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질하는건 즐겁다. 내가 없으면 일의 어느 한부분이 돌아가지 않는데서 느껴지는 퇴행적인 쾌감도 나쁘지 않다. 나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들으면 없던 존재감도 생기고 나도 뭔가 남들에게 보탬이 되는 인간인 것 같은 착각이 유용할 때도 있다. 그런데도 때때로 돈을 벌기 위해 아침 일찍 나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게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물론 같이 일하는 분들의 의사를 우선적으로 존중해 (그들이 담배 피고 싶다거나 쉬고 싶은 리듬에 따라) 일을 하는데서 오는 꼬운 맘이 있고, 역시나 이 일이 정말 내가 해야할 일일까란 무슨 일을 하든 드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혹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로 게으름뱅이인 나를 위해 갖가지 합리화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그래서 요즘 이런 책을 읽는다. 언더커버보스를 보면서 저렇게 열심히 일하면 나도 나중에 CEO 만나서 보상받는건가란 생각보다 대체 얼마나 열심히 해야 그것도 몇 년 동안 일해야 바늘 구멍만한 확률을 거쳐서 내 일을 인정받는가란 폭폭함이 더했다. 기껏 며칠 말단 사원의 일을 체험하면서 근로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CEO의 번들거리는 민낯이 민망하기도 했다. 일을 안 하면서 살 수는 없는걸까. 회사의 구석진 공간에 숨어서 책을 읽거나 페이퍼를 쓰면서 조심스럽게 월급을 받을 수 없는걸까.

이토록 끝없이 심각해질 수 있을까. 주인공 래리 고프닉은 연달아 벌어지는 심난한 일들 때문에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랍비를 찾는다. 하지만 번번히 답을 얻을 수가 없다. 이 일에는 분명히 신의 의지가 개입됐을 것 같고 이건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지만 정작 돌아오는 답은 애매모호할 뿐이다. 뇌물을 주고 간 학생의 돈을 받기로 맘 먹고 성적을 고친 순간, 엑스레이 검사 결과를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자는 의사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러다 영화는 끝나버린다.
며칠 전, 숨어서 페이퍼를 쓰고 있는데 직급은 같지만 경력은 이 회사에서 최고로 많은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딴 짓을 하는 것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나 싶어 딴청을 부리고 있는데 그가 심상하게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일 얘기를 했다. 한달에 한번꼴로 10미터가 넘는 천장까지 아시바를 쌓고 빔 프로젝트 렌즈를 갈았던 일에서 아무것도 안 알려주던 사수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애썼던 일, 자신이 이 일을 하는걸 정말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 세 가지 분과의 일을 한 번에 처리하느라고 뭐 빠지게 바빴던 일까지. 워낙 닳고 닳은 사람이라 분명 내게 뭔가를 주입시키려고 한거란걸 안다. 그가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도가 튼 사람인 것도, 게으른 내가 쉽게 변하지 않으리란 것도 잘 안다. 그런데도 쑥스럽게 그의 말을 듣다 나도 모르게 의욕이 불끈 솟고 말았다.
난 그동안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는 과정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남들 다 하는 일을 나는 유별나게 여기고 있었으며 자꾸 늘어지고 싶어한다. 일을 안 할 때는 직장을 잡는게 최고의 소원이라며 나를 달달 볶았다. 이것만 보면 뭔가 분명해지는 느낌이고, 동료의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아직 하나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게 고쳐야할 채점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의사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것도 아니니 나는 이 중간 어디쯤에서 늘 허둥지둥 댈게 분명하다. 애석하게도 이것 하나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