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신교의 도전으로 위기에 처했던 카톨릭 세계(지도)는 스스로 교회의 부패를 정화하고 새로운 교회체제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러한 반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로마는 다시 카톨릭세계의 중심이 되었으며, 교황의 권위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막강해졌습니다. 더 나아가 카톨릭 교회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미술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로마에 세워진 일제수교회는 하느님의 군대를 자처하였던 예수회의 본산으로, 반종교 개혁의 이념이 고스란히 적용된 새로운 형식의 교회였습니다(도1).

 

도1 피에로 델라 포르타, 1575-1584년,
로마 일제수 교회 전면
 
 
 
 
 

일제수 교회는 외관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와 그 느낌이 달랐습니다(도2). 알베르티가 100여년 전에 만토바에 지었던 교회와 비교하여 봅시다(도3). 알베르티의 성 세바스티안 교회는 엄격하게 보이는데 비해서 일제수 교회는 한결 장엄한 느낌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코린트식 기둥과 벽주를 이중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위층에는 소용돌이 장식을 덧붙여 화려한 느낌과 움직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르네상스의 건축은 기본 구조를 반복하고 있는데 반해서 바로크의 건축물의 여러 부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도2 피에로 델라 포르타, 1575-1584년, 로마 일제수 교회전면
 
 
 
도3 알베르티, 성 세바스티안 교회, 만토바
 
 
 
 
 

교회의 내부도 이전 시기와는 달라졌습니다. 17세기에 카톨릭 교회는 성직자와 신도들이 모여 하늘의 영광을 성대히 찬양하는 예식의 공간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신자들의 자리까지 탁 트인 일제수의 교회의 넓은 내부도 바로 이러한 목적에 알맞게 설계된 결과였습니다(도4). 안드레아 사치의 그림은 일제수 교회를 방문한 교황 우르반 8세 일행과 교회안에서 벌어지는 예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도5). 과장되게 많은 사람들이 그려진 것은 아마도 이 교회의 넓은 실내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을 강조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후에 그려진 가울리의 <그리스도의 승천>(12주 주제1, 도3)이 천장에 펼쳐진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실로 장대한 하느님의 영광을 마치 궁전같이 꾸민 것입니다.

 

도4 일제수 교회의 도면과 입면도
 
 
 
도5 안드레아 사치 < 교황 우르반 8세의 일제수 방문 >
1639-1641년, 캔바스에 유채
 
 
 
 

17세기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점차 이전시대의 엄격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무쌍하고 율동감 넘치는 교회를 고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건축가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였습니다. 그가 로마에 지은 작은 교회,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의 파사드는 들고 나는 곡선을 따라 출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도6, 7).

 
도6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64-67년,
로마 성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파사드
 
 
도7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64-67년
로마 성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파사드 옆면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 교회(도8)에서 보로미니는 더 기발한 디자인을 고안합니다. 교회의 내부는 직선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자유롭게 처리하였으며 천장에도 굴곡을 주어 독특한 모양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이처럼 바로크 교회건축은 풍부한 장식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미술의 무대였습니다(도8, 9, 10).

 

도8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42-44년(1646-65)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교회
 
 
도9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교회의 쿠폴라
 
 
 
도10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
교회의 랜턴
 
 
 
 

17세기 로마 카톨릭의 영광이 결집된 무대는 다름 아닌 카톨릭의 총본산,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이었습니다. 이곳은 기독교의 반석이 된 사도 베드로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으로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기독교인들의 순례지였습니다. 16세기까지 이곳은 크고 작은 교회 부속 건물들이 덧붙어진 볼품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기의 야심만만했던 교황들은 교회의 권위에 맞는 당당한 새 교회를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교황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 미켈란젤로에게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의뢰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6세기 말 한 화가가 만든 한동판화는 당시 베드로 교회의 광장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도11).

 

도11 도메니포 폰타나,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 1585-1590년, 인그레이빙
 
 
 
 
 
 

그러나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거듭난 것은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여러분은 17세기의 신심이 두터운 한 평범한 신도가 이곳을 순례하면서 느끼게 되는 종교적인 체험을 마음속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높게 선 오벨리스크를 이정표 삼아 산 안젤로 다리를 넘어 베르니니(Gianlorenzo Bernini: )의 열주에 들어설 때 아마 하느님이 내민 팔이 자신들을 영접하는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도12,13).

