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나의 고전 읽기 9
김슬옹 지음, 신준식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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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리뷰들을 읽어보니, 우리 한글이 얼마나 훌륭한지, 세종대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새삼 깨달았다는 내용이 많다. 나는 이 '28자로 이룬 문자혁명..'이란 책이 잘 쓰여진 책임을 말하고 싶다. 

나는 중학교에서 20년 동안 국어를 가르쳐왔다. 작년에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자격을 획득했다. 안팎으로 더도덜도 없이 한국어 선생인 내게 이 책은 참 소중한 책이다. 아니, 20년 동안 가르치면서 한글과 한국어에 대해 알만큼 알지 않나요, 라고 묻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나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더 깊이있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중고등학교에서나 초중급 정도의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꼭 읽어야 할 책이다. 학술적이고 연구 위주의 성과물이라기보다 교양학문 정도의 수준이다. 그것은 필자인 김슬옹 선생이 청소년도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쓰고 싶어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깊이 있고 심오하고 아주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보다 괌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화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진 책이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분야나 목적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현학적이거나 어렵게 쓰여진 책이라고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것의 또다른 표현이다. 저자는 자신이 한글을 잘 연구한 학자이자 강단에서 실천적으로 훈민정음을 가르친 사람답게 군더더기도 없이 적확하면서도 진정성이 가득 담기게 글을 잘 썼다. 

이 책에 있는 내용들이 대체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더라도 - 가령 훈민정음이 아주 과학적으로 만든 문자라는 것- 그것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정리하느냐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준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그래픽으로서의 한글의 문자 미학과 조형의 과학성, 거기 담긴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상생성까지 한글의 완벽함에 감탄하게 된다. 보석을 품에 안고도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내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이란 생각이 든다. 한글의 과학성은 훈민정음 제자해에 이미 밝혀졌지만 현대에 와서 거꾸로 창제와 전파의 과정을 거스르면서 마치 비밀한 암호를 풀어가듯 흥미진진하게 밝혀졌다. 내가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가르칠 때 이와같은 흥미진진함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관련 내용을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충분하지 않아서 한두 시간 정도에 걸쳐 한글 생성원리와 조음원리를 설명하면 그 부족한 시간에도 아이들은 매우 놀라워하고 흥미있어 한다. 최근에는 휴대폰의 자판과 연결지어 그런 흥미를 더욱 북돋울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이 땅의 한국어 선생들이 부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 완벽함과 논리정연한 과학성 때문에 감탄했듯이 우리 아이들(학생들)도 한글의 아름다움에 빨려들어가게 잘 가르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공자나 관련된 사람이 아닌 경우 한글의 우수성과 애정을 논하면 '오바하는 거 아닌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 또는 뭐 그런지는 몰라도 난 관심없이, 이런 태도인 경우가 많다. 한글이 너무 우수하고 세종대왕이 너무 위대하고 우리 민족이 뛰어나고... 이런 논리를 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우수하면 우수한 대로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거기서 더도덜도 갈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소수밖에 안 돼 보이는 (한)국어 관련된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은 또 그만큼의 이유가 있다. 과장할 건 없지만 폄하해서도 안 되며 갖고 있는 가치가 묻혀서도 안 되는데 여지껏 한글은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했다. 아니 그 글자를 쓰는 주인인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제 모습을 드러내 본 적조차 없다. 그래서 그 소수의 사람들은 거품을 물고 목이 갈라져라 외치는 것이다. 한글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그 과정은 거의 투쟁이요 운동이나 다름없다.

이 책이 청소년이 읽기엔 쉽지 않다 하더라도 대학에서 교양으로나마 많이많이 읽혔으면 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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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대의 4050 학급살림 이야기 지혜로운 교사 8
이상대 지음 / 우리교육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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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필자인 이상대 선생과 면식이 있다. 

15년 전쯤 5월 어느 날, 내가 알던 출판사 사장이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나와 선생을 서로 인사하게 해주었다. "서로, 스승의 날 선물이야." 라면서. 물론 교사 출신인 그 사장님은 스승의 날 = 교사의 날로 순치해서, 교사들인 너희들에게 서로서로를 선물로 소개해 준다는 의미였다. 서로 선물이라고는 하지만, 이상대 선생보다 8살 쯤 아래인 나에게야말로 좋은 선배를 선물로 소개받는 감사한 자리였다. 

