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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롤러 코스터나 바이킹 같은 놀이기구에 전혀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다(번지 점프도 한번에 해냈다). 공포 영화도 즐기지는 않지만 곧잘 본다. 특히 책을 읽고 공포심을 느끼는 일은 거의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무섭게 읽었다는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도 재미있게 읽었을지언정 전혀 무섭지 않았다. - <검은집>이 무섭냐 무섭지 않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취향의 탓이리라. 그러나 <검은집>이 재밌고 뛰어난 작품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 나의 활자적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겠다.
그런 내가 유독 몸서리치며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혹은 짐승)의 몸에 난 상처다. 차라리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건 심상하지만 자상(刺傷) 등에 의해 벌어진 상처같은 디테일한 이미지는 내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상처로 일그러진 환부를 보는 일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다. 기리노 나츠오는 문자를 통해 내게 이런 느낌을 주는 작가다.
<아웃>, <그로테스크>. 아직 두 편의 소설을 읽은 것이 전부이지만 작가의 소설은 마치 살점이 벌어지거나 곪아 터져있는 환부를 들여다 보는 느낌을 준다. 기리노 나츠오가 그리는 세상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주변의 일상이다. 그러나 그 속은 온통 어둡고 음울하며, 한가닥 빛도 없는 디스토피아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물론 독자마저도 '기리노 나츠오 월드'안에서는 결코 탈출구가 없는 절망만을 느낄 뿐이다. 괴롭기 짝이 없는 현실이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독자인 나는 책장에서 눈을 돌리면 이 지옥같은 현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로테스크>는 집요하게 '여성'에 대해 천착해 온 작가의 어떤 정점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가두어 두기엔 이 소설이 갖고 있는 무게와 그 함의가 너무나 깊어 보인다. 일본 사회와 현대 사회가 여성에 대해 어떤 모습을 취해왔는지, 그리고 이에 맞서서 일본의, 현대의 여성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문자 그대로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끔찍하기만 하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라는 장탄식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남자인 내가 봐도 이정도인데, 당사자인 여성에게 이 소설은 어떻게 다가올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반감을 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망량의 상자>가 판타지적 처절함,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이 마초적, 느와르적 처절함이라면, <그로테스크>는 여성주의적, 현실적 처절함이다. 가장 일상과 가까운 내용이기에 그 처절함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상당한 분량과 무거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필력은 여전하다. 작가는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로 독자를 사로잡는 것이 아닌, 어둡고 끔찍한 이야기로도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렇지 않아도 눅눅하고 음습한 장마철에, 책장을 덮고 나니 가즈에와 유리코, 미쓰루, 그리고 '나'. 이들 네 여성의 삶이 품어내는 처연한 아우라에 한동안 멍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