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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대의 4050 학급살림 이야기 ㅣ 지혜로운 교사 8
이상대 지음 / 우리교육 / 2009년 3월
평점 :
사실 나는 필자인 이상대 선생과 면식이 있다.
15년 전쯤 5월 어느 날, 내가 알던 출판사 사장이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나와 선생을 서로 인사하게 해주었다. "서로, 스승의 날 선물이야." 라면서. 물론 교사 출신인 그 사장님은 스승의 날 = 교사의 날로 순치해서, 교사들인 너희들에게 서로서로를 선물로 소개해 준다는 의미였다. 서로 선물이라고는 하지만, 이상대 선생보다 8살 쯤 아래인 나에게야말로 좋은 선배를 선물로 소개받는 감사한 자리였다.
이상대 선생은 자그마한 체구에 참으로 소박하고 귀엽게 생기셨다. 저런 외모라면 학기초 담임과의 첫 대면의 자리에서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고도 남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의 긴장을 확 풀어버리고 호감을 주기에 충분할 만큼 좋은 인상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조금도, 책잡히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나, 잘 보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긴장을 갖지 않게 한다. 그래서 이 양반을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자주 본 것은 아니다. 여태 얼굴 뵌 것은 다 합해 봐야 다섯 손가락을 꼽을까 말까인데, 그럼에도 같은 국어교사로서 볼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하는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당신 입으로 내가 뭐 잘했소, 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교사로서의 그에 대해 아는 것들은 몇 마디 말들에서 풍기는 교사로서의 풍미, 그리고 그가 써온 글들에서 온다.
나는 사실 이런 학급운영 방법론보다 그의 수필을 기다렸다. 우리교육의 편집장이기도 했고 이 출판사의 여러 저서들의 필자이기도 한 선생의 수필집을 우리교육이 얼른 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나온 '빛깔이 있는 학급운영'의 꼭지 마디마디에 썼던 여는 글 때문이었다. '교육'은 대개 정책 속에 있거나 신문 속에 있거나, 그보다 좀 실체를 명확히 할 것 같으면 먼지 냄새가 많이 나는 교실 속에 있다. 그런데 이상대 선생의 글을 보면, 교육이 문학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아름다움, 이것이 문학의 이중적이면서도 동전의 양면처럼 필수적인 요소들이라면 정말 아이들 냄새가 나면서도 그것을 그악스럽지 않게 아름답게 정말 따뜻하게 그려낼 수 있는 문학작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그런 작품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참으로 미약한 것도 사실인데, 나는 이상대 선생의 글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교단수필이 아니어서 좀 아쉽긴 하지만 이 책 '이상대의 4050 학급살림 이야기'도 단지 방법론적인 실용서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가 만든 학급문집의 아무 쪽수를 펼쳐보는 듯한 재미와 정감이 묻어나는 게, 꼭 인간 이상대 그대로다. 책과 사람이 똑같다, 이게 쉬운 일인가? 글이란 게 아무래도 영혼의 과시이고 화장이기 쉽지, 아무리 겸손을 가장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 물론 좋은 작가일수록 그에 근접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맑은 영혼을 글로 논하면서 인세를 챙기고 팬 관리를 하는 허명의 글쟁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상대 선생의 책은 내가 아는 인간 이상대, 교사 이상대와 똑같다.
나는 몇몇 동료 교사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하지만 이 조그만 책은 아무에게나 선물할 책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가 그 작은 눈으로 허허실실 웃으며 따뜻하게 아이들을 바라보듯, 아이들을 다 품고 가는 듯한 학급운영 방법은 사실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행정업무에 치일 대로 치이고 아이들이 사고치지 않고 무사히 한 해를 마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이 땅의 평범한 교사들에게 이상대 선생처럼, 수레를 움직이는 바큇살이 아니라 그 사이의 빈 공간처럼, 항아리를 만드는 옹골찬 벽이나 바닥이 아니라 그 비어있는 여유와 열린 입구처럼 한없이 열린 마음으로 아이들을 넓게 품고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 양반이 온갖 이벤트성 학급행사로 끊임없이 아이들과 자신을 후달구는 그런 학급운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 핵심은, 끊임없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 끊임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는 것이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보려고 아프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씨앗을 심고 싹이 텄을 때 급한 마음에서 그것을 잡아당긴다고 쑥쑥 잘 자라지 않는다는 것, 지겨울 만큼 기다려야 그 싹은 조금씩 자라나고, 그것이 열매를 맺을 때쯤이면 처음 씨앗을 심었던 사람은 그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럼에도 그 잘 자란 놈을 두고 내가 씨앗을 심었네, 싹을 틔웠네, 10센티미터만큼 크게 했네, 공치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교육이란 것을. 그것을 제대로 심득(心得)하지 않은 이들이 학교를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앉아서 이러니 저러니 하며 교육을 망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이상대 선생같은 이들이 있어서 아이들을 주섬주섬 챙겨 함께 가고, 가는 길에 여기저기 딴 데를 기웃거리는 녀석들은 팔짱도 끼고 어깨동무도 하면서 함께 가고 있기에, 그나마 만신창이 교육에도 아직 희망은 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잘하고 못하고, 잘못하고 실수하고에 따라 버려도 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이들을 버려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이 부모이고 교사들이다. 그리고 학교다. 학교는 끝까지 아이들을 안고 가야 한다.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지 않고 교사들이 스스로 행복해 하면서 아이들을 품고 가는 방법을 이상대 선생이 가르쳐 준다. 물론, 노자의 도덕경은 수천 년 동안 수없이 읽히면서도 그 짧은 글을 이해하고 따라할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었듯이 이상대 선생이 아이들과 함께 가는 방법은 뭇 교사들에게 무슨 도사의 드높은 공력처럼 따라하기 쉽진 않을지 모른다. 그러면 그것 하나만 배우자. 수레를 움직이는 것이 바큇살이 아니라 살과 살 사이에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빈 공간이라는 것, 항아리에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은 그 안의 둥근 공간이라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