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90년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국영, 주윤발, 유덕화에 연호하면서 어느샌가 홍콩 영화는 <도신>과 같은 카드게임이라는 한가지 소재에 집중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미친듯이 홍콩영화에 빠져들었다. 시작은 무협 시리즈 <초류향>이었다. 흰 옷 나풀거리면서 검을 휘두르는 주인공에 빠져 열 편짜리를 사흘에 다 보았던 내 국민학교 6학년 마지막 겨울방학이 떠오른다. 그리고 무협느와르와 이어지는 도박에 관한 느와르까지, 완전 좋아해서 B급 홍콩영화까지 다 찾아보았던 기억이 난다.

타짜를 보면서,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음악의 탓이리라. 두둥~하면서 결정적 장면을 가로지르는 그 특이함, 그것이 내 기억을 수면위로 부각시켰다.

솔직히 작품성 떨어진다. 왜 그렇게 이 영화에 연호하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물론 김혜수의 육감적인 몸매와 조승우의 매력적인 미소가 한몫했겠지. 잘 얽어놓은 캐릭터와 사건은 괜찮았다.

그런데 왜 옴니버스같이 느껴졌을까. 10까지 붙은 부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연히 있어야할 클라이막스는 진부했고 생소한 세계에 대한 묘사를 위해서 시간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타짜의 세계, 그것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낯선 용어에 집중할 수가 없기도 했다.

그래서 아쉽다. <범죄의 재구성>같은 대중성이 미흡하다고나 할까. 긴박감이 떨어진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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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하스
하성란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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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다. 마지막 단편 <자전소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름이 없다. 성으로 불려지거나 직위 혹은 성의 이니셜로만 불리워질 뿐이다. 게다가 성性도 모호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애매모호해서 읽는 중간에 내 머리 속에서 성이 바뀌고 앞장을 다시 들추곤 했다. 장소도 애매하다. 어디에나 있음직한 공간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시간의 개념이다. 여기서 시간에 따른 사건 같은 것은 없다. 첫머리 단편 <강의 백일몽>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시간이란 기억과 같이 불완전하는 것인가..

 모든 것이 애매모호하다.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상념만 떠도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일부러 몰입하지 못하도록 사건의 중간중간 다른 이야기를 집어넣기도 한다. 페이지 한장 넘기는 것이 힘겨웠다. 대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은 <무심결>이다. 주인공의 오독과 그 짧은 사건들. 읽기 쉬워서였을까. 아니면 오독의 재미였을까. 소소하게 웃었다.

하성란의 <삿뽀로 여인숙>을 감명깊게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연상되는 책이었다. 그래서 새로 나온 신작을 일부러 찾아 읽었는데...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와닿지 않는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계속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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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 창비시선 18
신경림 지음 / 창비 / 197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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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1부와 2,3부 그리고 장시 '새재',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부는 부초같이 떠도는 장돌뱅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체념과 그에 따른 슬픔이 짙게 배어나온다. 장터에서 또 다른 장터를 떠돌며 술 한 잔, 장터로 가기 위한 나루터에서 또 술 한 잔 걸치며 세상 시름 다 잊어버린 듯 허허 웃으며 장돌뱅이가 떠오른다. 그에겐 분노란 없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치열한 고민도 없다. 아마도 있었겠지만 이미 잊은지 오래다. 그저 주어진대로 흘러갈 뿐이다. 주막에서 막거리 한 사발 들이키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2, 3부에서는 분노가 전면적으로 떠오른다. 왜 가난해야 하는지, 굶어죽어야 하는지 분노한다. 하지만 알고있다. 이 삶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분노하고 울어봐야 이 삶은 계속 고달프기만 하다는 체념을 안고산다. 그리고 체념을 부끄러워한다. 분노하지만 체념할 수 밖에 없고 그 체념을 부끄러워하는 화자가 곳곳에서 보인다.