 

도12 로마 바티칸 대성당의 전경
 
 
 
도13 조반리 바티스타 팔다, 1667년
베르니니 성베드로 광장 열주를 위한 동판화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도움과 마데르노가 설계한 교회의 전면을 지나 교회 안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 멀리서 광채를 내뿜는 제단과 거대한 닫집, 발다키노를 보면서 천상의 권위를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체험을 위해서 베르니니는 조각과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편의 웅장한 드라마를 꾸미듯, 그렇게 교회를 장식하였습니다(도14, 15).

 

도.14 카를로 마데르노
1607-1626년, 로마 바티칸 대성당 정면
 
 
도15 조반리 바티스타 팔다, 1667년
성베드로 대성당 내부
베르니니 성베드로 광장 열주를 위한 동판화
 
 
 

베르니니는 17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탁월한 조각가이자, 교회 장식가였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의 코르나로 가족예배실 장식은 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곳입니다(도16). 청동 빛줄기를 배경으로 테레사 수녀는 신의 은총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종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수녀의 황홀함은 펄럭이는 옷자락을 타고 흐르는 빛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도17). 그리고 코르나로 가문의 사람들은 한편의 오페라를 구경하듯 제단에서 벌어지는 환상을 바라봅니다(도18). 그의 교회 장식이 신비한 체험을 중시하는 반종교개혁에 매우 알맞는 방식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베르니니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화려한 색깔의 대리석, 석회벽토, 청동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자유자재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16 베르니니 < 성녀 테레사의 환상>
1647-52년,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 교회
 
 
 
도17 베르니니 < 성녀 테레사의 환상 >
 
 
 
 
도18 베르니니, 코르나로 가문 사람들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교회
 
 
 
 
 

베르니니는 교회의 장식에서 뿐 아니라 단독 조각에서도 놀라운 기술을 발휘하여 역동적인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폴로와 다프네>(도19)는 신화속의 안타까운 사랑의 순간을 묘사합니다. 달리는 아폴로와 막 나무로 변해가는 다프네, 옷자락에서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동작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편 그는 매우 사실적인 묘사와 심리가 표출된 초상 조각들을 남겼는데 이는 이전 로마시대 초상조각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도 20). 그러나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을 포착하는 방식이나 옷주름, 머리카락을 동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전조각, 미술과는 다른 바로크 시대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도19 베르니니, <아폴로와 다프네>
1622-25년, 대리석, 높이 243cm
로마 보르게제 박물관
 
도20 베르니니 < 콘스탄차 보나넬리>
1636년경, 대리석, 높이 70cm
피렌체 국립 바르젤로 발물관
 
 
 

17세기 카톨릭 교회는 신교국가들의 성상타파에 대항이라도 하듯, 더욱 더 화려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교회를 장식하였습니다. 로마에서 이루어진 건축과 조각은 점차 하나의 국제적인 양식이 되어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에 환영처럼 우뚝 솟은 멜크 수도원은 그 화려함과 규모에 있어서 장관을 이룹니다(도 21, 22).

 

도21 야곱 프란타우어 뭉그나스트, 1702-38 년
도나우 강에서 바라본 멜크 베네딕투스 수도원
 
 
도22 야곱 프란타우어 뭉그나스트,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내부
 
 
 
 
 

또한 스페인에서는 그곳 특유의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토착적인 장식들이 더해져 기괴한 느낌마저 드는 채색 목조각들과 제단들이 앞다투어 제작되었습니다. 마치 실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스페인의 장인들은 목조조각에 사실적인 채색은 물론, 실제 옷을 만들어 입히기까지 하였습니다. 스페인의 반종교개혁 미술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으로 남미에 많은 유적들을 남기게 됩니다.

 

도23 페드로 룰단 < 십자가에서 내려짐 >
1670-72년, 세비야, 호스피탈 드 라 카리다드 제단
 
 
도24 페드로 데 메나 < 막달라 마리아 >
1664년, 채색 목조가, 높이 165cm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예에서 두드러지듯 17세기 바로크 교회미술은 지나치게 연극적이고 수사적이어서 과장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17세기 바로크 미술이 상당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의 힘과 열정에 힘입어 피어났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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