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慢), mana(남태평양 연안 원주민의 언어로 현상 뒤에 숨어있는 초자연적인 힘)의 한역, 영어로는 pride 또는 conceit로 번역된다. 아만, 자신이 남보다 훌륭하다고 망상하여 남에게 뽐내려 드는 방자한 마음, 주의할 점은 학식이나 용모, 혈통 등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는 마음은 교인데 반해, 만은 무조건 자기 자신이 낫다고 느끼는 본능적 심성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교는 오히려 조복받기 쉽다고 하겠으나. 만은 그 뿌리가 깊고 미묘하므로, 인간의 해탈을 막는 열가지 족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마지막 족쇄에 속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해야 비로소 완전히 소멸된다. 범어의 원래 뜻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긴 자의식(self-conception)을 가리킴.-100쪽
겉으로 보란 듯이 잘난 체하는 것보다 이렇게 속으로 싸고도는 만이야말로 골치 아픈 거지. 한때는 그것이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저력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결국은 만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일찍이 이 만을 다스리는 것이 내 인생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임을 알고 여러 번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다스리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아만에 사로잡혀 쓸데없는 말들을 허공에 마구 뱉어놓은 날의 잠자리는 왜 이리 뒤숭숭하고 불안한지. 마치 만이라는 독을 내 주변에 풀컥풀컥 풀어낸 것만 같아. 그럴 때 나는 빛과 소금이 아니라 독초가 된다. 만. 그것은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한 고통을 통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함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101쪽
默內雷, 겉으론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속으론 우뢰와 같다. 내부의 복잡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기에 앞서 자신에게나 상대에게나 좀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순화시키려 노력하는 사람. 평화란 절대적 평온, 정지, 무사, 고요의 상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단히 움직이고 사고하는 ‘동적평형’ 상태라는 것. 두 사람 사이가 평화롭다고 할 때 내부적으로 부단히 교류가 이루어지고 대화가 진행되어 신진대사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109쪽
나는 요즘 인간관계에 있어서 자연요법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어떤 호흡이랄까 리듬이랄까 하는 것을 대화 중에 잡아내어 그 흐름 속에서 얘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그런다. 그렇게 하니 나도 편하고 상대방도 편해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말하자면 자연류를 터득한다고나 할까? 해서 나이가 들면 저절로 자연과 가까워지고 싶어하는가 보다.-156쪽
야생의 풀 냄새를 제거하고 인간의 미각-작위로서의 문명의 변천에 따라 함께 변해온-에 맞추어 특정한 맛만을 선택하여 육종, 발전시킨 것이 오늘의 야채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얄팍한 입맛을 위하여 원래의 야채가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영양소와 맛을 제거해 버리고 특정의 맛과 영양소만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래 놓고 요리할 땐 그 위에 갖은 양념을 다 뿌리고 또 영양을 보충한다고 각종 비타민제를 따로 먹고 있다. 우습지 않니? 이것이 문명이다. 요소를 분리해서 자기가 필요한 것만 골라 먹겠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대단히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격이다. 이 세상은 단순히 요소의 합이 아니거든, 각 요소들은 전체 속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제 가지를 온전히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전체와 분리된 요소는 제한적인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채소는 채소를 둘러싼 생태계와 온전히 결합되어 있어야 하고 그 채소를 먹을 때에도 요소로 나누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식주의자들은 되도록 전체식을 권장하는 것이다. 머리부터 뿌리까지 전체를 통째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177쪽
역시 중요한 것은 꽃에 대한 염원이란다. 즉 얼마나 정성스럽게 꽃에다 염파를 보내느냐이지. 매일 아침 일어나서 물을 주는데, 흙의 상태와 그날의 날씨에 따라 주는 양이 다르다. 그리고 물을 준 뒤엔 꼭 나팔꽃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밝고 건강하게 자라라고 격려해준다. 어떻게 보면 나팔꽃은 나의 기를 먹고 자라는 것과도 같지.-213쪽
무위에 의한 학습, 돌이켜 보면 실제로는 그리지 않고 있었어도, 관념 속에서 또 손안에서 그림 그리기는 계속되고 있었던 거다. 실제로 괜찮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 그것이 결코 나의 의지로만 그려진 것이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네 삶은 일정부분 우리가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어떤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고 있음을 그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명작’이란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 일궈 낸 거품 같은 것이다. 명작은 작가가 그리고자 의도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증산 계통의 언어를 빌어 표현한다면 ‘천지도수’가 맞아 떨어져야 명작이 나오는 법이다. 때론, 그림은 별로인데 관람자가 만드는 명작이 있다. 명작의 기본 조건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므로 그것 역시 명작이라 할 수 있다 ‘천지도수’란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유통과 소비 과정에도 모두 적용되는 것이거든.-223쪽
그림 그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관찰력이다. 관람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일수록 화가의 관찰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관찰력은 훈련에 의해 강화된다. 그런게 그저 대상을 오래 바라본다고 해서 관찰력이 강해지는 게 아니란다. 대상의 각 부분을 서로 비교 대비시켜 가면서 바라보아야 관찰력이 강해진다. 우리는 보통 어떤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나서는 그것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관찰하는데 있어 시간은 별로 중요한 변수가 못 된다. 관찰력이 탁월한 사람은 아무리 짧은 시간이 주어져도 단번에 대상의 특징과 디테일을 잡아낸다. 진리에 다다르는 방식으로 내가 즐겨 쓰는 비유인 숲 안팎 변증법(숲 밖, 숲 안, 숲 밖을 반복적으로 드나들면서 숲의 실체를 파악하는 방법)을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231쪽
세상일 또한 그렇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래. 겉으로 보기에 소문이건 자신의 직접 관찰이건 간에 아무리 그럴 듯한 사람일지라고 구체적인 사안을 가지고 함께 뒹굴어 보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설사 같이 산다고 하여도 십 년이 지난 뒤에야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만약에 화초를 십년 키운다면 이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차이가 양자의 창조적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식물에게도 창조적 능력이 없는 건 아니겠으나 인간의 그것은 진정 하느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능력의 대부분이 관찰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232쪽
남을 결코 비판하지 않고 자기 잣대로 남을 몰아세우지도 않는 이 사람들, 남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이들, 이런 사람들 사이에 심각한 트러블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을 거야 불평과 불만으로 많은 시간 자신을 괴롭히고, 못 본 척 살자니 속이 불편하고, 그러자니 자연히 사람들을 외면하고 혼자있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야. 이에 대한 지금까지 나의 처방은 ‘힘들지만 부딪쳐서 정면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다크인들의 대응방식이 훨씬 차원이 높은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상대방의 행위에 뭐이 그리 안절부절인가? 바보처럼, 바다처럼 그렇게 받아주어라!’ -235쪽
<오래된 미래> <나무를 심은 사람> <침묵의 봄> <카스트로 전기> 2004.01.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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