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났다. 원래 보자마자 바로 쓰는게 나 이지만 이건 좀 생각 할 시간이 필요했다. 대체 영화가 재밌었는지 아니었는지 감동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잘 모르겠는, 이렇게나 헤깔리는 영화를 본 것이 너무 간만이기 때문이다.
줄리아 로버츠가 나오는 이 영화는 엄마와 같이 봤다. 엄만 귀여운 여인에서의 줄리아 로버츠에게 너무 감동을 받아서인지 그녀가 나오는 영화는 다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간만에 보는 영화를 저걸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는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영화였으니까 말이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줄리아 로버츠는 여대에 미술사 교사로 들어간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줄리아 로버츠는 하지만 명문 여대에서 한없이 실망을 한다. 학생들이 오직 시집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는 여학생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시집만이 그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하는 목표지인양 오로지 그 생각만 하고 산다. 여기서 좌충우돌하던 줄리아 로버츠는 학기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제서야 여학생들은 줄리아 로버츠에 대해 닫혔던 맘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재밌을뻔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었던 것은 캐릭터들이 모두 종이인형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시대 여자들이란 것이 다 비슷했을수도 있겠지만 좀 더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나같이 너무 전형적이었다. 줄리아 로버츠도 이 영화에서 밋밋했지만 그녀의 학생들 캐릭터는 도저히 봐 주기가 힘들었다. 이건 그녀들이 보수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인물이건 간에 캐릭터는 살아있어야 하는데 여긴 전부 죽은 시체들의 밤 같았다.
나도 여자이지만. 여자로 살기는 참 힘들다. 남자들도 남자로 살기 힘들겠지만 난 남자가 아니라서 여자가 힘든것 밖에는 사실 잘 모르겠다. (이해는 하겠지만 직접 느끼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여자이기에 강요된 것은 너무 많다. 내가 레이스와 리본과 꽃무늬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고 그런것을 내 마음껏 좋아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회가 정해놓은 여자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의 천상 여자같은 모습. 그리고 남자가 돌봐주지 않으면 잠시도 외로워서 혹은 슬퍼서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 늘 나 혼자로도 행복한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마처럼 남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나는 그냥 나 하나로 온전하고 싶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조금씩 바꾸었다. 여자라기 보다는 그냥 인간. 혹은 사람으로 말이다. 나는 여자로 길러졌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바뀌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페미니스트이거나 남성 혐오증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다. 나도 남자를 좋아한다. 다만 의지하지 않을 뿐이고 굳이 순위를 정하자면 사랑보다는 일이 항상 우선이라는 것. 그게 전부이다. 난 한번도 남자에게 의지를 해 본 적이 없다. 나를 떠난 남자들 중에서는 이런 점이 맘에 들지 않아서 혹은 책임감 같은걸 전혀 느끼지 못해서 가버린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는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날 책임져야하고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느낌을 주어서 결혼에 골인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친구같은 사람을 만나면. 누가 돌봐주고 챙겨주고가 아닌 서로 아끼고 편하고 사랑하면 결혼이란걸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에는 남자와 섹스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여자들이 다소 깨여있는 그리고 자유로운 여자인듯 나온다. 그 시대에는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그것 만으로도 여자들이 하기에는 벅찼을 테니까. 그런데 말이다. 지금도 그렇다. 남자와 섹스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잘 마시는 여자들은 진보적 성향을 지닌 여자처럼 본다. 그런데 난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나도 저렇게 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진보적이라거나 남보다 의식이 깨어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살아가는 한 방식일 뿐이다.
이렇게 살건 저렇게 살건. 전부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내 서재에서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에 놀라고 실망한 분을 봤다. 실망을 안겨드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왜 그렇게 보였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현재 사랑하는 남자가 없고,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배울만큼 배웠고 (대졸을 기준으로 할때) 전문직에 종사하고 책 좀 읽었기 때문일까? 나는 여자라서 여자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는 아닌것 같다. 그럴만큼 뭘 알지도 못하고 나를 어떤 성향에 맞춰 골치아프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의 이름으로 분노할 일이 있으면 불같이 분노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사에 난 페미니스트야 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다.
이 영화는 그저 그랬지만 생각은 참 많이 했다. 그걸 다 옮기지 못하는 것은 내 글 실력이 짧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만에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