마지막으로 '새재'라는 장시,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서사시의 골격을 가지고 있으되 화자인 돌배의 독백만 난무할 뿐이다. 분노한 끝에 봉기했고 결국 화적이 되어 문경새재까지 도망가지만 좌절한 한 사내의 모습과 그의 독백은 바람결에 흩날릴 뿐이다. 독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지 못한다. 하고자하는 말은 다 했으나 그것으로 끝이다. 들어주는 이에게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 참여시의 한계가 뼈저리게 느껴지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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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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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범인을 쫓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범인 애초부터 드러나있다. 문제는 그 범인이 왜 그런짓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수법을 통해 범행을 은폐하려 하는지다.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초점이 아니라 어떻게 범행이 이루어졌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전작들과 이 작품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야스코가 전남편을 죽였다. 그리고 이시가미가 그것을 은폐하였다. 그것을 뒤쫓는 데이토 대학의 동창생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꽤 읽은 나로서는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왜 이리 느슨하지.. 의아했다. <백야행>이나 <게임의 이름은 유괴> 등에서 보여주었던 긴박함이 없었다. 250페이지 쯤을 읽으면서 작가가 대체 왜 이렇게 썼는지 의문이 들었다. 게이고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급박하면서 다음 장이 궁금하게 만들 수 있는데 대체 왜 이번 작품은 뒷장이 궁금해지지 않는지 의아했다. 그러면서 여기까지인가.. 게이고도 이럴 때도 있구나..하면서 약간 씁쓸한 시선으로 한장한장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충격적 반전을 위한 고의적 문체였다. 느슨하게.. 용의자의 헌신에 집중하면서.. 형사들의 헛걸음에 할애하면서.. 반전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의아했다. 야스코 모녀가 저리도 취조에 잘 대응하다니... 처음에는 이시가미가 잘 훈련시킨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반전은 그럴 수 밖에 없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시가미라는 캐릭터.. 용의자 X인 그의 헌신이 정말 압도적인 소설이다. 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인간의 끝자락을 훔쳐본 기분이다. 순수한 세계를 지키기 위한 그의 필사적인 노력이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그의 이러한 헌신에 독자들이 이입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 또한 훌륭했다.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같은 살인 사건을 두고 이렇듯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다니 그의 역량에 매번 놀란다. 그의 매 작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읽게 되고 같은 패턴은 반복되지 않고...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그의 예전 작품 또한 모두 찾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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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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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이 책만큼 별점을 몇 개 줘야할 지 고민스러운 책도 없었다.

네개를 주기엔 아쉬웠고, 다섯개를 주기에도 아쉬웠다. 다섯개를 줄만큼 내 심장을 송두리째 흔들지 못하였으나, 네개를 주기에도 별이 모자랐다. 평점으로 치자면 4.8 정도?

별 네개를 주기에 아쉬웠던 이유는 추리나 미스터리의 토양이 채 형성되어있지 못한 한국이라는 곳에서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이렇듯 멋진 팩션을 만들어낸 것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엄청난 연구와 취재가 뒤따랐음은 그 공을 충분히 인정해줘야 한다. 단편이 아닌 장편에서 이렇듯 완성도가 높음은 정말이지, 한국 소설이 이런 경지에 올랐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선구자와 같은 소설이다.

게다가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고싶은 말도 충분히 책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대놓고 설교조가 아니라 개개의 사건과 인물들의 발언을 통해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집현전학사와 세종의 마음을 읽어내고 깊은 공감을 받을 수 있는 한글창제와 그 비밀은 지극히 한국적이면서도 사건의 긴장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별 다섯개를 줄 수 없는 것, 범인이 누구인지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이상향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영웅적 면모만을 부각시켰기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최만리나 심종수의 입장도 명분을 가지고 풀어냈더라면 더욱 긴장감을 놓지못했을 것이다.

국문학도로서 한글창제에 관한 이 팩션은 흥미로웠다 세종 시대의 현실과 현재의 모습을 절묘하게 버무려놓으면서 한글을 만들고 지키고자 했던 모든 이를 영웅으로 만들어보였다. 최만리조차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모습과 마지막의 의연함은 그를 비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장점이 곧 단점이 되기도 한다. 너무나도 맑은 물이어서 물고기가 살지 못할 것 같은 웅덩이를 보고있는 기분이랄까.

욕망은 사람을 망치고 사건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욕망에 눈 먼자의 욕망은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지막의 심문 장면은 약간 허무하다. 뭐가 이렇게 쉽게 끝나는 것일까, 약간의 허탈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욕망에 눈먼자의 모습보다 감격스러웠던 집현전 학사들과 세종의 모습에서 그 시대를 살아내고 다음 시대를 열고자 하는 뜨거움을 느꼈으므로 감히 별 다섯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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