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 없이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고통없이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마흔 살이 훌쩍 넘어 나는 이제 아니라도 대답한다. 형벌과 고통과 가끔씩 하늘을 보고 나를 울부짖게한, 뭐랄까, 불가항력이랄까 아니면 운명 같은 것이 이제는 꼭 나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의 이야기일 뿐이니, 신이 내게 고통을 줄까 안이를 줄까, 물으면 나는 여전히 안이를, 깨닫지 못해도 좋고 멍청해도 좋으니 안이함을 주세요, 하고 겁도 없이 졸라댈 것 같다. 그래서 신은 우리 모두에게 물어보지 않고 불행을 내리나 보다. 실은, 불행처럼 포장되어 있는 보물 덩어리의 상자를.-0쪽
누구를 괴롭히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이,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아가지도 않으리라. 나 자신을 믿고 나 자신에게 의지하며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하면서, 고이는 내 사랑들을 활자에 담으리라. 가슴이 아플까 봐 서둘러 외면했던 세상의 굶주림과 폭력들과 아이들을 이제는 오래 응시하면서.-0쪽
인간이 가진 무수하고 수많은 마음갈래 중에서 끝내 내게 적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설마, 설마,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 했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그 희망의 독, 아무리 규칙을 지켜도 끝내 파울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악착스러운 진리를 내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난 후였다. -0쪽
사람들은 누구나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몰릴 지경만 아니라면,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조차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그렇다고 이미 생각해온 것, 혹은 이랬으면 하는 것만을 원한다는 것을, 제가 그린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났을 때, 길이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 있다면, 아마 길을 제 지도에 그려진 대로 바꾸고 싶어하면 했지, 실제로 난 길을 따라 지도를 바꾸는 사람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돌이켜보니 내 어린 시절의 지도에 이미 내 인생이 그려져 있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주하는 실수와 내가 자주 겪는 슬픔과 내가 머뭇거리다 돌이키지 못한 정황들이, 인생은 이미 그때 내게 나침반을 표시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상징적으로 압축된 상태도 아니었고 암호로 가득 찬 것도 아닌, 그러나 나는 결코 그 암호와 상징들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고, 그것이 다시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세월은 한번 가면 그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막연히 믿었던, 그래서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같은 삶을 같은 항아리 속에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0쪽
그 승강이를 들으며 아마 산다는 게, 아마도 힘겹고 슬프고, 등불하나 없이, 춥고 깜깜한 진창길을 걸어가는 일 같다는 걸, 누구나 헨젤과 그레텔보다 험하고 처량하게 숲속을 헤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을 나는 봉순이 언니의 울음소리를 통해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으로 태어난 자들, 그 인생의 춥고 낮은 배경음을.-0쪽
삶에서 사소한 일이 없는 이유는, 매순간 마주치게 되는 사소한 선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소한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트는 삶의 덩어리가 중요하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0쪽
나는 가끔 책을 읽다가 결국 책 속에서 내가 아는 것만 읽게되지 않는가라고 자문한다. 흔히 불가에서 경전을 읽을 때 그 경전의 살고 죽음은 읽는 이의 근기에 달려있다고 한다. 마치 같은 물을 마셔도 젖소는 우유를, 독사는 독을 만든다는 것과 같다. 나는 텍스트라는 젓소에서 우유를 짜내는 탁월한 감식안의 해석자들에게 늘 감탄한다. 그들은 텍스트 속에 감춰진 의미까지 드러내서 그 텍스트를 낳은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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