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아니라 방을 구할 생각을 하면서 가장 고민되었던건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장만하는지였다. 책을 가져오려면 책장이 필요하고, 빨래를 널 수 있는 행거도 사야한다. 작게는 수저에서 밥통까지 살 것 투성이었다. 평생 그 방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거주지가 달라지면 필요없을지도 모르는데 이 많은걸 다 사고, 나중엔 필요없다고 버리는 과정을 겪기가 싫었다. 사실 아무것도 사기 싫었다. 기존에 있던 가구들로 그럭저럭 연명해가던 침침한 예전 내 방만한 곳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도 한몫했다.

 말투가 빠르고 걸음도 빠르던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며 많은 방들을 봤다. 아무래도 처음 봤던 방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납 공간은 물론 여유 공간까지 부족한데다 싱크대를 열 때면 쾌쾌한 냄새가 나는 방이었다. 욕실 변기 커버는 벗겨져 있고, 냉장고에서도 묵은내가 났다. 하지만 햇살. 그 작은 방으로 쏟아지던 한낮의 햇살이 너무 맘에 들었다.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얼굴낯을 간지럽힐게 분명한 햇살, 빨래를 잘 말려줄 햇살, 무료한 한낮의 햇살! 묵은내까지 단번에 날려보내줄만한 햇살이란 꽤 실용적인 이유(그게 무슨...)와 낮에 형광등을 켤 필요 없겠다는 꽤 경제적인 안목이 (응?) 한몫 했다. 결국 그 방을 계약하고 지금껏 살고 있다.

 밥통을 고르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이효리가 나와서 밥 먹자고 하는 밥통을 사야할지, 원빈이 알아서 설거지를 할 정도로 밥맛을 좋게 한다는 밥통으로 선택해야할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전기압력밥솥은 너무 비쌌다. 전자 상가에 계신 분에 의하면 일반 밥통과 압력밥솥은 밥맛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던데.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궁리하다 밥맛은 밥통이 아니라 내가 결정한다는 아치식 사고를 거듭한 끝에 연보라색 밥통을 구입했다. 대신 몇십만원치 밥통을 안 산 보상심리로 좀 괜찮은 스피커를 샀다. 처음 몇번 설익은 밥, 요상한 냄새가 나는 밥을 거쳐 흑미와 밀, 밤과 당근의 조합을 거쳐 비로소 요즘 밥 되는 냄새만 맡아도 기분 좋아지는 밥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맛은 이효리나 원빈 대신 아치가 보장하겠지만.

 옷걸이는 왕자 행거로 사서 천장과 바닥에 고정해놨고(왕자 행거를 고르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지만 내 예리한 안목과 수중에 별로 없는 돈 덕분에 비교적 단시간에 선택할 수 있었다), 식기들은 식기 모으는게 취미인 C가 사놓기만 하고 쓰지 않았던 것들을 그러모아 쓰고 있다. 몇 가지 산 물건 중에 가장 맘에 드는건 좌식 책상. 하얀 책상에 앉아서 책이랑 영화를 보고 낚서를 하는데 이제야 내 집 같다.

 10년 넘게 살던 집에서 빨래 마르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한가로운 오후엔 딱 이렇게 늙어갔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곤 했다. 그때의 난 아이들과 남편을 보내고 가까운 친구를 불러 수다 떨며 맛있는걸 해먹을 것이다. 아마 학교 간 아이들이 돌아오는 저녁의 북적거림과 퇴근한 남편을 맞는 반가움도 상상했겠지. 공간은 사람을 바꾸는걸까. 요즘은 더 이상 바짝 마른 빨래 개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신 한 곳에 붙박혀 짐만 쌓아놓는 대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언제쯤 쟤가 결혼하나 '요러고' 쳐다보는 친척들을 비켜, 점점 공통 관심사가 없어지는 옥찌들을 비켜, 의무감을 느끼는 것들에서 벗어나 내가 가장 나답게 지낼 수 있는 곳들을 꿈꿔본다. 조이한의 <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을 보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근검절약하며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사는 베를린에 가보고 싶어졌다. 박상미의 <뉴요커>를 읽다보니 뉴욕도 가고 싶고, 섬에서도 살아보고 싶다. 언젠가 A와 지나가는 말로 그런 얘기를 한적이 있다.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떠돌아 다니면서 살았음 좋겠다고. 그때 A는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렇지만 내가 꽤 진지한 어투로 "그렇게 돌아다니다 책을 쓸거야. 그럼 그때 제목은 '한곳에 살기에 세상은 너무 넓고 내 발은 아직 지치지 않았다.'로 하자며 오바했던게 기억난다.
그때 A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아치는 막말쟁이라고,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동그래질뻔 했다고 약올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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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0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햇살때문에 막 따뜻한 페이퍼가 됐는데, 마지막에 볼을 쓰다듬는 것 때문에 뜨거운 페이퍼가 됐어요, 아치.
온라인으로 글을 읽을때 일단 길고 촘촘하면 패쓰하게 되는데, 아치 글은 그렇지 않아요. 음, 그건 아마도 내가 아치를 좋아하고 있어서일까요?

Arch 2010-12-09 11:55   좋아요 0 | URL
막말쟁이라고 했는데도?

그렇구나.. 다락방은 아치 좋아함쟁이~^^

2010-12-09 0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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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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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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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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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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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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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1 16: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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