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읽은 책들을 꼭꼭 씹은 후 소화시켜 내놓은 책이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 듯 책에만 파묻혀 글을 쓴 게 아니라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노력한 책이다. 한동안 서재에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란 책이 신간 소개로 나오길래 저자의 지난 책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 책과 세계화로 인한 세계 곳곳의 사정을 기록한 <닥쳐라! 세계화>를 알게 되었다.  

 단어들은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고, 생각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작업 노트'를 통해 엄기호씨가 어떻게 공부를 해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래 글은 촛불 집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좀 전의 시각과는 다른 면을 제시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처럼 공부하고 싶은 것 만큼 말로만 떠드는 연대에서 벗어나 의미있게 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런 미덕을 지닌 책을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다.

  촛불집회에서 보았듯이 민주주의는, 셈되지 않던 사람이 “당신들의 셈법이 틀렸다!”라고 폭로하며 셈법의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이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가? 그것은 진짜로 이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들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그리워만 하던” 1987년의 세대가 아니라, 자신이 셈에서 빠졌다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사실을 진짜로 믿으며 그것을 실체화할 것을 요구하는 촛불들 말이다.

 물론 그 촛불들이 늘 성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저항은 실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늘 실패하고 패배한다. 2008년 봄의 촛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촛불에 참여한 사람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과, 배제된 주권자인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함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 존엄함에 대한 감각은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인간이 아닌 것은 존엄하지 않다는 인간 중심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존엄함에 대한 감각은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비인간, 국민과 비국민을 넘나든다. 살기 위한 투쟁은 언제나 죽은 자, 죽어 가는 자에 대한 초혼을 반드시 부르기 때문이다. 내가 존엄하다면, 죽어 간 존재, 죽어 가고 있는 존재의 존엄함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외국에서 에이즈 감염인들이 벌였던 목숨을 건 투쟁에서 많이 목격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투쟁 역시 촛불처럼 실패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목숨을 건 투쟁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며 패배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에이즈 감염인들은 투쟁이 끝나고 난 뒤 흐느끼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외쳤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존재함을, 이 사회에 내 목소리가 있음을 느꼈다. 나는 늘 목숨만 부지하는,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알리라.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 싸움에서 당신들을 통해 나의 존엄함을 얻었다. 약은 못 얻었지만 더 이상 원하는 것은 없다.”

2008년의 촛불이 우리 사회에서 진정 민주주의와 존엄함에 대한 감각이 발생한 사건이었다면 이것은 쉽게 꺼지지 않을 터이다. 이렇게 한 시대와 존엄함에 대해 공통으로 갖게 된 ‘우리’라는 의식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자 현실적 힘으로써 현재와 단절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 이들의 강력한 에너지가 될 테니 말이다.

‘우리’의 강력한 에너지는, 촛불을 만든 이들이 “우리가 국민이다!”라고 외치는 소리와, 촛불을 끄려는 이들이 “너희는 아무개이다!”라고 외치는 소리 사이의 적대가 해소되지 않는 한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적대 관계는 근대 자유민주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 불화이지만, 그 속에서 아무개들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주변의 다른 아무개들에게도 눈을 돌리고, 그들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며 그 불화의 핵을 점점 더 포위해 나가리라. 근대가 가진 위험을 과격하게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이 정치의 무덤에서 잠자고 있던 아무개들은 황우석 사건이라는 반동적 급진화를 거쳐, 이렇게 다시 급진적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힘이 되어 우리 사회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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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2-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고립되지 말고 싸우고 있는‘세계’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대안이다."라고 얘기하시더군요.

