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노 디 메디치의 무덤> 1526-33년

 

 

 

 

 

 

 

 

 

 

 

 

 

 

   <로렌초 디 메디치의 무덤> 1526-33년

 

또한 그는 교황 레오 10세의 주문으로 1520년에 메디치 채플에 네머스의 공작이었던 줄리아노와, 우르비노의 공작이었던 로렌초의 무덤을 제작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만든 묘의 주인공들은 미켈란젤로가 직접 보았거나, 초상화가 남아있던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별로 닮지 않았다.

줄리아노의 얼굴은 오히려 그가 젊었을 때에 제작한 <다비드>의 얼굴과 같은 유형이어서, 구체적인 한 인물의 얼굴이라기보다 이상적인 인간형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두 조각상을 통하여 인간의 두 유형, 즉 행동하는 유형(칼을 들고 있는 줄리아노)과 명상하는 유형(생각하는 자세의 로렌초)을 만들었다. 그리고 명상하는 로렌초의 석관 위엔 아침과 저녁을, 행동하는 줄리아노의 석관 위엔 낮과 밤을 놓음으로써 시간의 운행과 영원함을 동시에 설정해 놓고 있다.

 

 


<피에타> 1546-55년 대리석,높이233cm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누구로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자신을 위한 피에타상들을 제작하였다. 

위의 <피에타>는 그의 나이 70세쯤에 자기무덤에 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또한 미완성이지만 종래의 피에타 도상과는 전혀 다른 이 <피에타>의 구성은 그의 종교관을 짐작케 한다. 양쪽의 두 마리아가 시체를 부축하고 있지만, 시신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듯 미끄러져 내리는 듯 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니코데모는 마치 건물의 도움과 같이 그를 보호하며, 얼굴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을 새겨놓았다. 니코데모는 원래 예수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나 모험을 무릎 쓰고 예수의 무덤을 제공한 사람이다. 그의 존재를 이렇게 크게, 그리고 그의 얼굴엔 자신의 모습을 새긴 미켈란젤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학자들은 카톨릭세계에 있었던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개혁적인 성향을 이렇게 나타낸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개혁성향의 사람들을 다시 탄압하던 1555년경 그가 이 상을 부수려 했던 행동은 이를 반증하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론다니니 피에타> 1552-64년, 대리석, 높이 195cm 밀라노, 스포르제스코 성

 

일명 <론다니니 피에타>라고 부르는 또 다른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붙들고 있던 작품이다. 시신은 길게 늘려 있고 예수를 부축하여야 할 마리아는 오히려 시신에 얹혀있는 듯 불안정하다.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만든 이 <피에타>는 그가 청년기에 만든 바티칸 소장의<피에타>와 너무나 큰 대조를 보인다. 아름다운 균형과 완전한 기법은 모두 사라지고 절절한 간구만이 남았다. 그러나 이 피에타는 무르익던 르네상스 시대가 가고,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미켈란젤로가 구원을 갈구하는 참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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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1564년에 숨을 거두었으며,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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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0 1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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