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읽은 책들을 꼭꼭 씹은 후 소화시켜 내놓은 책이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 듯 책에만 파묻혀 글을 쓴 게 아니라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노력한 책이다. 한동안 서재에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란 책이 신간 소개로 나오길래 저자의 지난 책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 책과 세계화로 인한 세계 곳곳의 사정을 기록한 <닥쳐라! 세계화>를 알게 되었다.  

 단어들은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고, 생각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작업 노트'를 통해 엄기호씨가 어떻게 공부를 해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래 글은 촛불 집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좀 전의 시각과는 다른 면을 제시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처럼 공부하고 싶은 것 만큼 말로만 떠드는 연대에서 벗어나 의미있게 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런 미덕을 지닌 책을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다.

  촛불집회에서 보았듯이 민주주의는, 셈되지 않던 사람이 “당신들의 셈법이 틀렸다!”라고 폭로하며 셈법의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이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가? 그것은 진짜로 이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들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그리워만 하던” 1987년의 세대가 아니라, 자신이 셈에서 빠졌다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사실을 진짜로 믿으며 그것을 실체화할 것을 요구하는 촛불들 말이다.

 물론 그 촛불들이 늘 성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저항은 실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늘 실패하고 패배한다. 2008년 봄의 촛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촛불에 참여한 사람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과, 배제된 주권자인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함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 존엄함에 대한 감각은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인간이 아닌 것은 존엄하지 않다는 인간 중심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존엄함에 대한 감각은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비인간, 국민과 비국민을 넘나든다. 살기 위한 투쟁은 언제나 죽은 자, 죽어 가는 자에 대한 초혼을 반드시 부르기 때문이다. 내가 존엄하다면, 죽어 간 존재, 죽어 가고 있는 존재의 존엄함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외국에서 에이즈 감염인들이 벌였던 목숨을 건 투쟁에서 많이 목격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투쟁 역시 촛불처럼 실패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목숨을 건 투쟁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며 패배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에이즈 감염인들은 투쟁이 끝나고 난 뒤 흐느끼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외쳤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존재함을, 이 사회에 내 목소리가 있음을 느꼈다. 나는 늘 목숨만 부지하는,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알리라.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 싸움에서 당신들을 통해 나의 존엄함을 얻었다. 약은 못 얻었지만 더 이상 원하는 것은 없다.”

2008년의 촛불이 우리 사회에서 진정 민주주의와 존엄함에 대한 감각이 발생한 사건이었다면 이것은 쉽게 꺼지지 않을 터이다. 이렇게 한 시대와 존엄함에 대해 공통으로 갖게 된 ‘우리’라는 의식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자 현실적 힘으로써 현재와 단절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 이들의 강력한 에너지가 될 테니 말이다.

‘우리’의 강력한 에너지는, 촛불을 만든 이들이 “우리가 국민이다!”라고 외치는 소리와, 촛불을 끄려는 이들이 “너희는 아무개이다!”라고 외치는 소리 사이의 적대가 해소되지 않는 한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적대 관계는 근대 자유민주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모순, 불화이지만, 그 속에서 아무개들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주변의 다른 아무개들에게도 눈을 돌리고, 그들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며 그 불화의 핵을 점점 더 포위해 나가리라. 근대가 가진 위험을 과격하게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이 정치의 무덤에서 잠자고 있던 아무개들은 황우석 사건이라는 반동적 급진화를 거쳐, 이렇게 다시 급진적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힘이 되어 우리 사회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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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2-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고립되지 말고 싸우고 있는‘세계’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대안이다."라고 얘기하시더군요.

저 또한 마음만 좀 과격해서 말이죠~

Arch 2010-12-14 19:08   좋아요 0 | URL
저는 입만 과격해요. 대안을 참 많이 외치고 다녔는데 결국 엉덩이가 무거워서 눌러앉기 일쑤였어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뭔가 도움이, 아니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