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신간평가단의 첫 미션, 잘 차려진 뷔페에서 다섯 권만 골라내야 내야하는 행복한 고민. 일단 시작.     

 

 

  

  

1. <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부키

첫 관심사는 진화론 관련된 책이다. "진화론의 모든 쟁점과 환경·정치 문제를 접목시킨 걸작."이라는 소개글이 눈에 띈다. 초기의 사회진화론에서부터 최근의 사회생물학과 통섭에 이르기까지 진화론은 단지 생물학이라는 분과 학문의 한 이론으로 머물길 거부하고 다양한 분야로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는데, 이는 진화론이 가진 그럴 듯함, 즉 뛰어난 설명력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에서 기후학, 인구학, 생태학, 국제정치까지 아우르는 큰 그림을 통해 인류의 발걸음을 돌아보고 전망"하고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2. <신경윤리학이란 무엇인가>, 닐 레비 지음, 신경인문학 연구회 옮김, 바다출판사 

언젠가 '인간의 윤리적 딜레마의 대부분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거꾸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생겨나는 윤리적 딜레마도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뇌 속의 인간 인간 속의 뇌>(바다출판사, 2010)에서 간단히 접했던 신경윤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 기대된다. 인간의 뇌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는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하다. 요즘 읽고 있고 있는 <선택의 과학>(사이언스북스, 2011)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여 추천. 

 

 

 

 

 3.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민음사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모든 것이 밝혀졌다>의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이름만 보고도 무조건 집어들 수밖에 없는 책. 최근 몇 달 동안 <동물 권리 선언>,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 <동물에 대한 예의>, <동물 해방>, <동물의 역습>, <동물에게 귀 기울이기>,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등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그 연장선에서 반드시 추가해야 할 책. 

 

 

 

 

 4. <공정 사회란 무엇인가>, 피터 코닝 지음, 박병화 옮김, 에코리브르 

"자유 시장과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가 실패로 끝나고 사회주의 모델도 답을 주지 못하는 시대, 생물사회주의적 계약을 바탕으로 한 공정 사회 모델에서 대안을 모색한다."는 소개글로 추측해보건데, <협력의 진화>(시스테마, 2009) 등과 같이 '협력이 인간이 본성'이라는 게임 이론과 진화론적 설명을 토대로 공정한 사회의 가능성을 스케치해보는 책이라 생각된다. [인문/사회/과학]이라는 세 분야를 아우르는 적절한 책이 아닐까 싶다. 

 

  

 

  

 

5. <플라톤 서설>, 에릭 A. 해블록 지음, 이명훈 옮김, 글항아리 

서양철학의 마르지 않는 원천, 플라톤이다. "미디어론의 관점에서 플라톤의 철학을 해명"한다는 소개글에 솔깃. 구송(구송? 왜 구술이 아닐까?)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혁명적 전환이 플라톤 시대에 이미 일어났다(구텐베르크 이후가 아니고!)는 저자의 설명이 궁금하다. 플라톤의 "대화록"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지 흥미진진. 마셜 맥루언이나 월터 옹의 미디어론과 비교하며 읽기 좋을 듯하다. 

 

첫 미션을 마친 소감은, 아 이거 쉽지 않구나, 하는 것. 일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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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0-1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 완료했습니다! 첫 미션 수행 고생 많으셨습니다~
 
빅뱅 이전 -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마르틴 보요발트 지음, 곽영직 옮김 / 김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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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시절, 검은 하늘에 점점이 박혀있는 별의 세계와 그 별들이 무수하게 펼쳐져 아름다운 장관을 만들어내는 우주의 모습에 매혹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라는 광고 문구나 “우주에 대한 모든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난해한 개념과 이론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무지를 탓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 같은 평범한 일상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이라면 전문 과학자가 도대체 왜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전문 과학자들의 연구가 우리 같은 일상인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연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에 대해 대중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독자에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를 떠나,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대중과학서를 집필하는 이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더 나아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러한 시도는 과학자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고 있는지를 판명하는 진정한 시험은, 아무것도 예상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진 비전문가에게 지식을 설명하여 이해시킬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비전문가’란 중고등학교 때 물리 수업을 잠깐 들어본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거나 그에 준하는 지식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듯싶다. 그러므로 매우 어려웠고 머릿속에 명쾌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전체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현대 우주론은 상대성이론이 야기한 특이점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아인슈타인 방정식에 따르면 빅뱅 순간이나 블랙홀에서는 공간적 그리고 시간적 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작아지는 순간이 있게 된다. 이를 특이점이라고 하는데 이 순간에서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해가 무한대가 되어 방정식 자체가, 즉 이론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자 이론의 성과를 우주론에 끌어들이게 되고, 이를 토대로 끈 이론이나 루프양자중력과 같은 최신의 이론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두 이론 중 저자는 루프양자중력을 지지하는데, 끈 이론은 수학적으로 매우 아름답기는 하지만 가능한 해의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구체적인 예측을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루프양자중력은 너무 복잡해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두 이론 모두 아직 확실한 관측이나 실험을 통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구가 점점 심화되고 있고 곧 그럴듯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빅뱅의 순간뿐만 아니라 빅뱅 이전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마 어떤 이에겐 무의미할 수도 있고, 또 불필요한 지적, 시간적, 금전적 낭비로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일상인에겐 지진, 쓰나미,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가, 아니 월말이 되면 텅 비어버리는 지갑이나 9월이 다 되도록 기승을 부리는 열대야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지, 경험해 볼 수도 없는 우주의 기원이나 빅뱅의 순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이 아무 소용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알고자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른다면, 이러한 연구가 우리의 어떤 본능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어도 애써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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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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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어떠한 문제를 두고도 과학기술이 해결책을 제시할 거라는 관념을 낳게 한다. 그러나 삶을 개선하는 과학기술의 능력을 얼마나 열렬히 신봉하든, 우리가 자원을 생산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소비하는 문제를 과학기술이 해결할 수는 없다. 자원은 언젠가 바닥나기 마련이다.”(15)

