다른 페이지에 있는 것은 가독성을 떨어트린다. 편집기자로서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부분이다.

 기자들이나 블로그를 색깔 있게 꾸미려는 사람에겐 좋은 책이다. 다만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고백이 아닌 객관화로 포장한 건 온당치 못하다. 유혹하는 자가 스스로에게 반해야 하는 건 맞다. 허나 글로 풀어낸 나르시시즘과 자기 정당화는 매력이 떨어진다. 글과 편집으로 누군가를 유혹하는 건 이렇듯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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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15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필독서는 아니라는데 동의합니다.. 약간은 어딘가 치우쳐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계속 손에 들고, 또 시간날때 들어야 하는가는 의문입니다.

저런 광고구나 소개글은 어쩌면 소비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것일까요..?

바밤바 2009-12-15 20:22   좋아요 0 | URL
책은 재밌어요~ ㅎ 저런 고아고구나 소개글에 대해 고경태 씨는 긍정하는 입장이더군요^^ 논리는 빈약하지만 심정적으로 수긍이 되는 말이었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