이상대 선생은 자그마한 체구에 참으로 소박하고 귀엽게 생기셨다. 저런 외모라면 학기초 담임과의 첫 대면의 자리에서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고도 남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의 긴장을 확 풀어버리고 호감을 주기에 충분할 만큼 좋은 인상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조금도, 책잡히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나, 잘 보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긴장을 갖지 않게 한다. 그래서 이 양반을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자주 본 것은 아니다. 여태 얼굴 뵌 것은 다 합해 봐야 다섯 손가락을 꼽을까 말까인데, 그럼에도 같은 국어교사로서 볼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하는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당신 입으로 내가 뭐 잘했소, 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교사로서의 그에 대해 아는 것들은 몇 마디 말들에서 풍기는 교사로서의 풍미, 그리고 그가 써온 글들에서 온다. 

나는 사실 이런 학급운영 방법론보다 그의 수필을 기다렸다. 우리교육의 편집장이기도 했고 이 출판사의 여러 저서들의 필자이기도 한 선생의 수필집을 우리교육이 얼른 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나온 '빛깔이 있는 학급운영'의 꼭지 마디마디에 썼던 여는 글 때문이었다. '교육'은 대개 정책 속에 있거나 신문 속에 있거나, 그보다 좀 실체를 명확히 할 것 같으면 먼지 냄새가 많이 나는 교실 속에 있다. 그런데 이상대 선생의 글을 보면, 교육이 문학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아름다움, 이것이 문학의 이중적이면서도 동전의 양면처럼 필수적인 요소들이라면 정말 아이들 냄새가 나면서도 그것을 그악스럽지 않게 아름답게 정말 따뜻하게 그려낼 수 있는 문학작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그런 작품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참으로 미약한 것도 사실인데, 나는 이상대 선생의 글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교단수필이 아니어서 좀 아쉽긴 하지만 이 책 '이상대의 4050 학급살림 이야기'도 단지 방법론적인 실용서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가 만든 학급문집의 아무 쪽수를 펼쳐보는 듯한 재미와 정감이 묻어나는 게, 꼭 인간 이상대 그대로다. 책과 사람이 똑같다, 이게 쉬운 일인가? 글이란 게 아무래도 영혼의 과시이고 화장이기 쉽지, 아무리 겸손을 가장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 물론 좋은 작가일수록 그에 근접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맑은 영혼을 글로 논하면서 인세를 챙기고 팬 관리를 하는 허명의 글쟁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상대 선생의 책은 내가 아는 인간 이상대, 교사 이상대와 똑같다. 

나는 몇몇 동료 교사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하지만 이 조그만 책은 아무에게나 선물할 책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가 그 작은 눈으로 허허실실 웃으며 따뜻하게 아이들을 바라보듯, 아이들을 다 품고 가는 듯한 학급운영 방법은 사실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행정업무에 치일 대로 치이고 아이들이 사고치지 않고 무사히 한 해를 마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이 땅의 평범한 교사들에게 이상대 선생처럼, 수레를 움직이는 바큇살이 아니라 그 사이의 빈 공간처럼, 항아리를 만드는 옹골찬 벽이나 바닥이 아니라 그 비어있는 여유와 열린 입구처럼 한없이 열린 마음으로 아이들을 넓게 품고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 양반이 온갖 이벤트성 학급행사로 끊임없이 아이들과 자신을 후달구는 그런 학급운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 핵심은, 끊임없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 끊임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는 것이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보려고 아프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씨앗을 심고 싹이 텄을 때 급한 마음에서 그것을 잡아당긴다고 쑥쑥 잘 자라지 않는다는 것, 지겨울 만큼 기다려야 그 싹은 조금씩 자라나고, 그것이 열매를 맺을 때쯤이면 처음 씨앗을 심었던 사람은 그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럼에도 그 잘 자란 놈을 두고 내가 씨앗을 심었네, 싹을 틔웠네, 10센티미터만큼 크게 했네, 공치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교육이란 것을. 그것을 제대로 심득(心得)하지 않은 이들이 학교를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앉아서 이러니 저러니 하며 교육을 망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이상대 선생같은 이들이 있어서 아이들을 주섬주섬 챙겨 함께 가고, 가는 길에 여기저기 딴 데를 기웃거리는 녀석들은 팔짱도 끼고 어깨동무도 하면서 함께 가고 있기에, 그나마 만신창이 교육에도 아직 희망은 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잘하고 못하고, 잘못하고 실수하고에 따라 버려도 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이들을 버려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이 부모이고 교사들이다. 그리고 학교다. 학교는 끝까지 아이들을 안고 가야 한다.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지 않고 교사들이 스스로 행복해 하면서 아이들을 품고 가는 방법을 이상대 선생이 가르쳐 준다. 물론, 노자의 도덕경은 수천 년 동안 수없이 읽히면서도 그 짧은 글을 이해하고 따라할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었듯이 이상대 선생이 아이들과 함께 가는 방법은 뭇 교사들에게 무슨 도사의 드높은 공력처럼 따라하기 쉽진 않을지 모른다. 그러면 그것 하나만 배우자. 수레를 움직이는 것이 바큇살이 아니라 살과 살 사이에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빈 공간이라는 것, 항아리에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은 그 안의 둥근 공간이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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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하버드에 오다 - 1세기 랍비의 지혜가 21세기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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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교사 독서토론회에서 이 책을 보기로 했다. 내가 이전 김규항의 '예수전'을 읽고 그 연장선에서 이 책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읽고 있노라 했더니 다른 회원들이 이 책을 다음 토론 대상으로 삼자고 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반응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치지만 교회나 성당을 열심히 다니는 이들이 잘 안 읽힌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이 잘못된 것도 아닌 것 같다. 원전을 읽지 않아서 하비 콕스 자신의 문장이 이런지 번역자가 번역을 잘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문장은 길지도 않고 현학적이지도 않고 자연스럽다. 번역서가 이 정도로 읽히는 일이 흔치 않아서 나는 역자가 누군지 다시 찾아보았을 정도다. 

