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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든 발 12시 30분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77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평점 :
1. 크로프츠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는 추리 소설사에서 대단히 독특한 입지를 갖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리얼리즘 미스테리'라고 불리우는 작풍을 개척하였다. 그리고 과문의 소치일지는 모르지만 그의 이러한 작품 경향은 추리 소설사에서 전무후무한 독보적인 것이다.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같은 작가들도 각자의 특성이 있겠지만 형태와 전개에 있어서 적어도 나는 아직 크로프츠처럼 독창적인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를 보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아주 '유니크'한 작가이다. 그의 소설에서는 천재적인 명탐정이나 기상천외한 트릭은 나오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 탐정들은 꿍꿍이를 감춰두고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사건의 진상을 줄줄 풀어대는 여느 명탐정들과는 달리 독자와 함께 묵묵하고 끈기있게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 하나 뒤쫓으며 범인을 추적한다. 마치 그림 조각을 하나 하나 맞추는 조각 퍼즐을 하는 것 처럼 여기에는 어떠한 요령이나 명쾌한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한조각 한조각의 퍼즐을 참을성 있게 맞추어 가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러한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감상할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크로프츠의 소설들이 '지루하다'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정말로 공들여 쓴 듯한 느낌이 뚝뚝 묻어나는 그의 작품들이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재미있다.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이런 크로프츠의 특장점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명작이 바로 <통>이다. 그의 처녀작이자 대표작인 <통>은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꼭, 반드시(다소 지루하더라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2. 도서(倒敍) 추리 소설 (inverted detective story)
도서 추리 소설이라함은 도치 서술형 추리 소설을 말한다. 즉, 범인이 먼저 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이어 완벽하게 저질러진 범죄라고 보여지는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보여주는 형태의 추리 소설을 말한다.
오스틴 프리먼에 의해 최초로 씌여진 도서 추리 미스테리는 추리 소설의 한 형태를 이루었으나 미스테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반전이 주는 묘미의 부족으로 인해 당대에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후 현대에 이르도록 크라임 스토리, 즉 범죄 심리 소설이라는 형태로 분화하여 많은 작품들이 씌여졌다. 프랜시스 아일즈의 <살의>를 선봉으로 하여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다수 작품들 및 최근의 많은 범죄 스릴러 소설 등이 크라임 스토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외에 익히 많은 분들이 잘 아실 유명한 TV 시리즈 물인 <형사 콜롬보>는 정통 도서 추리 형식으로 크게 성공한 미스테리 드라마이다.
3. 크로이든발 12시 30분
추리 소설 애호가들 사이에 흔히들 3대 도서 미스테리로 <살의>, <크로이든발 12시 30분>, <백모 살인사건>이 꼽힌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살의>는 범죄자의 비뚤어진 심리와 그로 인한 범행과 파멸을 묘사하는 범죄 심리물로 분류될 수 있다.
<백모 살인사건>은 범죄자의 어이없는 시행 착오를 다소 코믹하게 그리고 있는데, 다소 엉뚱한 반전까지 곁들여져서 블랙 코미디가 가미된 범죄 소설로 분류할 수 있겠다.
그리고, 크로프츠의 리얼리즘이 범인의 시각에서 치밀하게 기술되는 <크로이든발 12시 30분>이야말로 오스틴 프리먼에 의해 탄생한 도서 추리 소설의 가장 정통한 후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범인인 찰스는 <살의>나 <백모 살인사건>의 주인공들처럼 비뚤어진 심성의 소유자도 아니며, 치사하고 뻔뻔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함에 가까운 찰스가 왜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지, 그리고 그의 계획이 어떻게 준비되고 실행되는지를 다소 건조하지만 자세하고 속도감 있게 기술하고 있다. 작가의 각고의 노력으로 인해서인지 나는 찰스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고 그의 범행 이후의 초조감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크로프츠의 시리즈 탐정 캐릭터인 프렌치 경감이 탐정으로 등장하여 그의 범행을 차근 차근 뒤쫓을 때는 프렌치 경감이 얄밉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경감이 승리할테니까.
독자의 감정이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기상 천외한 트릭이나 끔찍하고 피냄새 나는 범죄는 도서 추리 소설의 형식상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책 뒤에 수록되어 있는 해설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존의 크로프츠의 작품 경향 상 평범한 범죄, 평범한 범인이 등장하는 이러한 형태의 정통 도서 추리 소설이야 말로 크로프츠와 어울리는 장르이며 작가 자신도 한번은 꼭 써보고 싶었던 소재였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도서 미스테리 중 역대 최고작이라고 평가하는, 꼭 한 번은 써보고 싶었던 소재를 써내려간 작가의 신명남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