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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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이 좋아졌다. 아니 전에도 좋았다. 정확히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부터 유시민이 좋았다. 아이들을 위한 학급문고로 교단 초기에 이 책들을 사서 읽었던 것 같다. 그전까지 내가 공부한 세계사와 경제학은 이런 책이 아니었다. 어려운 문장과 현학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스터디'를 해야 하는 책들이었다. 그래서 거꾸로 시리즈를 읽으면서, 이렇게 어려운 내용을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젊은 필자의 역량에 감탄했었다. 

그래서 그가 정치가로 등장했을 때 조금 실망했던 것도 같다. 세간의 평은 그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좋은 느낌을 깎아버리기에 충분할 만큼 신랄했다. 그리고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참여정부의 정치적 방향과 태도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었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그저 멀리서 잘 되기를 바라는 기분 정도였다. 

토론장에서 그의 말은 경박한 느낌이 들 만큼 거침없이 하늘을 날았다. 적절한 비유와 논리적 근거들, 길지 않은 문장들로 적의 빈 곳을 바로 치고 들어간다. 틀린 말 하나도 없는데 이상한 아쉬움이 느껴진 것은 그의 강퍅해 보이는 인상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저 완벽한 언변에 겸손이 조금 모자라서 아쉬운 걸까 무얼까 말이다. 그런 유시민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눈물 범벅이 되어 울고, 울면서 람들 앞에 다시 돌아왔다.

오랜만에 다시 읽는 그의 문장은 감동이다. 천재는 아닌데, 그런데 무얼까, 아무리 어려운 것도 간결하고 적절하게 글로 풀어내는 이 재주는. 고등학교 때 대충 배웠던 헌법 문구 하나하나가 시처럼 아름답다는 걸 처음 느낀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해 감정적으로만 좌절하고 연민하며 사랑했는데 합리적이고 냉철하게 따져 보고도 자랑스럽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곧 직업적 감각으로 아이들과 쉽게 법과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교재로서 이 책을 다시 해독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교재로 쓰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책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감탄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꺾인다. 제자들이나 동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도 뒤로 가면서 줄어든다. 아니, 앞에서도 감동적으로 헌법과 그에 담긴 정신을 말하다가, 지금 정권이나 지금 현실을 언급하는 것이 자꾸 아쉬워졌던 게 사실이다. 현 정권에 대한 그의 비판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책 속의 내용이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에 쓰여져서 그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 참 낯설게 느껴지듯 한2,3년 쯤 흘러 정권이 바뀌고 지금 대통령이 역사의 뒤안의 사람이 되면 이 책은 어떻게 읽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아쉬웠던 것 같다. 신문을 읽는 기분 같은 것이다. 책이 갖는 영구성 혹은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으리라는 느낌 때문에, 그리로 그것 때문에 헌법 정신에 대한 주옥같은 해석들이 값을 다하지 못하겠군 싶은 마음 때문에 아쉬운 것이다. 

뒤에 실린 '유시민 전 장관'의 이야기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처음부터 여느 정치인들처럼 자신의 역정을 담은 수기 정도로 얼굴을 내밀었던 책이라면, 유시민의 정치 역정이 궁금해서 이 책을 산 것이었다면 아주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시민 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 책에 대해 가졌던 기대와 다른 내용이어서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 싶은 게 용두사미란 게 이런 걸까 싶은 게, 그래서 사람들이 유시민에게 2% 뭔가 부족한 게 있다고 하는걸까 싶은 게... 아쉬웠다.  

그래도 옆에서 남편은 '대한민국 개조론'도 좋다고 읽어보라고 한다. 누구나 성장을 한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정치인도 성장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아직은 젊은 정치인인 유시민이 성장의 과정 상에 있다고 믿어본다. 한 십수 년 전쯤 노무현이 아직 변호사였을 때 쓴 수필을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서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좋겠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정작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성장 앞에서 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훗날 유시민에게도 그럴 날이 올지 모른다. 그때 나는 뭔가 부족한 듯 싶어서 아쉬웠으나 애정을 버릴 수 없었던 이 책을 다시 훑어볼지 모른다. 과거가 되어 버린 이명박 대통령의 이름이 군데군데 나올 때마다 피식피식 웃기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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