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바로크시대(지도) 회화의 놀라운 변화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의 화가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09)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아니발레 카라치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지만 고전주의의 고상함을 따르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본 것에 의지하여 추하더라도 현실을 그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카라바지오의 리얼리즘을 일반적으로 '자연주의'라 부릅니다.

카라바지오는 밀라노 근처의 롬바르디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이 곳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보다 북유럽 사실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곳이었습니다. 초기에 카라바지오는 이곳에서 정물화나 장르화를 주로 그렸습니다(도1).

 

도1 카라바지오 < 과일바구니 >, 31x47 cm
밀라노, 피나코데카 암브로지아나도
 
 
도2 카라바지오 < 바커스 >, 1596년 경
캔버스에 유채, 95x85cm
피렌체, 우피치박물관
 

포도넝쿨로 관을 만들어 쓰고 포도주 잔을 건네는 그림의 주인공은 고대와 르네상스시대에 즐겨 다루어졌던 주신 바커스가 분명합니다(도2). 그러나 볼이 발그레한 이 이탈리아의 소년은 어쩐지 신화 속의 불멸의 신이기보다는 분장한 어린 모델 같습니다. 게다가 소년은 우리의 응시를 의식하고는 미묘한 눈길을 던지며 넘칠 듯한 포도주를 권하기까지 합니다. 소년이 조심성 없이 받쳐든 투명한 잔이 떨어진다면 아마도 포도주가 관객들에게 쏟아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화면에 바짝 다가앉은 주인공의 시선과 내민 팔은 관객의 공간을 침범하기 때문에 보는 이들은 이 그림을 편안하게 감상하기 어렵습니다. 이같은 세밀한 관찰에 바탕을 둔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는 압축된 공간과 강렬한 빛으로 보는 이들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획기적인 표현방식을 구사하였습니다.

 

 

아래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장면을 그린 <엠마우스의 저녁식사>는 카라바지오의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한 제자는 경이로움에 우리쪽으로 의자를 반쯤 밀치며 일어나고 있으며, 베드로의 뻗친 팔은 화면을 뚫고 나오는 것 같습니다. 식탁의 모서리에 비죽 나온 접시는 이러한 극적인 장면을 더욱 긴박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화면의 긴장감은 강렬한 빛의 사용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어둠속에서 예수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듯한 빛은 어떠한 소란한 설명보다도 훨씬 웅변적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3 카라바지오 <엠마우스에서의 식사 >, 1601-02년
139x195cm, 런던, 국립박물관
 
 
도4 카라바지오 < 엠마우스에서의 식사 > 도3의 부분
 
 
 
 
 

카라바지오는 성격이 난폭하고 다혈질이어서 늘 다툼을 일으켰지만 그의 종교화는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온 카라바지오는 성 프란체지 교회의 콘타렐리 가족예배실 제단화(도5)를 주문 받아 본격적인 종교화를 그리게 됩니다. 아래 사진은 콘타렐리 예배실의 광경입니다.

 

도5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교회
콘타렐리 예배당 실내
 
 
 
 
 

카라바지오는 이곳에 복음서가 마태의 세가지 사건, 즉 예수의 부름을 받고, 천사의 인도로 복음을 남겼으며, 마지막에 순교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기독교에서 성인들을 고귀하고 품위 있게 묘사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지오는 성인들을 그리는데 앞시대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맨발을 드러낸 채 의자에 엉거주춤 걸쳐 앉아 천사의 목소리를 받아 기록하는 마태는 매우 당황한 모습니다(도6). 그의 두 손은 너무 어색해서 이전에 사도들이 학식 높은 철학자로 그려졌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벽화로 걸린 이 그림도 카라바지오에게는 한껏 미화시킨 결과였습니다. 주문자로부터 거절당한 첫 번째 작품에서 성인 마태는 그야말로 고집 세고 무식한 당시의 하층민처럼 묘사되었던 것입니다.

