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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미숙 씨에게 수업을 들은 지인들이 있다. 그들의 호불호는 나뉜다. 그녀의 깊은 사유가 좋다는 쪽과, 386 특유의 거들먹거림과 마초 주의적 사고가 싫다는 말. 이 책을 보면 두 이야기 다 수긍이 간다. 우선 인생의 지난함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차원으로의 극복을 강조하는 그녀의 객기를 보자. 삶의 고통을 다른 차원으로 이겨내라는 몽상가적인 타이름이 나온다. 개인의 자지레한 아픔을 환원적으로 일반화시키는 그 무던함에서 386적 오만이 느껴진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생각의 과정은 꽤나 치밀하고 재미있다. 그녀는 마초이면서 공부를 많이 한 사상가가 맞는 듯하다.
이야기는 잘 읽힌다. 구술문학처럼 입말을 주로 사용해서 그렇다. 애써 젠체하지도 않고 말로 사람을 기죽이려 하지 않는다. 드문드문 푸코적 사유나 들뢰즈의 노마디즘이 주석 없이 언급되지만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소설을 하나의 도그마로 설정하여 담론의 전개했기에 한계가 명확하다. 소설 속 인물에서 진리를 찾고 설파하기에 사유의 기반이 허약할 수밖에 없다. 조정래가 말했듯 소설은 작가의 성향을 오롯이 드러내는 고백의 글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임꺽정과 홍명희는 맞닿을 수밖에 없다. 결국 고미숙이 말한 임꺽정의 노마디즘과 청석골의 꼬뮌주의는 홍명희가 바라마지 않았던 탈봉건주의와 이상사회의 또 다른 표현이다. 물론 홍명희에 대한 언급도 종종 하며 이야기의 치우침을 경계하려 한다. 그러나 서사의 바탕은 역사 속 임꺽정이 아닌 홍명희의 임꺽정이다. 임꺽정이란 이야기가 도그마라는 전제를 독자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소구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미숙은 또 갖바치를 언급하며 그와 같은 공부가 본래적 공부라 강조한다. 요즘 사람들의 공부는 밥벌이를 위한 공부로 삶을 살찌우는 게 아니라 핍진하게 하는 것이라 역설한다. 지극히 온당하지만 사뭇 속세와 괴리된 듯한 그 준엄함이 살짝 거슬린다. 개인적으로 일상의 구접스러움을 이겨내는 사람이야 말로 평범하지만 그만큼 위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두가 학문에 매진하고 갖바치마냥 신통방통한 능력을 가진다면 삶은 또 다른 차원의 배척과 집단의 다툼이 있을 테다.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며 그 대응으로 개인의 노마디즘을 강화하라는 말이 레토릭으로 들리는 이유다. 자본 없이 실존의 불안을 이겨내기 힘들고 공부만으론 자본을 양산해 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책을 읽고서 괜찮은 영화 한 편 보고 난 뒤의 카타르시스와 울림 정도만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현 상황에선 자본 축적과 관련된 모든 게 다 노동이다. 푸코가 말했듯 광기란 말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그 쓰임이 시대에 따라 달랐듯 공부란 말도 이젠 그 의미가 달라졌을 뿐이다.
고미숙이 쓴 ‘열하일기’와 ‘이 영화를 보라’ 외에도 몇 권을 더 읽은 적이 있다. 예전엔 그녀가 풀어내는 사유에 감동하였고 스스로의 불민함을 탓하였으며 그녀의 다름이 지극히 옳아 보였다. 허나 지인들의 절박함과 스스로의 비루함을 절감하는 시간을 보내며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의 다름은 삶의 탈출구를 제공하기 보단 현실이 얼마나 던적스러운지를 가르쳐주는 고매한 불평이라고 본다. 물론 청석골 사람들처럼 자유롭고 거침없이 너나들이하는 모양새는 원시의 힘이 느껴져 좋고 또 지극히 바람직하다. 다만 역사는 이러한 바람직함 속에서 비루함을 드러냈고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더 많은 억압기제를 낳았다. 이것이 현실을 고르디우스의 매듭마냥 얽히게 하였고 모두를 자본을 양산하기 위한 부품으로 일정 기능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유를 꿈꿀수록 현실에서 버둥거리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공부는 답이 아니다. 지나치게 명쾌한 해법은 경쾌하지만 공허하다. 아마도 고미숙은 개인의 변화가 사회 변혁을 이끌어 낼 거란 믿음에서 한 말일테다. 허나 현실이 개인을 옮아 매는 방식이 너무나 치밀한 요즘이다. 그 치밀함이 천라지망(天羅地網)과 같다. 위 고사에서 ‘천’에 해당하는 말이 요즘엔 자본이다. 책은 유쾌하지만 삶은 버겁고 책은 명징하지만 삶은 고민의 연속이다. 섭생(攝生)의 기술을 통해 편안한 삶을 살았다는 도가(道家)의 사람들도 현 한국 사회에선 허덕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정신적 성장만으론 삶은 해체하기 어렵다. 제 아무리 세상이 매트릭스라 외쳐봤자 네오와 같은 힘이 없다면 다 부질없을 뿐이다. 고미숙의 글은 재미있지만 그래서 공허하다. 깊은 사유가 두터운 벽을 뚫지 못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