저 또한 마음만 좀 과격해서 말이죠~

Arch 2010-12-14 19:08   좋아요 0 | URL
저는 입만 과격해요. 대안을 참 많이 외치고 다녔는데 결국 엉덩이가 무거워서 눌러앉기 일쑤였어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뭔가 도움이, 아니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못질하는건 즐겁다. 내가 없으면 일의 어느 한부분이 돌아가지 않는데서 느껴지는 퇴행적인 쾌감도 나쁘지 않다. 나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들으면 없던 존재감도 생기고 나도 뭔가 남들에게 보탬이 되는 인간인 것 같은 착각이 유용할 때도 있다. 그런데도 때때로 돈을 벌기 위해 아침 일찍 나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게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물론 같이 일하는 분들의 의사를 우선적으로 존중해 (그들이 담배 피고 싶다거나 쉬고 싶은 리듬에 따라) 일을 하는데서 오는 꼬운 맘이 있고, 역시나 이 일이 정말 내가 해야할 일일까란 무슨 일을 하든 드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혹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로 게으름뱅이인 나를 위해 갖가지 합리화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그래서 요즘 이런 책을 읽는다. 언더커버보스를 보면서 저렇게 열심히 일하면 나도 나중에 CEO 만나서 보상받는건가란 생각보다 대체 얼마나 열심히 해야 그것도 몇 년 동안 일해야 바늘 구멍만한 확률을 거쳐서 내 일을 인정받는가란 폭폭함이 더했다. 기껏 며칠 말단 사원의 일을 체험하면서 근로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CEO의 번들거리는 민낯이 민망하기도 했다. 일을 안 하면서 살 수는 없는걸까. 회사의 구석진 공간에 숨어서 책을 읽거나 페이퍼를 쓰면서 조심스럽게 월급을 받을 수 없는걸까.



 

  이토록 끝없이 심각해질 수 있을까. 주인공 래리 고프닉은 연달아 벌어지는 심난한 일들 때문에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랍비를 찾는다. 하지만 번번히 답을 얻을 수가 없다. 이 일에는 분명히 신의 의지가 개입됐을 것 같고 이건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지만 정작 돌아오는 답은 애매모호할 뿐이다. 뇌물을 주고 간 학생의 돈을 받기로 맘 먹고 성적을 고친 순간, 엑스레이 검사 결과를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자는 의사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러다 영화는 끝나버린다. 


 

 

 
 
며칠 전, 숨어서 페이퍼를 쓰고 있는데 직급은 같지만 경력은 이 회사에서 최고로 많은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딴 짓을 하는 것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나 싶어 딴청을 부리고 있는데 그가 심상하게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일 얘기를 했다. 한달에 한번꼴로 10미터가 넘는 천장까지 아시바를 쌓고 빔 프로젝트 렌즈를 갈았던 일에서 아무것도 안 알려주던 사수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애썼던 일, 자신이 이 일을 하는걸 정말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 세 가지 분과의 일을 한 번에 처리하느라고 뭐 빠지게 바빴던 일까지. 워낙 닳고 닳은 사람이라 분명 내게 뭔가를 주입시키려고 한거란걸 안다. 그가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도가 튼 사람인 것도, 게으른 내가 쉽게 변하지 않으리란 것도 잘 안다. 그런데도 쑥스럽게 그의 말을 듣다 나도 모르게 의욕이 불끈 솟고 말았다. 

  난 그동안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는 과정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남들 다 하는 일을 나는 유별나게 여기고 있었으며 자꾸 늘어지고 싶어한다. 일을 안 할 때는 직장을 잡는게 최고의 소원이라며 나를 달달 볶았다. 이것만 보면 뭔가 분명해지는 느낌이고, 동료의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아직 하나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게 고쳐야할 채점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의사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것도 아니니 나는 이 중간 어디쯤에서 늘 허둥지둥 댈게 분명하다. 애석하게도 이것 하나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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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12-14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쯤에서 추천합니다, 이 책 -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란드 러셀 지음)
저는 사악한 치니인가봐요. ^-^;;

Arch 2010-12-14 15:52   좋아요 0 | URL
사악한 치니님? 에이~ 저는 뒤죽박죽 아치구요. 그러고보니 우리 이름은 한자씩 같네요.

게으른걸 찬양까지 하면 안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저쯤에서 피어나고 베짱이처럼 될까봐 걱정되고 그래도 베짱이는 노래라도 잘했지까지 미치면 좀 염려되지만, 이렇게 살아온걸 어떻게 또 단번에 바꾸겠어요.

마녀고양이 2010-12-1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아치님.

