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가족 모임에 갔다가 아빠께서 내 얘기를 하시는걸 우연찮게 듣게 됐다. 워낙에 과묵하시고 필요할 때 아니면 말씀을 잘 안 하시는 분이라 약주 한잔씩 드셔야 속엣말을 하셨는데 그 날이 아마 그랬던 모양이다.

 사실 내 얘긴 할게 없다. 기껏 대학까지 가르쳐놨더니 몇년째 뭔 준비만 한대고 성격도 이상하고 이쁜 구석도 없으니 뭐 굳이 눈 씻고 찾아보면 아주 티끝만한 장점이 있긴하나 대체로 유해해서 찾아볼 엄두도 안 나실거다. 대체 아빤 무슨 말씀을 하실까.

"우리 큰 딸이 머리는 좋아-모든 부모님들이 갖고 계신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판단- 얘가 조금만 노력해도 뭔가 할텐데. 그래도 지가 하고 싶은거 한대는데 어떡하겠어.-여기서 잠시 한숨. 난 심호흡- .. 그래도 우리 딸이 아빠라면 끔찍히 생각해요."

 그 다음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생각은 이미 '끔찍히'에 사로잡혀 버렸다.

 아빠를 좋아하고 염려하는 맘은 있지만 아빠가 강조한 '끔찍히'란 굉장히 살갑고 찡한 꾸미는 말만큼이나 끔찍하게 아빠를 생각한 적은 없다. 내가 아빠를 보는 시선은 부모로서보단 인간적인 면으로 바라보는게 다였고 배울 점도 많지만 그만큼 부정적인 부분도 허다하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아빠랑 있는 시간은 즐겁지만 꼬박꼬박 안부 챙길만큼 성실한 딸도 아니고 '아빠'란 정서만으로 맘이 애틋해지는 유아기적 몰입을 투영할만한 나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아빤 왜, 내가 당신을 끔찍히 생각한다고 여기신걸까.

 그 궁금증은 며칠 가다가 오늘 알라딘 서재에서 글을 읽다 모든 부모들은 약간씩 자식들을 과장해서 표현한단 문구를 대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자식을 투영시켜 자신을 대변하는게 아니라 부모란 존재가 원래 그렇다는 것. (아마 마태우스님 서재였던 것 같다.) 그게 사랑이든 집착이든 과시든 남에게 자기 자식이 손가락질 받는걸 싫어하는게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 그래서 자식에게 허물이 있을수록 반대 급부로 자랑에 열을 올린다고 한다.

 자랑할게 너무 없어 아빤 '끔찍하게'란 표현을 쓰셨고 매번 가족 모임에서 결혼 아니면 직장으로 공격받던 난 그래도 부모한텐 잘하는 말하자면 무능하지만 '애는 착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아빠는 술 드실때면 수순처럼 자식 자랑을 하셨고 옆에서 듣고 있던 난 과문한 탓에 아빠가 참 주책이라고 생각했던게 참 오래 전 일 같다. 그때 아빠의 가장 큰 보물은 세딸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아주 조금 공부 잘했던 날 아빤 특별히 조금 더 이뻐하셨다. 물론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으셨지만 열 손가락 중에 난 조금 더 아픈 손가락이었고 애정을 많이 주는만큼 기대하는 것도, 그로인해 내가 받은 부담감도 컸다. 어렸을땐 그게 참 싫어서 아빠가 기대를 하실수록 나는 엇나간다는걸 보여주려는 시도도 많이 했다. 그래봤자 야자 튀고 가끔 심부름 시키실 때 귀먹은체 한게 다였지만. -무능의 정점이로군-

 꿈을 갖고 자식 자랑하시던 아빤 꿈처럼 빛나는 미래가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는 자식들을 보시며 술자리에서도 별 말씀을 안 하셨다.- 어쩌면 못하신거겠지. - 날 추스려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겹던 20대엔 관계의 형태가 늘 일관될순 없다고 생각했고 어깨 위에 얹힌 아빠의 무게가 가벼워져 좀 숨쉴만 해졌다며 난 안도했다.

 그리고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난 자식을 옹호하신 아빠 맘이 느껴져 맘 한편이 싸해진다. 그동안 자식들을 속박하지 말라고 아빠에게 볼멘 소릴 내뱉곤 했던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자기 안에서 찾는 행복과 충족감도 중요하지만 사회에서 받을 시선으로 행여 딸들 맘 다칠까 다 주셔놓고도 당신의 부족으로 자식들이 웃자랄까 염려하는 마음. 깨달음이나 고마움은 한걸음 늦게 찾아온다.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훈기로 따듯한 분위기가 감도는 날, 얼큰한 취기로 말씀을 꺼내실 아빠가 굳이 최고치의 부사인 '끔찍하게'란 말을 안 쓰시고도 흐뭇하게 딸들 얘기를 하실 모습을 상상해본다.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는 딸들의 면면이 생생하고 예쁘게 취억되는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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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1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부모의 맘이 다 그렇다는 걸 알고, 겪은 나이가 되었어도.....부모님의 그 마음엔 아직 못 미친답니다.ㅜㅜ

웽스북스 2008-06-1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어떻게 자랑할 거리를 찾아내시는 것도 참 대단해요
저도 같은 마음, 여러번 느꼈었어요

Arch 2008-06-2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매번 그런가봐요. 웬디양님/그쵸. 저희 아빠 대단하게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