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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아마 신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
이는 2009년 1월, 영국 인도주의 협회가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등과 함께 시작한 무신론 캠페인의 버스 광고 문구다. 이후 캠페인은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캐나다 등지로 확산되어 큰 이슈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2월 반기련이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로 버스 광고를 시도했다가 기독교 단체의 항의로 4일 만에 실패한 적이 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종교가 가져온 갖가지 폐해들, 특히 종교적 갈등 때문에 이루어진 대량 학살과 같은 엄청난 역사적 참극들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현대와 같은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여전히 종교나 미신과 같은 비이성적(?) 활동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열혈 이성주의자들의 정의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정의감의 발로이다.
<양복을 입은 원시인>은 350여 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지만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간단하다.
1. 현존하는 인간은 인류의 진화가 폭발적으로 진행된 홍적세(약 10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무렵)의 환경에 적합했던 몇 가지 습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2. 이러한 습성, 즉 과도한 인과성 탐지, 발견법, 패턴 인식 등과 같은 원시 논리는 인간을 종교나 초자연적인 현상과 같은 비합리적 설명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3. 진정 현대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선 원시 논리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이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초자연적인 현상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이 주로 공격하고 있는 대상은 명백히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종교들이다. 다시 말해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빅터 스탠저의 <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등과 궤를 같이 하는 무신론 캠페인의 진화심리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책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아니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종교와 같이 터무니없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거지?’
그러나 개인적으론 종교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며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시도가 그다지 의미 있는 전략이 되긴 어렵다고 본다. 왜 그런가? 먼저 단순하게 이러한 책들의 독자가 누구일지 생각해보자. 이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와 같은 부류의 책들을 거의 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읽는다고 해도 이는 이러한 책들에 나타난 논리적 모순을 찾아내어 비판하기 위한 목적에서만 읽을 것이다. 즉 이미 경험적 현상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그것이 평범한 인간의 경험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 경험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니 잘못된 믿음이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종교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겐 어떨까? 물론 이러한 책들이 갈등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판단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와 같은 네거티브 전략은 선거와 같은 선택의 상황에서 종종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설적인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다. 즉 종교와 이성,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서로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도 창조론과 진화론을 수업시간에 공평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한 생물 교사의 말에 어이없어 하면서, 창조론은 이론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동등하게 다뤄질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미 ‘이건 이런 점에서 틀렸고 저건 저런 점에서 맞아’와 같은 설명 방식은 서로 다른 과학 이론을 비교하는 방식이고, 이를 종교와 이성의 비교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의도와는 달리 자신들이 부정하고 있는 종교의 존재론적 위상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와 같은 종교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종교인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이로 인해 종교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열심히 종교를 퍼트리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모로 무신론 캠페인과 같은 전략은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종교는 인류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살아남은 인간 특유의 문화이다. 수전 블랙모어가 자신의 저서 <밈>(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2010)에서 지적했듯이 “종교적 밈은 다른 경쟁 밈들보다 생존과 번식 확률이 더 높다.” 진화론적으로 말하자면 종교란 인간이라는 종에 적합한 형질을 보유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멸종되지 않고 현재까지 꾸준히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종 자체가 새롭게 변화되지 않는 이상 종교가 사라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생존력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존재 자체를 긍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에게 명백한 해를 끼치는 어떤 바이러스가 있다면, 이를 박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인간에게 명백히 해악을 끼치는가? 이는 실증적으로 입증되기 어렵다. 무신론자들은 십자군 전쟁이나 9.11과 같은 사례를 들겠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 또한 분명 존재하기에 이는 저자가 원시 논리에 기인한 현대인의 오류라고 지적하는 확증 편향(자신이 원하는 증거만 수집하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명백한 해악이 아니더라도 거부할 순 있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와 같은 문화를 생각해보자. 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최악의 제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대단히 유용한 제도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로 인해 내전까지 벌인 나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가 형식적으로나마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가치에 대한 합의에 근거한다. 밈적으로 설명하자면, “인간 사이에 우열이 있다”는 밈과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밈이 서로 경쟁해서 후자가 승리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다시 말해 무신론 캠페인이 지금 그러하듯 종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믿음인지 설명하는데 열을 내기보다는, 그 에너지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게 얼마나 유익한지 설명하는데 쏟는 것이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더욱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랙모어의 말처럼 밈 진화의 속도는 인간 진화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