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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 자신의 편견이 허상을 만들어 나를 가둔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일은 참 어렵다. 공지영 소설은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데, 게다가 90년대 뜬 작가들의 특성 자의식 과잉, 쿨한 척하기를 넘어 거의 시니컬한 시선(자기의 타자화? 그러면 고통도 덜하긴 하더라만)도 덜하고(덜하다기보다 공지영 소설은 작가의 나이에 비해 매우 80년대적 정서가 강하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아니야아니야, 공지영은 진짜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걸까.
출판사들이 공지영이나 최영미나, 미모가 되는 작가들의 사진을 크게 띠우면서 광고 작전을 폈던 것도 그들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드는데 엄청나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그들 작품의 무게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괜찮은 출판사나 힘있는 평론가들을 만나지 못해 묻혀버리고 마는가 말이다. 실없는 생각이지만 더 예뻤다면, 창비를 만났다면 떴을 소설가나 시인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다. 어쩌면 공지영은 그가 젊은 시절 혐오했던 바로 그 '자본의 논리'의 덕을 본 건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나로 하여금 자꾸만 공지영을 멀리 하게 했다. 한편 그것은 매력 있는 여자를 여자들이 싫어하는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피식 웃기도 한다. 그녀가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었고 여성지가 좋아할만한 삶의 이력을 가진 여자가 아니고 일찌기 주목을 받은 여류작가가 아니고 좀 못생긴 작가였으면 나는 그녀를 좋아했을까?
아니 따져 보니 '봉순이 언니'를 제외하고 나는 거의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 아주 재밌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사실은 매우매우 공감하면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안 읽는다고 버티다가 아니지, 의무적으로라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손에 쥐었다. 역시나 재미있고, 또 감동적이다.
영화화되면서, 사형제 폐지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주장'을 하고자 이 소설을 썼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다. 만약 그런 주장이라면 윤수처럼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사람말고 정말 죄질이 나쁜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어야 했다. 잘 생기지도 않았고 동생을 위해 헌신하지도 않았던 말하자면 윤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15년형만 받고 도망가 버린 '그놈' 같은 사람을 설정해서, 이렇게 밑바닥밑바닥 인간이지만 그래도 그가 그토록 인간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의, 학교의 부모의 책임임을 강조하고, 사형 직전 그 짐승같은 이가 회복해낸 인간성을 이보란 듯이 증거물로 들이밀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 치열한 인간탐구, 제대로 사형제 폐지론을 담은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형수와 상처받은 상담자는 또한 자본의 논리에 매우 잘 부합하는 상차림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엄마'에 대해 생각했다. 윤정은 강간을 당했기 때문에 상처받은 게 아니라 엄마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위무받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윤수 또한 그러했다. 네살 아이를 때려죽인 열살난 여자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온 그 엄마의 태연함은 아이의 영혼을 유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엄마라는 존재는 참 힘들고 무겁다. 소설적 설정으로 필요했기에 그토론 그악하게 그려졌지만 윤정의 엄마는 딸을 사랑하지 않은 거였을까 과연? 집안의 체면과 허영 때문에 딸의 상처를 덮어버릴 수 있는 엄마로 그려졌지만 꼭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많은 엄마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거나 상처를 준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학교에 오는 엄마들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기적이기도 하고 무지하기도 하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특수한 경우 잘못된 운명 속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보다 자기자신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삶의 질곡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다. 아니 거의 없다.
다만, 잘못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은 잘못된다. 그리고 그 모두가 엄마의 잘못만은 아니다. 엄마는 최후의 보루여야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족한 엄마를 만나도 자기만의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극복한다. 그리고, 엄마가 힘겨워할 때 아빠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둘이 같이 잘 해나가라고 어린 남녀는 '결혼'이란 걸 해서 서로 시행착오도 겪고 쩔쩔매기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 아닌가. 가끔, 전쟁통에 살았다면, 내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었다면, 남편이 없거나 무능했다면, 나는 몸을 팔아서라도 아이들 입에 들어갈 것을 구해오지 않았을까 하는 극단적인 상상을 해보면서, 내 엄마의 헌신을 생각하면서 엄마란 참으로 근원적인 어떤 존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엄마들이 행복하고 똑똑하면 아이들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상처받는 엄마들이 줄어들면, 상처받는 아이들도 줄어들지 않을까...
또, 나는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많은 '상처받은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부족한 엄마, 아픈 엄마, 이기적인 엄마들이 그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주지 않아서, 아니, 오히려 상처를 줘서 프게 된 이 아이들을 나는 교사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 윤수가, 비록 엄마도 그랬고 아버지도 그랬지만 모니카 수녀같은 사람을 학교에서나 보육원에서 만났다면 달랐지 않았을까. 나의 학교 아이들에게 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는 제 2의 부모이다. 잘 자라고 있는 행복한 아이들에게도 그러해야 하지만 집에서 상처받고, 그나마 학교에 와서 친구들이랑 뒹구는 게 그나마 위안인 아이들에게 교사는 부모가 되어 주어야 한다. '최후의'까지는 아니어도 그들을 지켜주는 '보루'가 되어 주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무거운 일인데 '아이'들을 사랑하며 키우는 일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받은 과제이다. 이 무거움, 자의식의 늪에서 혼자 종알거리는 소설들보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과 고함과 부들부들 떨림으로 가득찼던 이소설이, 아직은 뭔가 그야말로 2프로 부족한 듯한, 버리지 못한 허위의식이 있는 듯이 보이는 이 소설이 그래도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후기에 등장한, 여자 죄수들 중 '공지영 싫어요' 했다가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아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했다는 그이, 어쩐지 나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웃었다. 작가가 어떤 비난 받을 만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대도 이만큼 재능있는 사람이 이만큼 고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하고 고맙다. 공지영씨, 열심히 삽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