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마티스. 피아노 교습.
1916년, 캔버스에 유채, 현대미술관, 뉴욕.
 
 
   우리 모두는 소년과 그의 운명을 알고 있다. 우리 중 몇몇은 과거 바로 그 소년이기도 했다. 피아노 교습은 엄격하고 공포스러운 풍경을 떠올리게 하고,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어둡고 침울했던 시간을 상기시킨다.
  그 불행한 학생의 뒤편, 뭔지 모를 모호한 공간에 키가 큰 선생이 높은 의자에 앉아 있다. 시간은 정지되어 있고, 메트로놈 덕분에 무지막지하게 엄숙한 분위기가 한층 강조된다. 딸각거리는 바늘로 손놀림을 교정해 주는 메트로놈은 서툰 손짓을 비웃는 듯하면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심지어 메트로놈이 뒤집힌 모양이 소년의 얼굴에까지 드리워져 있다.
  살아 숨쉬는 생명체의 자유로운 삶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는 전형적인 프랑스식 플레옐 그랜드 피아노의 악보대 위에 새겨진 바로크식 문양뿐이다. 그 문양은 발코니처럼 보이는 곡선에 연결된다. 곡선의 움직임은 다시 화가 자신의 조각 작품처럼 보이는 이미지로 이어 지는데, 조각의 관능적인 자태는 그림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부분이 없었다면 전체적으로 삭막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소년은 메트로놈과 같은 엄격한 모습을 하고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선생님의 시선 아래 피아노를 두드리면서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여기까지는 내가 오랫동안 이 그림을 곡해하고 있던 대목이다. 내 무지의 소치였다.
  사실 소년은 홀로 앉아 있으며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은 뒤편 벽에 붙어 있는 초상화로, 2년 전에 죽은 가족의 친구 레이날 부인이다.
  일단 구도를 지배하는 여인의 존재가 평면임을 알게 되자, 그림의 나머지 부분들은 정원 쪽으로 후퇴해서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빛은 피아노 덮개 표면을 비추면서 정원에서 방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그렇다해도 그림은 여전히 클레(Paul Klee, 1879-1940)가 ' 어두운 장조'라고 부른 음산한 분위기를 띤다. 그리고 누군가의 설명처럼 빛이 없는 넓은 공간(이 그림의 높이는 2m 40cm이다)이 형편없는 미술가의 손에서 어쩔 수 없이 완성되었다면 침체되고 볼품 없었겠지만,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조화로운 색조를 놀랍게 구사했다.

 

  이듬해에 마티스는 똑같은 크기로, 자신의 가장 화려한 색조를 다양하게 구사하면서(똑같은 공간과 주제를 다시 한번 사용해서) 그림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림을 그리기조차 벅찰 정도로 큰 캔버스와, 분산된 요소들이 전에는 좀처럼 정리되지 않고 불안정했지만, 이번에는 흥겨운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마티스가 자신도 막 연주를 마쳤거나, 이제 연주를 시작하려는 바이올린의 존재를 빌려서 이 그림에 등장했다(앵그르처럼 그도 열정적인 아마추어 연주가였다).
  메트로놈은 자취를 감췄지만, 그에 버금갈만한 시각적인 요소를 장난스럽게 그려넣었다. 바로 정원의 신선하고 푸르른 공기를 방 안에 가져다준 *하이든*이라는 이름이다.
  벌거벗은 조각상이 수영장 옆에서 육감적인 여신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마티스 부인은 정원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고, 그의 딸 마르그리트는 동생 피에르와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피아노 덮개는 여전히 대담한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는데(두 작품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초상화의 주인공 레이날 부인은 훨씬 더 생기 있는 빛깔의 옷을 입고 있다.
 


앙리 마티스, 음악 교습.

1927년, 캔버스에 유채, 반스 재단, 펜실베니아.

 

 

  마티스는 자신의 첫 대작에 보들레르 유명한 시구를 인용해 [호사, 정적, 그리고 쾌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거의 열대에 가까운 정원의 나뭇잎들에는 '호사'가 흘러넘치고, '쾌락'은 과도한 조각상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정적'은 어디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또다시 그림을 곡해했다.
  인물들은 규모로 보나, 서로의 관계로 보나 어떠한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 그림의 핵심은 왼쪽 구석 바닥에 있다. 거기서 피아노를 치는 소년의 형인 장은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뭔가를 읽고 있는데, 홀로 뭔지 모를 어두운 분위기에 심취해 있다.
 
  사실 이 그림은 가족의 이별을 담고 있다. 장은 군대 소집 영장을 받아서 입대를 앞두고 있고, 마티스 자신도 1년 후에는 남프랑스의 여러 호텔들을 전전하면서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된다. 딸과는 결국 영영 이별했고, 아내와도 헤어졌다.
  마티스의 삶에 대한 진실은 초기 작품에 더 잘 표현되어 있다. 다른 많은 화가들도 자신의 삶을 외로운 싸움으로 시작했고, 또 끝을 낸다.
 
  이 두 편의 비슷한 그림을 잘못 이해한 실수를 범했지만, 덕분에 나는 교훈을 얻었다. 이 그림을 통해 예술의 모호성 때문에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기분 좋은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다.

 

톰 필립스, [음악이 흐르는 명화 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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