 

도6 카라바지오 < 마태의 부름 >, 1602년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교회 콘타넬리 예배당
 
 
도7 카라바지오 < 성마태와 천사 >
1602년, 2차대전에 소실
베를린 프리드리히황제 박물관
 
 
 

반종교개혁시기의 다른 벽화들처럼 화려하게 교회를 장식하는 종교화를 과감하게 거부한 또 다른 작품은 <성모의 죽음>(도8)입니다. 카라바지오는 로마의 강변에서 건진 여자의 시체를 모델로 삼아서 그렸다고 하는데, 흐트러진 머리와 옷 매무새, 퉁퉁 부은 몸과 푸르뎅뎅한 피부색까지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원죄 없이 태어난 천상의 여인을 이렇게 속되고 비천하게 그린 예는 미술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도8 카라바지오 <성모의 죽음>, 1606년
369x245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 그림역시 주문자에게 거절당했는데 그러나 카라바지오가 그린 신앙인들의 모습이 비천하다해서 그가 당시 카톨릭 교회의 이념을 왜곡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생존 당시 그를 따른 가난한 무리들을 상상한다면 아마 카라바지오의 그림이 오히려 성경에 더 가까운 전달일 것입니다. 이처럼 순진한 사람들에게 체험적으로 다가오는 종교를 강조하는 것은 당시 교회의 대중화를 추구하였던 반종교 개혁의 반영이기도 하였습니다.

 

 

동성애 성향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사소한 놀이 끝에 동료를 살해한 경력과 잦은 투옥 등 곡절 많은 생애를 살았던 카라바지오는 평생 제자를 두거나 일가를 이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도하였던 혁신은 이탈리아에서 많은 추종자를 낳았으며, 스페인, 프랑스, 플랑드르 등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래 보이는 프랑스의 지방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나,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지방의 혼트호스트 작품은 카라바지오 화풍이 전 유럽으로 속속들이 퍼져나갔음을 잘 보여줍니다.

 

도9 조르즈 드 라 투르
< 성 세바스티안을 돌보는 성녀 이렌느 >
1649년 경, 파리 루브르박물관
 
도10 혼트호스트 < 재판관 앞에 선 그리스도 >
 
 
 
 
 

카라바지오 화풍을 따랐던 이탈리아의 아르테미지나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년 경)는 여성화가라는 점과 작품이 그녀의 생애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성주의 미술사'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적장을 유인하여 목을 베는 유대의 여걸 유디트의 이야기는 잔혹한 그림을 선호하였던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졌습니다(도11). 그러나 억센 여자들의 손놀림과 화면을 뚫고 나오는 홀로페르네스의 반쯤 잘린 머리 때문에 젠틸레스키의 이 그림은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더욱 끔찍합니다. 이는 카라바지오의 유디트와 비교해 볼 때 더욱 분명한데, 젠틸레스키가 그린 여자들이 사건에 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도11,12). 아버지의 조수에게 추행 당했던 젠틸레스키의 생애와 이 그림이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질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화가들의 시선의 대상으로 재현된 유디트의 모습과 여성화가인 젠틸레스키의 유디트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도11 젠틸레스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
1612-21년, 199x162cm,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도12 카라바지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 1598년경
캔바스에 유채, 145x195 cm, 로마, 도리아 팜필리미술관
 
 
 
 

17세기는 스페인에서는 신비주의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리발타의 <예수의 품에 안긴 성 베르나르>(도13)는 종교적인 체험을 주로 다루었던 17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의 코탕의 작품과 같은 매우 사실적이며, 동시에 함축적인 정물화도 자주 그려졌습니다(도14).

 

도13 프란치스코 리발타
< 예수의 품에 안긴 성 베르나르 >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4 후안 산체스 코탕 < 정물 >, 1600년경, 69x85cm
샌디아고 박물관
 
 
 
 

그러나 흔히 17세기를 스페인 회화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놀라운 회화의 솜씨를 발휘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래의 <세비야의 물장수>(도15)는 그의 나이 스물살에 그려진 것입니다. 투박한 느낌을 주는 커다란 항아리와 헤진 망토를 입은 남자의 옆모습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이 그림은 화면 뒤쪽으로 인물들이 엇갈려 있습니다. 당시의 정물화들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던 점을 생각하면 그가 그린 큰 질그릇과 물컵, 그리고 작은 항아리도 역시 상징으로 보입니다. 세사람의 연배가 서로 다르다는 점, 그들이 서로 지그재그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생의 세 단계를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림의 의미가 어찌되었든지 놀라운 것은 벨라스케스가 젊은 나이에 이미 다양한 질감들을 묘사해내는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15 디에고 벨라스케스 < 세비야의 물장수 >
1623년, 106.7x81cm, 런던 웰링턴미술관
 