정말 좀 더 심플하게 살 수는 없는걸까요?
내내 제게 던지는 화두네요. ^^
회사 동료분의 말씀에... 쑥스럽게도 의욕이 불끈 솟고 말았다는 문구에 그만 빙긋 웃고 말았어요.
저도 그런 적 있거든요... ㅎㅎ. 추운 날이예요. 건강 챙기고 즐거운 날 되셔요!

Arch 2010-12-14 15:5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는 정말 너무 순식간에 자주자주 의욕이 솟아요. 의욕만큼만 했다면 뭔가 대단한걸 이룰 수 있었을텐데. 마녀고양이님도 그랬구나, 조금 힘이 돼요. 고양이님, 감기 조심하세요!

Forgettable. 2010-12-1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영화 봤음 ㅋㅋㅋ 시리어스 아치는 어울리는데 시리어스 뽀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지 않나요???
암튼 그러다가 치니님 댓글 보고 또 악. 괜히. 그냥 좋은 책이랑 좋은 영화 한 페이퍼에서 동시에 보게 되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Arch 2010-12-14 19:16   좋아요 0 | URL
뽀님이 보고 좋다고 했잖아요. 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선 이 형제가 정말 좋아졌어요. 몇년 전 본 '파고'는 어리기도 했고, '영화는 무조건 서사'란 입장에서 봤기 때문에 참 싱겁단 생각을 했지만.

러셀의 책(이러니까 이 사람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지만 달랑 이게 하나)을 보다가 저축만 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랑 먹고 마셔야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문득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졌어요.

비로그인 2010-12-20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몇 마디.

"애석하게도 이것 하나만 분명하다."

이거 읽으면서 제 일년의 일요일을 며칠 쯤 떼다가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Arch 2010-12-20 21:20   좋아요 0 | URL
그럼 좀 떼어주세요. 아흠! ^^

바람결님 오랜만이에요
 

 

  P가 매일마다 나름 전위적인 도시락 반찬을 싸오는 아치에게 물었다.
- 혹시 우리를 마루타 삼아 신부수업하는건가요?

 주위에서 ‘신부수업’이란 시대착오적인 단어에 발끈한 사람들이 동물 울음 소리 비슷한 야유가 쏟아지고, P는 동물들을 잠재우려고 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P의 곤경을 덜어주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냥 생각난 김에 냉큼 이렇게 말했다.

- (결혼은 모르겠지만, <--이 말은 하지 않았다. 점심 시간에 청문회용 답변을 해야할테니) 나중에 요리 잘 하는 사람 만날건데요.

 P는 마침 맛있는 먹잇감을 문 사자의 표정으로(동물 소리까지 난 판에) 요리 잘하는 남자는 둘 중 하나다, 변태거나 느끼하다는 것, 알렉스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그럼 이제 실험 대상은 그 남자겠다며 궁시렁댔다. 옆에서 다른 분이 요새는 유학파 요리하는 남자(이런 남자면 또 된다는 분위기는 뭘까)도 있으니 그런 사람 만나면 된다고 못을 박기 전까지 P의 ‘밥풀 튀기며 열변 토하기’는 멈추지 않았다.

 얼마 전에 철 구조물과 두꺼운 합판으로 앵글을 짜면서 소위 말하는 ‘남자들의 세계’를 경험했다. 공구의 집산지인 철물점을 탐방하며 다종다량의 ‘남자들 장난감’을 만지작거렸다. 전에 무대를 만들 때 써봤던 드릴을 다시 잡고, 나사를 조이고 풀고, 너트를 조이는 깔깔이를 사용해봤다. 뭔가를 내 손으로 만드는건 무척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내 얼굴을 도화지 삼아 ‘예쁘게 만드는’ 화장을 하는 것보다 좀 더.
 
 공구를 쓰는 것과 화장 하는 것을 비교하는건 좀 거친 방식이다. 하지만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으로 분류되는 것 자체의 러프함을 따르긴 어려울 것 같다.

