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시슬리 (1839~1899)

 

 

 


르누아르, <시슬리 부부>


 


프랑스에서 활약한 영국의 화가. 파리 출생.    
               
      모네, 피사로와 비견되는 대표적인 인상파화가로, 평생을 프랑스에서 살아, 국적은 영국이지만 프랑스 화가로 통한다. 한때 부친의 권유로 영국으로 건너가 상업에도 종사했지만, 그림을 좋아하여 1862년 파리에 있는 C.글레르의 아뜰리에에 들어가, 거기서 C.모네, 르누아르 등과 친숙하게 지냈다.
     66년 살롱에 첫 입선하고, 70년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갔다.이 때부터 점차 초기의 쿠르베나 코로풍의 작풍을 청산하고, 자연을 외광(外光) 아래서 포착하는 밝은 화풍을 확립하였으며, 74년 이후는 인상파그룹전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인상파 중에서도 특출하게 순수한 풍경화가로서, 일 드 프랑스지방(파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을 대상으로, 물과 숲의 반짝임을 묘사한 많은 수작을 남겼다.대표작으로 《밤나무숲의 오솔길》(1867) 《아르장튀유의 길》《마를리항구의 만조》《루브시엔, 설경》 《홍수 속의 보트》등이 있다.


Avenue of Chestnut Trees 밤나무 숲의 오솔길

 

 


Flood at Port-Marly 마를리 항구의 만조

 

 


루브시엔 설경

 

   그는 1839년 파리에서 영국인의 부모밑에 태어난 영국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리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부유한 사업가로, 어린 시절 풍요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부유한 부모 덕분에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시슬리는 영국 런던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1860년 파리로 돌아올 때까지 사업을 배웠다고 한다.

   가계를 이어 받아 사업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62년에 글레르의 스튜디오에 들어가 거기서 모네, 바지유, 르누아르를 알게 되며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1864년 글레르가 은퇴할 때까지 그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연구를 계속하던 그들은, 모네가 글레르와 충돌을 일으키자 그 곳을 나와, 바티뇰의 바지유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작품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바지유, 바지유의 스튜디오

   

    틈만 나면 근처 숲으로 가서 이젤을 세운 그들은 서로의 작품과 미술에 대한 생각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훗날 미술계에 엄청난 태풍을 일으킨 인상주의적 기법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바지유의 소개로 당시 진보적 화가, 문인, 비평가들이 자주 모이던 카페 게르부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 시슬리는, 논쟁과 토론을 통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다잡아 나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다른 인상주의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수더분하고 차분한 시슬리는 이 카페에서 주로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는데, 마네와 드가, 모네와 르누아르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 그가 도맡아 중재를 해야 논쟁이 끝이 났다고 한다.

    시슬리의 前期 작품들은 Barbizon화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색조와 기법에 있어 Corot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1866년 Corot의 밑에서 수학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870년까지 그는 모네와 마찬가지로 짧고 빠른 기법을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모네와 뚜렷이 구별되는 기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바로 엷어지는 색조의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즉 모네가 빛의 변화에 따른 전체 분위기의 변화와 그에 따른 사물의 변화를 담아내는데 주력한 반면, 시슬리는 잎 전체의 움직임, 수면의 어른거리는 어렴풋한 빛, 구름으로 채워진 하늘의 조직을 그려내고자 노력한 것이다.


Bridge at Villeneuve-la-Garenne

 

 


Bridge at Hampton Court

 


Canal at St-Mammès
     

    그들의 이러한 차이점을 어떤 이들은 모네에 비해 시슬리가 덜 혁신적이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빛에 대한 인상의 차이와 자연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르부아의 단골로 유명한 작가이자 그들의 친구인 조지 무어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시슬리에겐 장식성이 적었다. 특히 그림표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색채 추구에 있어서는 모네의 뒤를 따르긴 하지만, 아마도 영국계여서인지 그에게 있어 자연은 화려한 외양 이상의 그 무엇이다. 물론 모네도 시슬리가 애정을 쏟던 교외에 이젤을 세운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기질은 명상적이라기보다는 늘 장식적이다. 그는 막다른 길목의 겸허함에 감명받지 않으며, 그곳에서 수집한 비참한 생활상에 대한 감상을 화폭에 드러내는 일도 없다. 하지만 자연에 좀더 공감하는 시슬리는, 일상적인 틀에 박힌 모네의 경우보다 과장이 적긴 해도, 훨씬 뛰어난 작품을 종종 내놓는다. 즉, 시슬리가 모네보다 장식성이 적다고 할 수 있는 반면, 모네보다는 명상적이다.

       시슬리의 작품세계는 그가 살던 파리 서부의 강변마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특히 일 드 프랑스의 계절에 따른 미묘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을 사랑했다고 한다. 부지발과 마를리 르루아 사이를 따라 굽이쳐 흐르는 센강. 특히 그 지류의 이미지가 그의 그림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The Seine at Bougival  부지발의 센 강

 

 


