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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만 가지 죽는 방법 ㅣ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평점 :
8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대도시 뉴욕에는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이 있다.
알콜 중독자 무면허 사립 탐정 매튜 스커더(매트)가 등장하는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그 특이한 제목 만큼이나 색다른 재미를 주는 소설이다.
알콜 중독에 의한 발작으로 입원했다가 갓 퇴원한 매트는 친구의 소개로 만나게 된 어느 금발의 창녀로부터 의뢰를 받는다. 포주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대신 부탁해 주라는 것이다. 필립 말로나 루 아처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인 매트는 자신의 궁핍한 상황과 적지 않은 의뢰비 때문에 내키지 않는 요청을 받아 들이는데...
1992년 에드거 상을 받은 <백정들의 미사>에 등장하는 -완전히 금주에 성공하고 있으며 여자친구인 일레인과 서로 많은 부분을 의지하며 지내는- 매트 스커더에 비하면 1982년에 발표된 당 작품에서의 매트는 훨씬 불안정한 상태이다. 술 때문에 병원신세를 졌다가 나온 이후 8일간 금주 하지만 다시 술에 손을 대고 재차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는 등 술의 유혹이 끊이지 않고 그를 괴롭힌다. 사건 해결을 위한 고민보다 술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도 이 작품의 독특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을 보고 있으면 마치 "사립탐정 매트 스커더의 금주 도전기"를 읽고 있는 듯도 하다.)
매트 스커더는 기존의 하드보일드 탐정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자아는 끝없이 흔들리며 도시의 추악한 현실과 갖가지 비참한 죽음들은 그를 괴롭힌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지만 또 그는 전 인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에서 주은 텔레비전이 폭발해서 죽고, 어느 구경꾼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총이 발사되어 죽고, 개 때문에 싸움이 나서 이웃에 의해 죽고, 죽고, 죽고, 대도시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갖가지 사연으로 죽어가고 그 죽음 하나 하나에 매트는 괴로워 한다.
모든 사람의 죽음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나는 전 인류와 연결되어 있기에. 어떤 남자의 죽음이건 어떤 여자의 죽음이건 그 사이에 있는 죽음이건, 그것이 나를 우울하게 하는가? 그들이 정말로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p.409)
말로나 아처 역시 고독한 도시의 사냥꾼이지만 그들은 결코 외로워 하거나 하진 않는다. 그들도 때로는 지치거나 힘들어 할 때가 있지만 근본적인 내면은 강철같은 인간이지 않는가. 그러나 매트는 외로움과 과거에 대한 회한, 자책으로 말미암아 알콜 중독증에 걸린 연약한 사람이다.
너무 배고프거나 화나거나 외롭거나 피곤하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지 말라고들 말한다. 넷 중 어느 것이든 균형을 깨뜨려서 술을 입에 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 네 가지 조건이 모두 해당되는 것 같았다. (p.401)
그렇기에 온갖 범죄와 죽음이 난무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매트의 주변 인물들은 따뜻한 사람들이다. 경찰들도 진심으로 그에게 힘을 보태주고, 금주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뒷골목의 창녀나 포주들도 그에게는 소중하고 훌륭한 이웃이다.
2002년에 조사된 20세기의 하드보일드 Top 100 List에서 이 책의 주인공 매튜 스커더는 당당 5위를 차지하고 있다. 필립 말로, 샘 스페이드, 콘티넨탈 옵, 루 아처, 그리고 그 다음 자리에 매트 스커더가 있다.(트래비스 맥기가 7위, 마이크 해머가 12위에 랭크해 있는 걸로 미루어 그의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등장하는 장편을 기껏해야 두 편 읽은 것이 전부이지만 개인적으로 5위라는 고(高)순위가 충분히 수긍할 만한 위치라고 생각될 만큼 그는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매튜 스커더 시리즈의 초기 작에 해당한다(시리즈의 다섯번 째 작품이며, 올해 16편째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백정들의 미사>(시리즈 아홉번 째 작품)에서 매트의 훌륭한 반려자(?)로의 역할을 하는 여자친구 일레인은 잠깐 등장할 뿐이다. 단지 매트의 경찰 시절 도움을 주고 받았던 매춘부로, 아직은 단순한 친구관계에 지나지 않는 사이이다.(결국 둘은 결혼하게 된다고 한다. 이들의 로맨스는 로렌스 샌더스의 <앤더슨의 테이프>를 문득 떠올리게 한다) 또한 친밀한 관계의 경찰인 북부서의 더킨 형사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로렌스 블록은 80년 대 이후 미국 미스터리계의 최고 작가라 불리울 만한 수상 경력과 인기를 가진 작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장편이 단 두 편 뿐이라는 것이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다. 뒤이은 다른 작품들의 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