 이 일을 하면서 몸을 많이 써서 피곤한 것보다 사람 관계에 더 치이고 있을 때였다. 즐거워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견디고 버티면서 일을 하는게 무슨 의미(월급이 나오잖아!)이겠냐 싶을 때 J일보에서 턱 끝이 하늘에 닿을락말락한 권위를 가진 분이 이런 칼럼을 썼다. 사회생활(이게 왜 사회 생활이야, 그럼 집 생활도 따로 있는가<--유치해 유치해)할 때 여자는 사람들 때문에, 남자는 일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여성은 관계지향적이라고 규정짓고 듣도 보도 못한 연구결과들을 근거라고 내미는걸 볼 때면 내가 여자라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사회성이 없어서 이러는건지 헷갈린다.

 <사랑, 그 혼란스러운>에는 사랑 이야기만 나오는건 아니다. 정말 성차란 없는건가란 소주제도 나오는데 그 중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흔히 여자는 공간지각능력이 떨어져서 운전을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운전하는 여자가 별로 없었다. 운전은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지금 많은 여성들이 ‘도전’하거나 ‘색다른 취향’으로 운전을 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차를 몬다. 연구 결과는 말한다. ‘지난 30년간 여자들의 자신감이 예전보다 더 커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자신감은 모든 지능 테스트에서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요즘 후진주차를 유독 못하는건 사람의 문제지 여자만의 문제는 아니게 되었다. 

 나는 여자들의 세계에서 화장 잘하는걸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남자들 사이에서 공구를 잘 다루는 사람으로 소문나지도 못했다. 그냥 나는 화장도 좀 하고, 공구도 좀 다룰줄 아는 여자 사람일 뿐이다. A는 남자지만 나보다 요리를 잘 하고, B는 여자지만 주차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 그렇다고 A와 B를 개개인의 성차를 넘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만 단정짓긴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을 각별히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남성적 행동과 여성적 행동에 대해 지닌 생각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은 내적 확신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남성적 혹은 여성적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성차는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의 경합이인데 몇몇 단순하고 의도적인 연구 결과에 따라 ‘여자는 이렇고, 남자는 이렇다’란 사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게 불편하다는 것 정도. 생물학적인 여성인 나로서는 그다지 ‘여성스럽지 않다’는 내적확신 때문에 성정체성 혼란까지는 아니고 사는게 좀 피곤할 때가 많았다는 것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는 이번 주 친구 결혼식에 예쁘게 하고 간다며 B에게 화장과 의상을 부탁할 정도로 얄팍한 면도 있다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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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12-09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치.
나는 내 앞에서 남자가 되는 남자사람이 좋은데요.
저는 상대 앞에서 내가 여자임을 느끼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구요.

그런데 확실한건,
공구도 다룰 줄 아는 여자가 섹시하다는 거에요! 아치가 공구를 다루는 걸 상상하고 있어요. 어쩐지 멜빵바지를 입어야 할 것 같아요. 공구를 다루려면.

Arch 2010-12-10 09:27   좋아요 0 | URL
어떤 느낌인지 알거 같아요. 저는 요새 '야해요'란 말을 들으면 참 좋아요.

왜 공구 다루는 여자들은 멜빵바지를 입을거란 이미지가 떠오를까요. 아, 엉골(엉덩이 골) 얘기하고 싶다. 아! 몸을 움직이다 보면 엉덩이 골이 보이니까 멜빵을 입는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어요.

치니 2010-12-1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사실 알렉스가 너무 느끼하던데요. ㅋㅋ (그렇다고 P님 의견에 동조한다는 뜻은 절대 아님!)

Arch 2010-12-10 16:07   좋아요 0 | URL
전 알렉스가 요리 잘한다니 어쩌니 하는거 좀 웃겼어요. 요리는 남자의 일이 아니고 가끔 기분 내거나 이미지 메이킹용으로 하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요.
 

 집이 아니라 방을 구할 생각을 하면서 가장 고민되었던건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장만하는지였다. 책을 가져오려면 책장이 필요하고, 빨래를 널 수 있는 행거도 사야한다. 작게는 수저에서 밥통까지 살 것 투성이었다. 평생 그 방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거주지가 달라지면 필요없을지도 모르는데 이 많은걸 다 사고, 나중엔 필요없다고 버리는 과정을 겪기가 싫었다. 사실 아무것도 사기 싫었다. 기존에 있던 가구들로 그럭저럭 연명해가던 침침한 예전 내 방만한 곳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도 한몫했다.