최근 벌어지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그에 따른 방사능 위험물질에 대한 공포는 효율성에 기대어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일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 명백히 보여준다. 스리마일아일랜드와 체르노빌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른 발전 시설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친환경적으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효율성에 대한 미련과 초기의 기술이 가지고 있던 위험한 문제들을 새로운 기술이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기란 힘든 일이다. 물론 효율성 추구와 기술 개발의 노력이 인간에게 지금과 같이 발전된 문명을 가져다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문제되고 있는 원전 사태나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이 초래한 갖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떠올려 본다면, 지금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가 지구를 사용했던 방식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이러한 성찰의 목록에 ‘흙’도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동차나 화력발전소 등과 같은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온실가스의 증가,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한 사막화, 불법적 폐수 유출로 인한 수질 오염, 오남용으로 인한 석유 고갈 등 우리들 앞에 산적해 있는 심각한 환경 문제들에 ‘흙’에 대한 성찰을 추가해야 한다니, 다소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흙이란 어디든 널려 있으며, 오히려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흙이란 한 문명의 지속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다. “한 문명의 수명은 농업 생산이 쓸모 있는 경작지에 자리 잡고 겉흙을 침식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331) 왜 그런가? 무엇보다 인간은 땅에서 자라는 농산물을 주식으로 삼는 존재이다. 농업 생산량이 인간의 생존에 끼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그런데 농업 생산량은 농경지의 면적과 비옥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다시 말해 인간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적절한 넓이의 비옥한 토지가 없다면 한 사회, 더 나아가 인류 자체의 생존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긍정적인 결과만을 낳은 것은 아니다. 저자는 역사상 존재했던 다양한 문명들의 쇠퇴가 무분별한 농경의 확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서로 다르긴 하지만, 대개 문명의 이야기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인구가 늘다가 비교적 갑작스레 사회가 쇠퇴해 가는 패턴을 따른다.”(72) 이러한 패턴이 나타나는 이유는 발달된 농업 기술로 인한 생산량의 증가가 인구의 증가를 불러오고, 증가된 인구의 식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땅의 재생산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농경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땅의 영양분이 모두 소멸되어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거나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땅이 빗물과 바람에 침식되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갑자기 줄어들게 되고, 늘어난 인구를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황폐해진 땅에서 흙이 침식되고 갑자기 인구가 줄어든 뒤에는 낮은 인구밀도가 유지되면서 흙이 되살아난다.”(120) 마치 맬서스의 인구조절론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과정이 모든 문명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지구의 얇은 토양맨틀(soil mantle)은 이 행성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꾸준히 파헤치고 있다. 말 그대로 지구의 살갗을 벗겨 내고 있는 것이다.”(39)