Passerelle d'Argenteuil

    그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이 관심을 보였던 현대 도시풍경이나, 강가에서 즐겁게 노니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모습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자연의 풍경만을 그렸는데, 이것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던 드가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한 자연을 그려내기 위해 그는 특별히 부드럽고 따뜻한 초록색과 블루그린, 빛나는 노랑, 밝은 파랑들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의 캔버스는 그의 고조된 감수성이 가득 채워져 환상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1870년부터 71년까지 프러시아전쟁이 터져, 런던으로 모네와 함께 도피해있던 그는 그곳에서 그의 인생에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한 사람을 만난다. 그의 이름은 폴 뒤랑-뤼엘로 프랑스의 화상이었다. 당시로서는 거의 가치가 없던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을 사고 팔던 그는, 런던에서 모네를 먼저 알게 되고, 다음으로 시슬리와 피사로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1871년 전쟁이 막을 내리고, 다시 작품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시슬리는 파리로 돌아왔지만, 한 가지 슬픈 소식이 있었으니, 그의 가족의 재산이 거의 유실되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1872년 그의 아버지가 파산하고 사망하자, 그는 그때부터 재정적인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급속히 궁핍함으로 빠져들던 그는 결국 자신의 그림을 가계를 위하여 헐값에 내다 팔게 되는데, 한 점당 50FF이 채 되지 않는 가격이었다.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던 중에 파리에서는 1874년 르누아르의 감독 하에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고, 시슬리도 그 전시회에 참가하게 되지만, 결과는 그의 생활을 더욱 암담하게 할 뿐이었다. 그의 그림은 관람객들에게 호응을 얻지도, 팔리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꾸려나가야 했고, 결국 더 헐값에 자신의 작품을 팔게 되는데, 이 때 루소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 그린 사본과 자신의 그림을 고작 25∼30FF에 내다 팔게 된다. 처음에 후원자가 되주었던 뒤랑-뤼엘도 이 당시는 전쟁 후로 나라가 어수선해 재정적 곤란을 겪고 있어서 그를 도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이 당시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시슬리 뿐만이 아니었다. 시슬리를 포함한 많은 인상주의가들이 받아들여지기 힘든 급진적 스타일의 작품을 포기해야 할 압박에 처하였다. 많은 화가들이 결국 그들의 기법을 포기했으나, 시슬리는 예외였다. 그는 굶어 죽을 지언정 자신의 예술과 미학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그는 물가가 파리보다 저렴한 시골로 이사를 갈지언정, 그의 기법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가 날짜를 적지 않고 친구에게 보낸 1880년경의 편지에서 미술과 풍경화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미술가가 자신의 미학에 대해 끄적대려니 쑥스럽군. 이론에 몰두하는 데 대해 터너가 느꼈던 혐오감을 나 또한 느끼고 있네. 붓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걸작을 창조하기보다는 걸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 아닌가.
자네도 알다시피 회화의 매력에는 여러 면이 있지. 주제나 모티프는 언제나 단순한 방식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보네, 감상자가 쉽게 이해하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야. 불필요한 세부를 제거함으로써 감상자는 미술가가 지시해 놓은 길을 따라가게 되지. 그리고 처음부터 미술가가 느꼈던 바를 인지하게 되고. 모든 그림은 미술가가 사랑에 빠진 장소를 보여준다네. 코로와 용킨트의 작품이 비할 데 없는 매력을 발하는 것도 바로 다름아닌 이런 이유에서야.

화폭의 생동감은 회화에서 가장 큰 난제에 속하지. 미술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분명 진정한 미술가라면 꼭 해내야 할 의무라네. 형태, 색채, 표면, 모두 이 목표에 부합시켜야 해. 미술가가 받은 인상이야말로 생명을 부여하는 요소지. 또 감상자가 자신의 인상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도록도 해주고.숙달된 기량이 있어야 하는 건 확실하지만, 생동감이 최고조에 달한 화폭에서는 미술가의 감흥이란 본래 그대로 감상자에게 전해지기 마련이라네.

내가 그림에서 표면의 변주를 즐겨 시도한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겠지. 관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이 옳다고 믿네. 특히 빛의 효과에 있어선 말이야. 햇빛은 풍경의 일부를 부드럽게 감싸는 동시에 음영 또한 극명하게 부각시키기 때문이지. 자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빛의 효과는 화폭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제시되어야만 해.

사물은 특정한 맥락 속에서 묘사되어야 하고, 자연에서처럼 특히 빛에 흠뻑 물들여져야 하지. 앞으로 이루어야 할 진보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을 게야. 그 수단은 하늘이 될 테고(하늘은 그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네), 하늘은 연속면을 통해 깊이감을 부여할 뿐 아니라(왜냐하면 하늘은 대지처럼 면을 갖고 있으므로) 형태와 전체효과 또는 구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동세를 부여하거든......
풍경화의 이런 면을 강조한 것은 자네가, 내가 몰두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이해했으면 해서였네.
[추신] 나는 항상 하늘에서부터 그림을 시작한다네...

 

       프랑스의 정치경제가 안정되어 가면서 가난했던 시슬리에게도 안도의 한숨을 돌릴 기회가 돌아왔는데, M. Murer라는 친절하고 그림을 사랑하는 화상을 만난 것과 뒤랑-루엘의 재정난이 해소된 것이었다. Murer와 뒤랑-루엘의 관대함이 없었다면, 아마 시슬리는 굶어 죽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1880년대 이후 프랑스 남부지역인 Moret-sur-Loing부근에서 그린, 그의 후기작품들은 전기와 약간 다른데, 거기에는 자신만의 기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한 그의 흔적이 역력히 나타난다. 자연 속에서만 평생 살았던 그는 말년에 약간 염세주의적 성격을 갖게 되는데, 이로 인해 평생지기인 모네와도 멀어지고 뒤랑-루엘과의 관계도 깨어지게 된다.


Moret-sur-Loing

 

 


Provencher's Mill at Moret

 

 


The Church at Moret

     죽기 직전, 시슬리는 명성을 얻게 되지만, 1899년 6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에게 이 명성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주가는 급격히 치솟게 되고, 1900년에 열렸던 만국박람회에서는 그의 작품이 프랑스를 대표하게 된다고 한다.

 

 


Garden Path in Louveciennes

 

 


Lane near a Small Town

 

 


Argenteuil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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