 말투가 빠르고 걸음도 빠르던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며 많은 방들을 봤다. 아무래도 처음 봤던 방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납 공간은 물론 여유 공간까지 부족한데다 싱크대를 열 때면 쾌쾌한 냄새가 나는 방이었다. 욕실 변기 커버는 벗겨져 있고, 냉장고에서도 묵은내가 났다. 하지만 햇살. 그 작은 방으로 쏟아지던 한낮의 햇살이 너무 맘에 들었다.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얼굴낯을 간지럽힐게 분명한 햇살, 빨래를 잘 말려줄 햇살, 무료한 한낮의 햇살! 묵은내까지 단번에 날려보내줄만한 햇살이란 꽤 실용적인 이유(그게 무슨...)와 낮에 형광등을 켤 필요 없겠다는 꽤 경제적인 안목이 (응?) 한몫 했다. 결국 그 방을 계약하고 지금껏 살고 있다.

 밥통을 고르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이효리가 나와서 밥 먹자고 하는 밥통을 사야할지, 원빈이 알아서 설거지를 할 정도로 밥맛을 좋게 한다는 밥통으로 선택해야할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전기압력밥솥은 너무 비쌌다. 전자 상가에 계신 분에 의하면 일반 밥통과 압력밥솥은 밥맛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던데.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궁리하다 밥맛은 밥통이 아니라 내가 결정한다는 아치식 사고를 거듭한 끝에 연보라색 밥통을 구입했다. 대신 몇십만원치 밥통을 안 산 보상심리로 좀 괜찮은 스피커를 샀다. 처음 몇번 설익은 밥, 요상한 냄새가 나는 밥을 거쳐 흑미와 밀, 밤과 당근의 조합을 거쳐 비로소 요즘 밥 되는 냄새만 맡아도 기분 좋아지는 밥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맛은 이효리나 원빈 대신 아치가 보장하겠지만.

 옷걸이는 왕자 행거로 사서 천장과 바닥에 고정해놨고(왕자 행거를 고르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지만 내 예리한 안목과 수중에 별로 없는 돈 덕분에 비교적 단시간에 선택할 수 있었다), 식기들은 식기 모으는게 취미인 C가 사놓기만 하고 쓰지 않았던 것들을 그러모아 쓰고 있다. 몇 가지 산 물건 중에 가장 맘에 드는건 좌식 책상. 하얀 책상에 앉아서 책이랑 영화를 보고 낚서를 하는데 이제야 내 집 같다.

 10년 넘게 살던 집에서 빨래 마르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한가로운 오후엔 딱 이렇게 늙어갔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곤 했다. 그때의 난 아이들과 남편을 보내고 가까운 친구를 불러 수다 떨며 맛있는걸 해먹을 것이다. 아마 학교 간 아이들이 돌아오는 저녁의 북적거림과 퇴근한 남편을 맞는 반가움도 상상했겠지. 공간은 사람을 바꾸는걸까. 요즘은 더 이상 바짝 마른 빨래 개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신 한 곳에 붙박혀 짐만 쌓아놓는 대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언제쯤 쟤가 결혼하나 '요러고' 쳐다보는 친척들을 비켜, 점점 공통 관심사가 없어지는 옥찌들을 비켜, 의무감을 느끼는 것들에서 벗어나 내가 가장 나답게 지낼 수 있는 곳들을 꿈꿔본다. 조이한의 <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을 보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근검절약하며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사는 베를린에 가보고 싶어졌다. 박상미의 <뉴요커>를 읽다보니 뉴욕도 가고 싶고, 섬에서도 살아보고 싶다. 언젠가 A와 지나가는 말로 그런 얘기를 한적이 있다.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떠돌아 다니면서 살았음 좋겠다고. 그때 A는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렇지만 내가 꽤 진지한 어투로 "그렇게 돌아다니다 책을 쓸거야. 그럼 그때 제목은 '한곳에 살기에 세상은 너무 넓고 내 발은 아직 지치지 않았다.'로 하자며 오바했던게 기억난다.
그때 A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아치는 막말쟁이라고,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동그래질뻔 했다고 약올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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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0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햇살때문에 막 따뜻한 페이퍼가 됐는데, 마지막에 볼을 쓰다듬는 것 때문에 뜨거운 페이퍼가 됐어요, 아치.
온라인으로 글을 읽을때 일단 길고 촘촘하면 패쓰하게 되는데, 아치 글은 그렇지 않아요. 음, 그건 아마도 내가 아치를 좋아하고 있어서일까요?

