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막 어떤 화가와의 만남을 끝내고 오는 길인데,생이별한 것처럼 가슴이 서늘해요. 오랫동안 사귀다 헤어진 연인처럼…”
그림에세이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아트북스)의 작가 조정육(42)씨. 일상에서 겪은 개인사를 한폭의 동양화로 풀어낸 수필집에서 그는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고했든 생존하든 그 화가와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왜 그동안 나를 가슴으로 받아주질 않았소,왜 나를 답답한 벽속에 가둬놓고 마음을 열지 않았소”라고 말을 걸어오는 그림 이야기로 시작되는 에세이에는 한·중·일 대표 작가들과의 즐거우면서도 가슴 아픈 대화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글쓰기를 위해 불문과에 들어갔으나 그림에의 갈망으로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그의 친밀감 넘치는 문체가 재미있다.
그림 이야기는 그의 가족들에 얽힌 사연과 함께 전개된다. 아들의 글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노동을 만끽하는 김홍도의 ‘자리짜기’는 때묻은 흰고무신을 언제나 백자처럼 깨끗하게 씻어놓으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고,고개를 숙인채 외발로 서있는 새를 그린 팔대산인의 ‘팔팔조도’는 대수술을 받은 언니에게서 발견한 꿈틀거리는 희망을 대변한다.
한 여성 어묵장수의 이야기는 윤용의 ‘나물캐는 여인’으로 풀어내고,조희룡의 ‘매화서옥’으로 세상사 잊고 산촌에서 책을 읽는 여유로움을 꿈꾼다. 아이의 이빨이 엄마의 그것과 닮기는 했지만 똑같지는 않다는 ‘생활의 발견’을 명나라 예찬의 ‘용슬재도’와 동기창의 ‘추경산수도’,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강희언의 ‘인왕산도’를 사례로 전통과 모방의 문제를 거론한다.
한·중·일 초상화 비교도 의미심장하다. 에도시대에 그린 와타나베 가잔의 ‘다카미 센세키상’에선 일본의 힘이 느껴진다. 채용신의 ‘초상화’(1925)는 망해버린 나라의 울분이 담겨있고 중국 임웅의 1840년대 작품 ‘자화상’은 혼란과 분열의 시대를 상징한다. 부부간의 애틋한 연정은 김득신의 ‘파적도’로 묘사되고 사랑의 이별은 최북의 ‘공산무인도’처럼 쓸쓸하다.
“그림은 논리가 아니라 마음이 중요해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당시 사회에 관련된 자료를 정신없이 모았죠.” 전남대를 나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동양미술사를 공부한 뒤 대중적인 미술평론에 주력하는 그는 자료수집을 위해 발품을 아끼지 않는 노력파. ‘가을 풀잎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 ‘신선이 되고싶은 화가 장승업’ 등을 펴내기도 했다.
이광형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