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새의 선물’이 그립다.

문학의 상업성을 생각한다. 문학은 가난하고 겸손하기만 해야 하는 거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마케팅 잘 해서 정말 좋은 작품이 잘 팔리게 해야지 문학(책)은 늘 점잖은 척 팔짱을 끼고는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품위 있는 독자라면 와서 읽든지 말든지 뭐... 이런 태도는 이제 버려야 하는 거니까 어차피 자본의 세상에서 그나마 사람들의 ‘인간성’을 지키는데 문학이 해야할 몫이란 게 있는 거니까, 문학의 상업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화적 교양이 자본적 교양(?) 앞에서 고사되어 가는 요즘에는 더...

그렇다. 그렇긴 하지만 역시 문학이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어 (좋은 작품인데도 안 팔리는 안타까움을 넘어) 진정한 값어치보다 과대포장되는 건 역시 좋은 일이 아니다.

은희경의 작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읽고 나니 그토록 선전할 만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알라딘 홈피 상단의 배너가 불편하다.

창비 출판사를 아직 좋아한다. 옛애인 같은 느낌이다. 지금껏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련히 남아있는 그리움,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그 면모를 나이 들어서도 아직 간직하고 있기는 바라는, 젊은 날에 대한 경의로서의 추억... 창비에게 80년대의 창비 정신이 아직 남아있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은 출판사’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때 애인이었으니까’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은희경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나쁘진 않은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가 있지도 않았고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공감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이전 것들이 나름 쿨하면서도 낡은 한옥의 어두운 퇴마루를 비추는 노란 가로등불같은 정서가 있었다면) 매우 진보했다. 현대적이란 느낌이랄까. 그런데 다 읽고 나서, 그래서? 그게 뭐? 이런 느낌이 자꾸 드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자랄 때 구세대에 비해 많이 자유로워진 사고를 지니고 컸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의미있게 살기’에 대한 깊은 책임감의 세대이기도 하다. 그저 재미있는 것, 그저 참신한 것, 우리에게 그런 것에 점수를 줄만한 정신적 여유는 없는 것이다. 가끔 서구의 독특한 예술가들이 ‘왜 이런 시도를 하셨습니까?’ 하고 질문하면 “재밌잖아요”라고 대답할 때, 와, 멋지다, 라고 생각은 할지언정 우리라면 그저 ‘재미있어서’ 어떤 일을 구상하고 실천하긴 어렵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가?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만한? 거기에 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에 재미가 더해질 때 높이높이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의 선물이 그립다.

은희경의 새 작품들은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 내용에 비해 헐거운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릴케의 시를 제목으로 삼고 싶었다는데 그 내용이 바로 그 느낌이라고 생각했나? 주인공은 도대체 왜 살이 빼고 싶었다는 것인가? 아버지를 이유로 대고 있지만 오래 헤어졌던 아버지에게 좋은(나쁜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를 남기고 싶어 살을 빼려한다는 데에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감정을 잘 절제해서라고? 그래, 이 단편집의 등장인물들은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슬프다’라고 말해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어느 독립영화의 화면에서 내레이션은 동수는 그 일로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라고 문어체로 읽지만 영화배우는 그냥 무심하고 뚱한 얼굴로 달동네 계단을 걸어올라 가고 있는 장면을 보듯이, 내면과 대사는(설명일 수도 있고)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

삶의 때를 묻힐 대로 묻힌 주인공은 15년 전 기억으로 되돌아가 잊었던 순수 따위를 다시 기억하는가? 버린 줄 알았던 존재감 희미한 원고와 정체 불분명한 이메일을 통해? 구질구질한 일상을 그린 듯 보일 수도 있는 홍상수 감독 같은 소설에 ‘유리가가린의 푸른 별’이란 장선우 감독 같은 제목이 왜 붙었을까, 아직도 별은 순수라고 말하고 싶을 것일까...

은희경 작품에서는 성별이 보이질 않는다. 그가 작품 속에서 늘어놓는 (때론 작품과 별 무관하거나 과잉된, 박학다식을 자랑하는 듯한) 지식과 정보들은 중성적이거나 남성취향적인 것들이 많고 동화 이야기가 열거되는 ‘날씨와 생활’도 화자인 ‘소녀’에게서 여성성이 탈색되어 인형을 보는 느낌이 든다. (수금원은 매트릭스의 스미스 같은, 무성적이고 탈인간적인 느낌마저 든다) ‘고독의 발견’에 나오는 난쟁이 여자에게도 자기 자신에게 거리감을 둔 사람의 정서분리-역시 인형을 보는 듯한- 가 느껴진다.

아, 그러고 보니 내 것과 닮진 않았지만 마치 꿈속의 장면인 듯 편집된 영화의 장면인 듯, 현실과의 개연성에서 난감한 장면들이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 있다. 그렇다고 현대인은 고독하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진 않다. 열심히 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고발도 주장도 아니다. 소설을 이렇게 쓸 수 있다는 시도라 할 만큼 낯설지는 않다. 그럼 뭔가?

해설을 쓴 신형철의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표현, ‘은희경은 장르다’. 남다르다, 특이하다는 면에서? 그래도 나는 ‘새의 선물’이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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