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가 매일마다 나름 전위적인 도시락 반찬을 싸오는 아치에게 물었다.
- 혹시 우리를 마루타 삼아 신부수업하는건가요?

 주위에서 ‘신부수업’이란 시대착오적인 단어에 발끈한 사람들이 동물 울음 소리 비슷한 야유가 쏟아지고, P는 동물들을 잠재우려고 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P의 곤경을 덜어주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냥 생각난 김에 냉큼 이렇게 말했다.

- (결혼은 모르겠지만, <--이 말은 하지 않았다. 점심 시간에 청문회용 답변을 해야할테니) 나중에 요리 잘 하는 사람 만날건데요.

 P는 마침 맛있는 먹잇감을 문 사자의 표정으로(동물 소리까지 난 판에) 요리 잘하는 남자는 둘 중 하나다, 변태거나 느끼하다는 것, 알렉스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그럼 이제 실험 대상은 그 남자겠다며 궁시렁댔다. 옆에서 다른 분이 요새는 유학파 요리하는 남자(이런 남자면 또 된다는 분위기는 뭘까)도 있으니 그런 사람 만나면 된다고 못을 박기 전까지 P의 ‘밥풀 튀기며 열변 토하기’는 멈추지 않았다.

 얼마 전에 철 구조물과 두꺼운 합판으로 앵글을 짜면서 소위 말하는 ‘남자들의 세계’를 경험했다. 공구의 집산지인 철물점을 탐방하며 다종다량의 ‘남자들 장난감’을 만지작거렸다. 전에 무대를 만들 때 써봤던 드릴을 다시 잡고, 나사를 조이고 풀고, 너트를 조이는 깔깔이를 사용해봤다. 뭔가를 내 손으로 만드는건 무척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내 얼굴을 도화지 삼아 ‘예쁘게 만드는’ 화장을 하는 것보다 좀 더.
 
 공구를 쓰는 것과 화장 하는 것을 비교하는건 좀 거친 방식이다. 하지만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으로 분류되는 것 자체의 러프함을 따르긴 어려울 것 같다.

 이 일을 하면서 몸을 많이 써서 피곤한 것보다 사람 관계에 더 치이고 있을 때였다. 즐거워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견디고 버티면서 일을 하는게 무슨 의미(월급이 나오잖아!)이겠냐 싶을 때 J일보에서 턱 끝이 하늘에 닿을락말락한 권위를 가진 분이 이런 칼럼을 썼다. 사회생활(이게 왜 사회 생활이야, 그럼 집 생활도 따로 있는가<--유치해 유치해)할 때 여자는 사람들 때문에, 남자는 일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여성은 관계지향적이라고 규정짓고 듣도 보도 못한 연구결과들을 근거라고 내미는걸 볼 때면 내가 여자라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사회성이 없어서 이러는건지 헷갈린다.

 <사랑, 그 혼란스러운>에는 사랑 이야기만 나오는건 아니다. 정말 성차란 없는건가란 소주제도 나오는데 그 중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흔히 여자는 공간지각능력이 떨어져서 운전을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운전하는 여자가 별로 없었다. 운전은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지금 많은 여성들이 ‘도전’하거나 ‘색다른 취향’으로 운전을 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차를 몬다. 연구 결과는 말한다. ‘지난 30년간 여자들의 자신감이 예전보다 더 커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자신감은 모든 지능 테스트에서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요즘 후진주차를 유독 못하는건 사람의 문제지 여자만의 문제는 아니게 되었다. 

 나는 여자들의 세계에서 화장 잘하는걸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남자들 사이에서 공구를 잘 다루는 사람으로 소문나지도 못했다. 그냥 나는 화장도 좀 하고, 공구도 좀 다룰줄 아는 여자 사람일 뿐이다. A는 남자지만 나보다 요리를 잘 하고, B는 여자지만 주차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 그렇다고 A와 B를 개개인의 성차를 넘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만 단정짓긴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을 각별히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남성적 행동과 여성적 행동에 대해 지닌 생각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은 내적 확신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남성적 혹은 여성적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성차는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의 경합이인데 몇몇 단순하고 의도적인 연구 결과에 따라 ‘여자는 이렇고, 남자는 이렇다’란 사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게 불편하다는 것 정도. 생물학적인 여성인 나로서는 그다지 ‘여성스럽지 않다’는 내적확신 때문에 성정체성 혼란까지는 아니고 사는게 좀 피곤할 때가 많았다는 것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는 이번 주 친구 결혼식에 예쁘게 하고 간다며 B에게 화장과 의상을 부탁할 정도로 얄팍한 면도 있다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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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12-09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치.
나는 내 앞에서 남자가 되는 남자사람이 좋은데요.
저는 상대 앞에서 내가 여자임을 느끼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구요.

그런데 확실한건,
공구도 다룰 줄 아는 여자가 섹시하다는 거에요! 아치가 공구를 다루는 걸 상상하고 있어요. 어쩐지 멜빵바지를 입어야 할 것 같아요. 공구를 다루려면.

Arch 2010-12-10 09:27   좋아요 0 | URL
어떤 느낌인지 알거 같아요. 저는 요새 '야해요'란 말을 들으면 참 좋아요.

왜 공구 다루는 여자들은 멜빵바지를 입을거란 이미지가 떠오를까요. 아, 엉골(엉덩이 골) 얘기하고 싶다. 아! 몸을 움직이다 보면 엉덩이 골이 보이니까 멜빵을 입는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어요.

치니 2010-12-1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사실 알렉스가 너무 느끼하던데요. ㅋㅋ (그렇다고 P님 의견에 동조한다는 뜻은 절대 아님!)

Arch 2010-12-10 16:07   좋아요 0 | URL
전 알렉스가 요리 잘한다니 어쩌니 하는거 좀 웃겼어요. 요리는 남자의 일이 아니고 가끔 기분 내거나 이미지 메이킹용으로 하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