 
 
 
 

마드리드는 16세기 스페인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유럽 미술의 중심지의 하나로 부상하였습니다. 당시 펠리페 4세의 궁전에는 티치아노를 비롯한 수많은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루벤스와 같은 국제적인 화가도 이곳을 방문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왕실의 공적을 알리는 선전화나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며 화가로서의 입신을 이루었습니다.

왼쪽의 올리바 공작의 초상화는 성난 말 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귀족의 위풍당당함을 잘 묘사하였습니다(도16). 이러한 그림은 권력자들을 위엄 있고 매력 있게 보이도록 하는 전형적인 이미지 표현법이었으며, 벨라스케스로서는 왕실화가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한편으로 왕실의 노리개감이었던 난쟁이, 시종들 그리고 걸인들의 모습도 많이 남겼습니다(도17).

 

도16 벨라스케스 < 말을 탄 올리바 공작 >
1634년, 313x239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7 벨라스케스 < 난장이 발레카스 >
1642-45년, 107x83cm, 마드리드, 프라도박물관
 
 
 
 

벨라스케스의 작품에는 왕실 주문자를 만족시켜 영예를 얻고자 하는 공적인 화가로서의 희망과, 대상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화가의 시선이 공존합니다. 뒤늦게 로마의 교황청을 방문하여 제작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에서 벨라스케스의 이 두가지 시선을 교묘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도18).

 

도18 벨라스케스 < 교황 이노센트 10세 >
1650년, 캔바스에 유채, 139.7x115cm
로마 도리아 팜필리아 미술관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회화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보다도 붓의 자유로운 흐름과 물감의 흔적을 통해 얻어지는 생생함일 것입니다.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은 한 권력자의 냉혹한 초상이지만, 동시에 붉은 빛의 공단과 사그락거리는 흰 레이스 대비가 눈부십니다. 아래 라스메니나스의 황녀의 빛나는 금발과 레이스를 표현한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도20), 벨라스케스는 단 몇번의 붓질로도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개의 보드라운 털, 그리고 화려한 의상의 반짝임을 표현해 낼 수 있었는데 이러한 시각적인 효과를 누구보다도 높이 샀던 이들은 근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이었습니다.

 

 

말년에 그려진 <시녀들>(도19)은 3m가 훌쩍 넘는 크기 뿐 아니라 흥미진진한 구성과 회화적인 솜씨로 인하여 이 화가의 화업을 결산하는 대표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도19, 20 21). 벨라스케스는 이렇게 큰 캔바스에 무엇을 그리고자 한 것일까요? 거울에 어슴프레 포즈를 취하고 선 왕과 왕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19 디에고 벨라스케스 < 라스메니나스 >
1656년, 318x276cm, 마드리드 프라도박물관
 
 
 
도20 벨라스케스 < 라스메니나스 > 부분
 
 
 
 
도21 벨라스케스 < 라스메니나스 > 부분
화가의 초상
 
 
 
 

그러나 어쩌면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화가 자신일지 모릅니다(도21). 그는 자신을 이젤을 당당히 들고선 화가의 모습으로, 동시에 가슴에 붉은 기사훈장이 선명한 귀족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도21). 그는 이제 장이가 아닌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 그림은 궁정화가로서 성공한, 자의식이 강한 화가가 자기 세계를 자랑스럽게 반추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17세기 로마에서 시작된 카라바지오의 회화는 인접한 카톨릭 지역이었던 스페인은 물론이고 플랑드르 회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도 카라바지오식의 명암대비법이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17세기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두 걸출한 화가 카라바지오와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대가다운 솜씨와 창조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에서 절대적인 종교와 권력 이면의 어두운 부분이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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