일단, 하버드는 두뇌 중 두뇌, 미국뿐 아니라 세계 지성의 집합소나 다른 없는데 거기서 예수를 어떻게 가르쳤을까가 참 궁금했다. 천만 가지 예수, 즉 예수에 대한 해석이 세상에 있겠지만 최고의 대학에서는 어떻게 접근할까 궁금했다. 서문에서, 하버드 졸업 필수 요건에 '윤리적 사유'라는 제목의 과목을 이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지성을 앞서는 혹은 지성의  받침이 되는 '윤리적 사유', 학업 성취 때문에 인성교육도 민주시민 의식도 저버리거나 형식화하는 오늘날의 한국 교육기관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를 돌아봐야 할 대목이다.  

처음엔, 교과목으로서 예수를 가르친다면 굉장히 이성적이고 쿨하게 접근을 하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는 가슴 깊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에수를 깊이 사랑하면서 냉철하게 그를 언급하는 이를 만나기가 쉽지 않기에 그러한 시각, 서술방식도 참신했다. 또한 하비 콕스는 앞부분에서 매우 길게, 랍비 예수의 설교가 갖는 설화성, 즉 이야기로서의 예수 설화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런 접근은 참 재미있고 신선했다.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때론 지나친 직역 혹은 지나친 의역들 중에서 성경 속의 이야기들을 설화적 상상력으로 만나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얼핏 두루뭉술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오역의 논란에 휩싸이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화적 상상력', '현대인에게 부족한 이야기성'이 설득력 있는 것은 그만큼 성경과 예수의 행적, 그의 말씀에 대한 지나친 해석들이 권력을 획득하고 혹세무민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최후의 유혹'을 함께 읽고 있다. 제자 선호가 연습장 한 가득 베껴준 성경도 함께 읽고 있다. 이 모두를 다 읽고 나면 복음서부터 다시 읽으려 한다.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지만 예수를 만나고 싶은 열망이 있다. 그것이 체 게바라를 만나고 싶은 마음과 특별히 다른 게 아닐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재된, 영적 안정 혹은 영적 의구의 일환인지도 모르겠지만 자꾸 찾아 읽고 만나다 보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자꾸 예수를 궁금하게 여기게 했는지 알게 할지도 모르겠다.  

예수를 신앙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냉철하게 이 책을 읽고 싶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의 본질은 교회가 아닌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이었음을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책의 말미에 여러가지 모습이 있지만 나에게 예수는 '친구'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처럼, 내가 가장 힘겨울 때 예수가 내 곁에 친구로 서 계시다는 상상은 한없이 깊은 감동을 준다. 