Arch 2010-12-09 11:55   좋아요 0 | URL
막말쟁이라고 했는데도?

그렇구나.. 다락방은 아치 좋아함쟁이~^^

2010-12-09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9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9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9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9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9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01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 그 혼란스러운 - 사랑을 믿는 이들을 위한 위험한 철학책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규호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 선사시대에 대한 무지 덕택에 진화생물학의 창의적인 판타지는 여전히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현대 인류를 과거의 한 지점에 고착된 '더 단순한' 형태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어려움에 부딪힌다.
1. 완전히 생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논리적 법칙은 자연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 능력에 속한다.
2. 석기 시대 인간이 처했던 환경 조건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관련된 것을 확인할 수 없다.
3. 생물학적 행동과 문화적 행동을, 그것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오래 전의 시공간 안에서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점. 
4. 우리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특징과 행동방식이 실제로는 석기시대의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써 생겨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 남녀 심리 연애서의 문제점
-- 손쉽게 확고한 토대를 얻고자 하는 바람에 따라 의도적으로 단순화하고 조작하거나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뒷받침해준다. 게다가 성의 화학작용을 설명하는 수많은 커플관계 지침서의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해석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수시로 월권행위를 한다는 데 있다.
 남녀 간에 호르몬 농도와 시상하부내 수용기가 실제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차이는 사고방식의 원칙적인 차이를 증명하지 못하며, 누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해 믿을 만한 진술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성격은 마치 온도계에서 온도를 읽어내듯 호르몬 수치를 통해 읽어낼 수 있으리라는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 생물학주의: 자연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방식, 자연이란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자연은 인간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생각해낸 이미지가 다다. 이런 주장은 주장의 의도와는 다르게 페미니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생물학이 내놓은 모든 설명의 배후에서 개인적 해석과 문화적 패턴을 찾아내려는 운동은 어느 순간 불합리성의 영역으로 빠질 수 있다. 세계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말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다. (버틀러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적 한계)
---> 인간이 본성적으로 성역할에 고정되어 있는지 여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주어진 것은 생물학적인 성이다. 정체성은 '행위' 즉 습관, 감정, 자기 이해 등을 통해 생겨난다. 나의 성이 미리 결정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체화'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문제이다. 사회적 성이 단지 아주 느슨하게만 생물학적 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런 성역할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경우에는 충분히 문제될 수 있다고 본다) 성역할은 여러 먼에서 상대적인데, 그것은 언제자 '타인'의 시선 아래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 생물학에서 항상 어떤 효용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보다 신학의 유산이다. 신학은 자연에서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인식하기를 원한다. 이는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 이해된 경제 이론들도 사람들이 걸핏하면 효용성을 부르짖는 데 한몫 했다. 

- 사랑의 생물학적인 유산은 아직 밝혀진바가 없다. 사랑은 유전적이고 신성한 번식의 사명에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은 사랑을 자극하는 중요한 재료다. 그러나 두개의 호르몬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복잡한 상태를 형성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사랑은 호르몬 칵테일이 아니며, '사랑 호르몬'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본능은 도움과 교정이 필요하다. 내 본능과 행동 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사랑에서 아주 멋지고 안심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본능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사랑은 욕구이며 다양한 심상의 집합이다. 사랑은 필요를 통해 태어나고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각인되는 능력이다. 

- 우리 관심은 천편일률적으로 유전적이거나 이기적인 방식을 띠지 않는다. 우리는 파트너나 섹스 파트너와 사회적 게임을 즐기면서 상대의 시선에 자신을 투영한다. 우리 행위는 마치 당구공이 쿠션에 부딪혀 튕겨나오듯이 상대의 시선에 따라 반사된다. 우리의 삶, 성적 관심, 애착과 혐오, 자아상, 자존감 등은 이런 방식으로 '당구대'위를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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