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by the Railroad

 

‘철길 옆의 집’과 ‘사이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빛나는 이성의 인간 존재에 대한 기대감을 짓밟아 버렸다. 산업혁명의 거대한 꿈은 대공황이라는 환멸 속으로 사라졌다.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인간의 의지를 더욱 무력화시키고, 인간은 그저 텅 빈 공간을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멍한 시선으로 신의 손길을 기다릴 뿐이다.

    호퍼는 이런 시대의 얼굴을 기록했다. 식당·호텔·아파트·주유소 등 우리 일상의 구체적인 풍경을 다룬 그의 그림 속으로 관객들은 일단 친숙함으로 접근하지만, 몰입하면 할수록 그림 속의 대상은 마치 포르노처럼 시각 주체를 사로잡으려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주체를 경직시켜 버린다.

   따라서 그의 그림을 바라보던 관객의 욕망은 그 지독한 적막감과 공허함 속에서 노출되고 상처받는다. 그림 속에 가득한 ‘대낮의 정사’ 같은 은밀함과 죄의식의 분위기가 정지된 시간과 진공된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면서 질식시킨다. 호퍼(Hopper)는 호러(horror)인 것이다.

   호퍼의 <철길 옆의 집>에는 텅 빈 하늘을 배경으로 홀로 남아 있는 산업사회 이전 시대의 한 가옥이 등장한다. 그것은 시대와 공간을 망각한 채 존재하는 유령의 집 같다. 그리고 그 집 앞을 가로지르는 철길은 그 집(환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다가서려는 관객에게 깊은 단절감(현실)을 안겨 준다. 이렇듯 <철길 옆의 집>은 밝은 햇빛을 받는 옛 시대의 집을 통해 낙관주의 이면에 깃든 짙은 비관주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허상적인 미국 이미지 그 자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사이코> 1960

   서스펜스 스릴러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든 <사이코>의 도입부는 마치 호퍼가 그린 도시의 풍경을 연이어 보여주는 것 같다. 카메라가 주도하는 관음적 시선 끝에 관객이 다다른 곳은 호텔 방. 그 곳에서 방금 전 대낮의 정사를 끝낸 두 남녀의 대화로써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 <사이코>는 자기 집에 어머니 시체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 사건이 일어난 실제 북캘리포니아에는 <철길 옆의 집>과 비슷한 집이 많다. 그 가옥의 형태를 ‘캘리포니아 고딕’, 또는 으스스한 느낌을 많이 주는 경우 ‘캘리포니아 생강빵’이라고도 부른다.

   히치콕은 이 집의 수직적 이미지와 그 밑에 있는 모텔의 수평적 이미지를 동원, 환상 공간과 현실 공간의 콘트라스트를 극대화했다. 그것은 <철길 옆의 집>에서 나오는 집과 철길의 대조적인 이미지 효과와 같은 것이다.

   영화사상 기법적으로 가장 탁월한 감독 중 하나로 인정 받는 히치콕은 그 유명한 샤워실의 살인 신으로 영화 시작 30분 만에 절정에 달해 버리는 플롯 구조의 파격을 시도했다. 여주인공 마리온(자넷 리)이 영화의 3분의 1 시점에서 죽어 버리고, 사이코 노먼 베이츠(앤소니 퍼킨스)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되자 관객은 심리적 동일시의 대상을 마리온에서 노먼으로 옮기면서 선과 악·미와 추·양심과 범죄의 기준을 잊는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무성영화 감독 출신답게 히치콕은 의심·질투·쾌락·욕망 등의 감정을 설명이나 대사의 도움 없이 직접 영화화한 유일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한 명료성과 단순성 때문에 관객들의 접근 또한 쉽다. <사이코>는 반무성영화에 가깝다. 소리 없는 신이 두 릴이나 된다. 영화의 메시지, 배우의 연기, 원작 소설의 흥미보다는 순수한 영상 기법·촬영 방식이 중시된 것이다.

   호퍼와 히치콕의 작품과 영화에선 시각적인 것 이외의 모든 감각적인 것은 증류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소리도 촉감도 없는 순수 시각적인 형식의 실험으로 가치 있다. 그리고 그 시각 형식의 적막감이 관객의 가슴 밑바닥까지 때리는 깊은 공명을 만들어내는 주요인이다.
<이건수 기자>

 출처 :http://www.wolganmisool.com/199812/info_3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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