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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모두가 눈이 멀었다, 그녀만 빼고.
밖은 이 백색공포가 더 확산되지 않게 하기 위해 총을 든 군인들이 지키고 있고, 안은 그녀만 빼고 눈이 먼 이백 여명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그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눈이 멀었는가 하는 것이다. 눈이 먼 것은 그저 눈이 보이는 사람과 다른 것일 뿐이다. 하지만, 흔히 우리 사회가 그러하듯이(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를) 다른 것은 틀린 것이 되어버렸다. 백색공포가 전염된다는 것은, 은유적으로 다른 것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리고 공포는 당연한 결과로써 폭력을 낳는다.
작가는 눈이 멀었다는 육체적인 다름을 통해서 사상, 이념의 범주로 확대해도 좋을만한 메타포를 남기고 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인간과 자연 등은 단지 다를 뿐이지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서로를 적대시했고 인간은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 자기보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자연을 짓밟고 있다, 인간은 단지 힘을 가졌을 뿐이데 말이다.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온갖 악은 사람을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눈이 보이는 사람은 공포로 인해 힘이 있는 사람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눈이 먼 사람들은 그들끼리 권력이라 할만한 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가 또 다시 악을 이끌어냈다.
이 책은 내내 인간 본성에 대한 심도있게 탐구하고 있으며 마주하기 불편한 진실을 까발리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더 추악해질 수 있으며, 더러워질 수 있는지 말이다. 작가의 시선에서는, 인간은 선하지도 막하지도 않은, 단지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공포와 마주쳤을 때 힘이 없으면 복종하고 힘이 있다면 군림하려는 인간의 특성은 본능처럼 느껴진다. 책의 말미에 성당의 그림과 조각들, 예수까지 눈이 먼 상태로 있는 장면은 신조차 인간의 본성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그녀를 통해서 작가는 사회가 유지되려면, 아니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혹은 여성성일수도 있다. 비폭력적이며 가족애를 가지고 있는 여성의 특성 혹은 어머니의 특성이 무너져가는 사회를 유지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눈이 멀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 살인도 하고 기꺼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약육강식의 세계로 뛰쳐나가고 궂은일을 도맡아한다. 길 잃은 개조차 그녀에게 이끌려 그녀의 보호자겸 위안자의 역할을 할만큼.
이타적인 태도야말로 정신과 윤리가 눈 멀어가는 현대사회를 지켜낼 수 있고, 그래야만 눈이 보일 수 있을 때까지 인간다운 모습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충고는 곱씹을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