특히 저자가 지적하는 토양 침식의 주범은 양분을 급속히 소비하는 대규모 단일 경작 방식의 플랜테이션 농장, 겉흙의 침식을 가속화하는 쟁기나 트랙터 등의 경운 기계, 그리고 흙의 재생산 능력을 저하시키는 화학비료 등이다. 이 방식은 현대적 농업 혁명이라 불리며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시행되고 있는 농업 방식이다. 그러나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과거 대부분의 문명사회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또한 마찬가지 위기에 직면할 거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흙의 침식이 지구적으로 미친 영향에 관한 1995년의 한 보고서는 해마다 경작할 수 있는 땅 1천200만 헥타르가 침식과 토질 저하로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해마다 사라지는 경작지가 전체 경작지의 1퍼센트에 가까운 것이다. 지속 가능한 상태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244)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산업화된 기술 집약적 영농 방식을 버리고 소규모 노동 집약적인 영농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랙터와 쟁기로 땅을 파헤치는 방식을 버리고 무경운 농법을 시행해야 하며, 화학비료에 기댄 단일 경작 방식에서 벗어나 돌려짓기와 똥거름 주기 등을 통해 흙의 비옥함이 자연스럽게 순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사한 환경에 처해 있던 망가이아나 이스터 섬과 다르게 농업 전략을 다듬어 지속가능한 경제를 유지한 티코피아 사람들의 사례나 새로운 녹색혁명의 대표적 모델로 여겨지는 쿠바 농업의 사례는 인류가 지속가능한 상태가 되기 위해 농업을, 그리고 흙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인류의 시간 동안에는 되살릴 수 없는 흙은 다루기 힘든 잡종이자 재생되는 시간이 더디고 더딘 필수 자원이다. 오랫동안 무시될수록 해결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여러 환경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흙의 침식은 사회제도가 지속되는 것보다 오랜 시간의 범위 동안 문명의 기초를 뒤흔든다. 그러나 흙이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흙이 꾸준히 침식된다면 농업이 점점 늘어나는 인구를 먹일 수 없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329)

환경에 대한 관심은 그 세대의 양심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환경의 변화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다양한 문제적 효과들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고 그 피해의 결과도 직접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시대의 무분별한 화석 연료의 사용이 지금 우리에게 이상 기후라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다음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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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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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실패를 비관한 젊은이의 자살 소식이 사회면을 연이어 장식하고 있을 만큼 청년 실업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일자리 창출과 같은 사회적 대책의 필요성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항상 덧붙여 젊은이들 역시 눈높이를 낮춰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얼마든지 직장을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청년들이 대기업과 같은 ‘번듯한 직장’에만 매몰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패배자라는 낙인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정당한가? 작년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임금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50.2%였다. 일시적 아르바이트 등과 같이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부분까지 고려한다면 이 비율은 60% 가까이 이를 것으로 추산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취업을 고려하고 있는 이가 눈높이를 낮추었을 때 보이는 일자리란 대부분 비정규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비율이 46.8%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소식을 전하고 있는 뉴스기사의 제목(“남성정규직-여성비정규직 임금격차 월 198만원”, 미디어오늘)이 시사하듯, 이 격차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

결국 취업 준비자가 눈높이를 낮추었을 때 가능한 선택지의 대부분은 저임금을 받으면서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번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하면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눈높이를 낮추라는 주문의 삶의 질을 낮추라는 주문과 다를 바 없다. 학문적 열정보다는 스펙 쌓기에 목숨을 건 대학생들이 넘쳐나고 취업의 실패가 곧 인생의 실패인 듯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청춘들이 늘어가는 현실은 이러한 사회적 조건의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자기 계발 담론의 확산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국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이 책의 저자들은 ‘용기, 패기, 혈기, 호기, 끈기’, 즉 ‘젊음의 5기’를 들먹이며 ‘꿈꿔라 청춘아, 힘내라 청춘아, 너희의 큰 꿈을 활짝 펼쳐라!’라고 외치는 공익광고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청년들에게 ‘꿈을 펼쳐라’는 광고를 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꿈을 못 펼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젊음의 5기(즉, 개인의 의지)’를 말하는 것은 국가가 실업의 문제를 청년 개인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28)

이처럼 실업이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게 되면, 즉 자신의 능력과 열정이 부족해서 취업을 못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시 되면 자연스레 자기 계발 담론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IMF 외환위기 이후, 무한 경쟁과 노동 유연화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유입됨과 동시에 각종 ‘~에 미쳐라’ 류의 책이나 성공의 비밀을 알려준다는 책이 꾸준히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착취는 어떻게 정당화 되는가

물론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계발한다는 ‘자기 계발 담론’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되고 있는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자기 계발의 명령은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된다. 즉 자기 계발이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끌어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 특히 자신을 고용할 고용주가 원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스스로를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기업가 정신’으로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고용주의 마인드를 내면화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열정 노동’이 탄생한다.

“자본주의는 ‘열정’의 영역에서 새로운 시장과 노동력을 발견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는 말은 이전보다 더한 성실함과 근면함을 요구했다. 열악한 조건도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혹여 불만이라도 토로하는 사람은, 이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186)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에 어떠한 불합리도 감수해야 하며 남들보다 더한 성실함과 근면함을 내세우지 못하면 자신의 열정이 부족함을 반성해야 하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이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들이 말하는 ‘열정 노동’이란 노동자의 탈노동자화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노동력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끊임없이 고용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모습이 바로 저자들이 얘기하는 ‘열정 노동’의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사람들이 선택 가능한 항목은 단지 두 가지이다. 착취당하거나, 그조차도 당하지 못하고 쫓겨나거나.”(192)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저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불확실한 시대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사회적 불만의 증폭은 사회 혁명의 기폭제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파시즘과 같은 폭정을 불러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그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태를 자각해야 한다.”(246)