나는 얼마 전 학업성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오늘날의 학교 분위기에 따라 학교 상담실을 진학홍보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교장은 상담부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진학상담부'란 이름으로 거듭나게 된 그 부서에서 상담은 주로 학업상담 중심이 되었다. 일탈학생, 부적응아에 대한 상담에서 학생 전체에 대한 상담으로, 라는 구호를 외치면 상담실을 진학(주로 방과후 수업을 전담하는 부서다.)부에 넘겨 준다.  교사들을 위한 상담연수를 기획하고 전교생이 테마별로 전일제 진로체험활동을 하게 하고  아이들이 따뜻하게 찾는 상담실을 만들려고 따뜻한 벽지를 새로 바르고 장욱진의 그림 액자를 만들어 걸면서 4년 동안 공들인 상담실을 새봄에 떠나야 한다. 

슬픈 겨울을 지나면서 친구인 예수를 언급하는 부분을 읽었다. 가슴은 한없이 시리고, 이럴 때 그 분이 곁에 있다면, 아니 어쩌면 믿음이 없는 내 곁에도 그는 와계실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일종의 강의록이었던 이 책을 여러가지 시각으로 읽었던 내게 결론은 가장 힘겨울 때, 가장 밑바닥일 때 만나는 예수로 끝난다. 저자는 전도를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 그는 감성적인 글을 쓴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눈물은, 닦고, 이 말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강의록으로서의 이 책, 가르치는 자로서의 하비 콕스 교수는 역시 가르치는 사람인 내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그는 예수를 강설하지 않았고 학생들이 생각하고 만나게 했다. 많은 토의와 과제들이 있었고 결론을 함부로 내리지 않았다. 또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학생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들을 놀라워하면서 바라본다. 20여년을 예수를 가르치면서, 새로 만나는 강의와 새 학생들에 대해 늘 감탄하는 그 자세, 그는 진정한 교사다. 한 강의를 마칠 때마다 산후 우울증 같은 것을 겪는다는 그, 새 학기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책들을 다시 살펴 보는 그, 결국 그 강의를 완전히 접고 나서 자기가 20년 동안 강의했던 강의실이며 흔적들을 되밟으며 가슴 아파하는 그는 진정한 교사다. 정말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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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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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중에, 자신이 어쩌다가 대한민국 여성이 닮고 싶은 여성으로 꼽히게 되었는지 의아하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비야 씨 말대로 돈을 많이 버나 권력이 있나... 도대체 무엇이 대한민국 여자들 특히 젊은 처자들의 가슴에 그이는 희망의 불씨를 지폈나. (어찌 보면 대기업 여회장이나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그 젊은 처자들의 별이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이 어두운 세상의 희망적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비야를 생각하면서 문득 전혜린이 생각났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전혜린. 나 고등학교 시절 여고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전혜린. 독일 슈바빙 거리를 레인코트 자락 날리면 걸었을 젊은 지성이었던 전혜린. 그 때 전혜린이 당시 젊은 처자들의 삶에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면 한비야는 21세기에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의 공통점은, 첫째, 여자들이 쉽게 하기 어려운 '외국 경험'에 있다. 둘째, 자유로움이다.  가족과 결혼, 남자로부터의 자유로움. 셋째, 맘껏 공부하기이다. 넷째, 책으로 자신을 알리고 다른 사람들(특히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 그리고 앞의 것들과 연관되지만 외국어 구사 능력이다. 결국 능력있고 자유로운 여자, 이것이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 여자들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혜린과 한비야는 다른 점이 더 많은 사람들이다.  

전혜린이 있는 집 자식으로 남들이 꿈도 못 꿀 독일 유학을 했던 데 비해 한비야의 해외 체험은 거의 자력갱생 수준이라는 점, 전혜린의 공부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법학이었던 데 비해 한비야는 주로 어학을 중심으로(물론 그 사람이 자기 전공을 살려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학위를 위한 공부보다는 삶 자체에 필요한 공부를 했다는 것이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혜린이 자신의 삶에 매몰되어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한 반면, 한비야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경험과 능력과 지적 자산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주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한비야를 사랑하고 그를 닮으려 애쓰는 오늘 날의 젊은이들은 30여년 전의 젊은이들보다 훨씬 건강하다. 세상이 거꾸로 간다고 하지만 분명 사람들은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도 들어 참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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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2-03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혜린과 비교하니 공감이 팍팍 옵니다.
저도 당근 전혜린에 열광하던 여고생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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