우리에게 주어진 사태를 직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직시의 산물이다. ‘열정 노동’의 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처한 삶의 조건과 문제들을 끄집어내어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려는 시도인 것이다. 다소 거칠게 묘사되고 있긴 하지만 차근차근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에 대한,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의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성찰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열정이 제 길을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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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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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아마 신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

이는 2009년 1월, 영국 인도주의 협회가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등과 함께 시작한 무신론 캠페인의 버스 광고 문구다. 이후 캠페인은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캐나다 등지로 확산되어 큰 이슈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2월 반기련이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로 버스 광고를 시도했다가 기독교 단체의 항의로 4일 만에 실패한 적이 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종교가 가져온 갖가지 폐해들, 특히 종교적 갈등 때문에 이루어진 대량 학살과 같은 엄청난 역사적 참극들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현대와 같은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여전히 종교나 미신과 같은 비이성적(?) 활동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열혈 이성주의자들의 정의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정의감의 발로이다.

<양복을 입은 원시인>은 350여 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지만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간단하다.

1. 현존하는 인간은 인류의 진화가 폭발적으로 진행된 홍적세(약 10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무렵)의 환경에 적합했던 몇 가지 습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2. 이러한 습성, 즉 과도한 인과성 탐지, 발견법, 패턴 인식 등과 같은 원시 논리는 인간을 종교나 초자연적인 현상과 같은 비합리적 설명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3. 진정 현대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선 원시 논리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이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초자연적인 현상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이 주로 공격하고 있는 대상은 명백히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종교들이다. 다시 말해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빅터 스탠저의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등과 궤를 같이 하는 무신론 캠페인의 진화심리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책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아니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종교와 같이 터무니없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거지?’

그러나 개인적으론 종교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며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시도가 그다지 의미 있는 전략이 되긴 어렵다고 본다. 왜 그런가? 먼저 단순하게 이러한 책들의 독자가 누구일지 생각해보자. 이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와 같은 부류의 책들을 거의 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읽는다고 해도 이는 이러한 책들에 나타난 논리적 모순을 찾아내어 비판하기 위한 목적에서만 읽을 것이다. 즉 이미 경험적 현상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그것이 평범한 인간의 경험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 경험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니 잘못된 믿음이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종교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겐 어떨까? 물론 이러한 책들이 갈등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판단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와 같은 네거티브 전략은 선거와 같은 선택의 상황에서 종종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설적인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다. 즉 종교와 이성,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서로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도 창조론과 진화론을 수업시간에 공평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한 생물 교사의 말에 어이없어 하면서, 창조론은 이론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동등하게 다뤄질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미 ‘이건 이런 점에서 틀렸고 저건 저런 점에서 맞아’와 같은 설명 방식은 서로 다른 과학 이론을 비교하는 방식이고, 이를 종교와 이성의 비교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의도와는 달리 자신들이 부정하고 있는 종교의 존재론적 위상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와 같은 종교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종교인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이로 인해 종교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열심히 종교를 퍼트리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모로 무신론 캠페인과 같은 전략은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종교는 인류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살아남은 인간 특유의 문화이다. 수전 블랙모어가 자신의 저서 <밈>(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2010)에서 지적했듯이 “종교적 밈은 다른 경쟁 밈들보다 생존과 번식 확률이 더 높다.” 진화론적으로 말하자면 종교란 인간이라는 종에 적합한 형질을 보유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멸종되지 않고 현재까지 꾸준히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종 자체가 새롭게 변화되지 않는 이상 종교가 사라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생존력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존재 자체를 긍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에게 명백한 해를 끼치는 어떤 바이러스가 있다면, 이를 박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인간에게 명백히 해악을 끼치는가? 이는 실증적으로 입증되기 어렵다. 무신론자들은 십자군 전쟁이나 9.11과 같은 사례를 들겠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 또한 분명 존재하기에 이는 저자가 원시 논리에 기인한 현대인의 오류라고 지적하는 확증 편향(자신이 원하는 증거만 수집하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명백한 해악이 아니더라도 거부할 순 있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와 같은 문화를 생각해보자. 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최악의 제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대단히 유용한 제도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로 인해 내전까지 벌인 나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가 형식적으로나마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가치에 대한 합의에 근거한다. 밈적으로 설명하자면, “인간 사이에 우열이 있다”는 밈과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밈이 서로 경쟁해서 후자가 승리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다시 말해 무신론 캠페인이 지금 그러하듯 종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믿음인지 설명하는데 열을 내기보다는, 그 에너지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게 얼마나 유익한지 설명하는데 쏟는 것이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더욱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랙모어의 말처럼 밈 진화의 속도는 인간 진화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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